류신의 <다성의 시학, 책머리에>
별과 별 사이에 섬이 있다
이 책은 우리 시대 시인들이 밤하늘에 쏘아올린 별들과 열애한 흔적이자 교감의 기록이다. 우선 고백컨대 '위대한 밤의 어머니가' 지닌 풍요로운 다산성 덕분에 내 배움과 기쁨은 적지 않았다.
오오, 위대한 밤의 어머니
그 무궁한 자궁 깊숙이에서
빛의 알들을 품고 있다가
하나씩 깨뜨려 눈뜨게 하는가
금강초록 터지는 듯
별들의 웃음소리
까르륵 까르륵 쏟아지네
- 나희덕 <밤의 힘> 부분
하지만 아름답게만 보이던 '빛의 알들'도 사실은 비루하고 고단한 삶으로 인해 군데군데 생채기난 사금파리이거나 허공에 떠 있는 무지무지하게 못생긴 큰 절망의 돌덩어리였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나는 내가 바라본 별들이 어떤 시인의 노래처럼 "저 먼 우주의 어느 곳엔가/ 나의 병을 앓고 있는 별"이 아니었는지 가만히 묵새겨보기도* 했다. 지난 2년 동안 숨가쁘게 달려온 내 평론의 행보는 아마도 이런 낭만과 탈환상, 매혹과 의혹, 희망과 절망, 암중모색과 동병상련의 단애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며 삐뚤빼뚤하게 그려졌을 터이다. 내 당나귀 귀는 영롱한 별들의 웃음소리에 쫑긋거렸고, 내 흐린 눈은 신기루 같은 몽유별빛을 뒤쫓았으며, 내 둔한 손은 별들을 듬뿍 담고 있는 자궁 언저리를 더듬었지만, 그 사이 내 몸은 하늘에 박힌 유리파편에 여기저기 긁히고 찔렸으며, 신음하는 돌(불)덩어리들과 정면충돌한 탓에 구석구석 시퍼렇게 멍꽃이 피었다. 지난 2년 동안 비평을 한답시고 시의 별밭을 애면글면* 우러르며 얻은 명예로운 상흔이자 아름다운 응혈인 셈이다. '별밭'은 기실'가시밭'이었다.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을 두 발로 설 수 있게 만든 건, 별을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더없이 고마운 일이다. 그의 호의가 없었다면 나의 비평은 '네발로 기는 정신'이 되기 십상이었을 터이고 시의 별자리에 얽힌 이런저런 사연을 캐물을 기회조차 갖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턱없는 욕심과 실없는 치기로 들릴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찾아헤맨 별자리는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그런 별자리가 아니었다. 잘 알다시피 별들은 크게 세 가지 계기에 의해서 천공의 스크린 위에 수놓아진다.
1) 한 작품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이 어우러져 별 하나가 어둠 속에서 빛을 분무(噴霧)
한다, 이 별의 내부구조를 분석하고 좌표를 가늠하는 것이 작품론이다.
2) 작가가 세상에 흩뿌려놓은 별들이 모여 특정한 모양의 별자리를 만든다. 우리는 이 별자리를 통해 한 작가의 정신세계를 판독한다. 소위 말하는 작가론이다.
3) 별들은 역사적, 사회적, 정치적, 문학적, 철학적, 맥락이라는 조금 큰 틀에서 묶일 수 있다. 이 거대한 별자리는 흔히 본격적인 문학사 연구의 표적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별자리 이외에도 저 은하의 만다라에는 수많은 작은 별자리들이 오롯이 빛나고 있다. 별과 별 사이에 떠 있는 섬, 망각의 어두운 창고, 그 후미진 구석에서 구조신호를 보내고 있는 미지의 성좌(星座), 나는 아무도 가보지 않은 그 섬에 가보고 싶었고, 비평의 구원을 기다리는 그 성좌를 찾고 싶었다. 별자리 대신 성좌라, 슬그머니 동화에서 철학으로 건너뛰려는 내 속내가 자연스레 드러난 셈이다.
우리 시대 최고의 별밤지기 아도르노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 전반을 관리되는 사회 혹은 총체적 지배관계로 파악하며 그에 대한 대응물로서 성좌, 말하자면 '짜임관계'란 개념을 내세운다. 이처럼 '관계의 망'을 존중하는 입장은 하나의 인위적인 정보에 따라 사물을 도식에 맞추는 자본주의의 폭력적인 통합체제를 부정하면서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한다. 그에 의하면 짜임관계는 '원인에 대한 낡은 물음'을 던져버리고 여러 요소들이 서로 자유롭게 스미고 얽히면서 짜이는 역동적인 전개과정에 다름아니다.
이론적 사상은 자신이 해명하고자 하는 개념의 주위를 맴돈다. 마치 잘 보관된 금고의 자물쇠처럼 그 개념이 열리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이때 그 열림은 하나의 개별적인 열쇠나 번호가 아니라 어떤 번호들의 배열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아도르노 <부정의 변증법>
그렇다. 시 역시 스스로 개념을 방사하지 못한다. 시는 자신이 해명하고자 하는 담론 주변을 어슬렁어슬렁 맴돌 뿐이다. 그리고 모름지기 시에 채워진 자물쇠는 하나의 개별적인 열쇠나 번호만으로 호락호락 자신의 보물상자를 열어 보여주지 않는다. 수많은 번호들의 다채로운 '배열과 조합', 말하자면 정적인 '규정'이 아니라 역동적인 '짜임'을 통해서만 비로소 시는 자신의 입을 열기 시작하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나는 특정한 시인의 감춰진 비밀금고를 열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멀리 떨어져 있어 좀처럼 서로 이야기를 나눌 것 같지 않은 시들을 조심스럽게 만지작거리면서 '움직이는 모자이크'를 만들어보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다시 말해 나는 자존심이 강해 좀처럼 마음을 터놓지 않는 한국시와 독일시를 내 비평의 실험실로 정중히 초대해 이들을 대상으로 벤야민이 말한 글쓰기의 '실험배열'을 조금은 짖궃게 한국적으로 실험해 본 셈이다.
별과 가장 어울리는 소리는 파도소리일 터이다. 별이 빛나는 밤, 연인과 바닷가를 거닐며 잔잔히 밀려오는 파도소리를 음미한다, 꽤나 그럴듯한 낭만적인 풍경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무언가 골똘히 궁리하기를 좋아하는 독일의 한 철학자는 파도소리를 들으면서도 심오한 인식론을 펼친다. 바닷가를 산책하는 그의 귀에 파도소리가 들려온다. 곧바로 그는 자신이 들은 소리를 파도소리로 인식한다. 너무나 '명석한' 인식이다. 그러나 이내 그의 자명하던 인식은 다음과 같은 물음에 덜미를 잡히고 만다. "그렇다면 당신이 들은 파도소리란 도대체 무엇이죠? 갑자기 막막해진다. 그는 자신이 들은 소리가 파도소리라는 사실 자체만 인식했지 그 소리의 실체가 무엇인지, 어떤 소리들로 구성되어 있는지는 구체적으로 따져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명석한'인식 뒤에 '혼란스러운' 이라는 형용사를 덧붙인다. 명석하고 혼란스러운 인식의 단계를 궁구하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이 들은 파도소리의 실체를 규명하기 위해 파도소리를 구성하는 모든 소리들을 하나하나 구별하여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들은 파도소리는 하릴없는 물고기가 하품하는 소리, 바닷물이 바위와 부딪히며 갈라지는 소리, 모래와 엇섞이며 내는 물거품소리, 신나게 바람을 타며 내지르는 휘파람소리, 수많은 나뭇잎들과 수다떠는 소리가 하나로 합쳐진 소리일거야. 아참, 그리고 어쩌면 이 파도소리에는 먼 옛날 뱃사람을 유혹하기 위해 불렀다는 바다의 요정 사이렌의 아름다운 노래와 태양을 향해 치솟다 수장된 '촛농날개'의 주인공 이카루스의 단말마가 뒤섞여 있을지도 몰라. 그래 내가 들은 이 파도소리는 이런 모든 소리들이 '각자의 음을 잃지 않으면서도' 하나로 어우러져 자아내는 자연의 위대한 교향곡임이 분명해." 이런 인식 이후 그는 심히 마뜩치 않았던 '혼돈스러운' 이라는 형용사를 떼어버리고 대신 '판명한'이란 새로운 형용사를 기분좋게 내건다. 명석하고 판명한 인식. 이제야 그는 자신의 산책을 '철학적'으로 성공리에 완수했다는 만족감에 발길을 총총히 집으로 돌린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나는 이 통찰력이 우뚝한 라이프니츠 할아버지처럼 수많은 별들이 한데 모여 노래하는 중층적인 목소리들을 낱낱이 구별해낼 만큼 청각이 예민하지도 지력이 높지도 못하다. 그저 나는 '명석하고 혼돈스러운 인식'과 '명석하고 판명한 인식'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이 서투른 인식론적 포즈에 나는 '미학적'이라는 조금은 거창한 형용사를 달아주고 싶다). 여러 시인들의 목소리가 포개지고 겹쳐지면서 자아내는 멜로디의 한 소절이라도 내 작은 비평의 '공명상자'를 통해 세상에 울려퍼지기를 희망했을 뿐이다. 선명한 하나의 목소리가 아니라 무수한 타자들의 목소리들이 자신의 음을 잃지 않으면서도 함께 어깨동무하여 빚어내는 '다성(Polyphonie)의 율동! 다성은 결코 여러 소리들이 한 음으로 스며들어 사라지는 소리의 액화(液化)가 아니다. 다성은 음가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동시에 타자의 목소리와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는 입체적인 의사소통의 과정이다. 음악철학자 무테지우스의 말대로 단성이 하나의 소리라면 "다성은 하나이면서 하나가 아닌 소리이다." 독립성과 통일성. 차이와 동일성 사이의 치열한 변증법적 긴장 속에 바로 "다성의 논리"가 깃들여 있다.
제1부의 글들은 우리 문학공간에 나타난 새로운 별자리들을 특정한 중심으로 추적해본 주제비평이다. 그 가운데 <0/1의 비평에서 0/2의 비평으로>는 이 책의 연장된 머리말로 봐도 무방한 글이고, <배를 밀어올리는 시지프스>는 요즈음 한국 시단에 대한 내 생각과 비판의 일단이 집중적으로 들어 있는 글이다. 제 2부에 실린 글들은 다성의 논리라는 이 책의 문제의식이 최근 문학현장에서 생산된 시들과 구체적으로 어디서 어떻게 만나 적용될 수 있는지를 점검해본 실제비평이다. 제 3부는 동세대 혹은 앞세대 시인들의 시세계와 그들의 시집을 탐색해본 작가론과 작품론으로 짜여 있다.
<중략>
함부르크는 내가 지금 공부하고 있는 브레멘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항구도시이다. '함부르크 보슬비' 라는 이름이 따로 있을 정도라니, 그곳에는 우산을 펴자니 좀 그렇고 그냥 맞자니 또 망설여지는 보슬비가 시도 때도 없이 자주 내리는 모양이다. 바로 그 도시에 시인 볼프 비어만이 살고 있다. 비어만은 보슬비를 소개로 이런 흥미로운 시를 썼다.
함부르크 보슬비는
귄터 그라스만큼이나 아주 유명하다
그라스는 언제나 독일사람들을 통통통 두드린다
그렇다고 그가 사람들을 완전히 촉촉하게 젖게 만드는 건 아니다
-볼프 비어만<독일. 겨울동화> 제 11장 부분
소나기와 달리 보슬비는 누군가를 끈질기게 '두드리지만' 완전히 적시지는 않는다는 데 그 매력이 있다. 비어만은 이런 보슬비의 모습에서 <양철북>의 작가 귄터 그라스를 읽어내는 시적 기지를 발휘한다. 앞으로 나의 글쓰기도 이런 보슬비를 닮았으면 좋겠다. 덩치만 컸지 두루뭉술 소리를 얼버무리는 허울좋은 '큰북'보다는 작지만 가슴 뜨끔한 일침을 토해놓는 암팡진 '양철북'. 자칫 긴장을 늦추면 언제 '공소한 메아리'로 흩어질지 모르는 '다성의 메아리', 그 무딘 끝을 이제는 벼르고 담금질할 때가 온 것 같다.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부실한 밑공부를 가능한 한 치열하게 채워가면서 동시에 내 자신을 여유있게 비워나가는 역설의 지혜가 절실할 터이다.
2002년 11월 독일의 브레멘에서
류신
* 묵새기다 - 별로 하는 일 없이 한곳에서 오래 묵으며 날을 보내다.
마음의 고충이나 흥분 따위 를 애써 참으며 넘겨 버리다.
* 애면글면 - 몹시 힘에 겨운 일을 이루려고 갖은 애를 쓰는 모양.
* 프로메테우스 - 그리스 종교에서 티탄족 출신의 최고 책략가이며 불의 신.그의 지적인 면은 '미리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이름에서 강조된다. 일반적으로 믿어지는 바에 따르면 그는 최고의 장인(匠人)이 되었다고.
* 단말마 - 불교에서 숨이 끊어질 때의 고통 또는 임종을 뜻한다.
'평론과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백겸 <문화의식의 다중세계(Polyverse)와 시들> (0) | 2010.08.29 |
---|---|
당신은 주인인가, 아니면 하녀인가? (0) | 2010.08.20 |
[김영종의 잡설] 진보는 퇴보의 다른 이름 (0) | 2010.07.23 |
[김영종의 잡설] 우파의 가면을 쓴 모리배 (0) | 2010.07.16 |
[김영종의 잡설] 없는 사람은 안다…"집은 '생명'이고 '우주'다" (0) | 2010.07.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