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는 퇴보의 다른 이름 ① "'은행 대출'의 본질은 '현대판 노예 제도'"
진보란 무엇일까? 한번 설명해보시라. 혹시, 묻지 않으면 알지만 설명하려면 알지 못하는 게 아닌지? 그게 사실이라면 왤까? 예컨대 자연과학, 즉 수소의 비중을 묻는 물음에는 공식만 알면 대답할 수 있다. 그러나 진보에 대해선 어떠한가? 뭐라고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없다.
여러 마디라면 어떨까? 그러니까 진보가 사용되고 있는 여러 용례들을 말하면? 그것은 정의(定義)의 형태를 띠지 않기 때문에 시험 답안에 정답 처리가 되지 않는다. 사회에서 통용되는 문답의 규칙에 맞지 않는다. 그래서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대신 상기하려고 애쓴다. 진보에 관해서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알고 있는 바를 상기해보는 것이다. 하지만 정확하게 그것이다, 라고 초점이 모이지는 않는다. 우물쭈물 지어내어 말하는 것이 아니라면, 당신은 진보를 알지 못하므로 설명할 수 없다. 여러 용례를 관통하는 '공통된 무엇'(본질)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상기는 이 존재하지 않는 것에 매달려 있다. '공통된 무엇'은 언제나 구체적인 쓰임과 결별함으로써 순수해지기는 하지만, 그 순간 존재하지 않는 환영이 되고 만다. 애당초 진보, 사랑, 행복 따위의 추상명사는, 그 추상명사가 쓰이는 예를 떠올려보지 않고는 그 자체만으로 상기할 도리가 없다. 그럼에도 순수하게 상기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건 환영에 붙잡혀 있는 것이지 상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상기는 실천이지만 믿는 것은 실천이 아니다. 예컨대 그 자장면은 맛있었다고 믿는 것은 그렇게 느껴서 상기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쓰임을 떠난 본질이라는 것은 지상에 존재하지 않으므로, 쓰임을 떠난 본질로서의 진보가 무엇인지는 말할 수 없다. 말을 한다면, 어떤 환영을 지껄이는 것, 즉 헛소리를 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우리가 "진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하려는 진보는 여러 용례에 공통된 무엇, 즉 본질로서의 진보다. 바지나 콩나물국과 같은 낮은 차원이 아닌 고차원의 의미가 부여된 진보! 도대체 그게 무엇이냔 말이다. 알지 못하는 그것—의미 생산자인 엘리트의 헛소리—때문에 인생을 망치고 있다면 그것에서 탈출해야 하지 않을까?
아우구스티누스(<고백>): "그러므로 시간이란 무엇인가? 아무도 나에게 묻지 않으면, 나는 안다 ; 그 물음을 설명하려 하면, 나는 알지 못한다."—우리는 자연과학의 물음(예컨대 위에서 말한 수소의 비중을 묻는 물음)에 대해서는 그렇게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아무도 우리에게 묻지 않으면 알지만 우리가 그것을 설명해야 할 때는 더 이상 알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상기해내야 하는 어떤 것이다. (<철학적 탐구>, 비트겐슈타인 지음, 이영철 옮김, 책세상 펴냄, 89항에서 인용)
그러면 어떻게 탈출할 것인가? 이것을 생각해보기에 앞서, 과연 그것(본질적인 진보의 의미) 때문에 인생을 망치고 있는지를 알아보자.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일상생활이다. 그리고 현재다. 이 점에 의문을 제기한다면, 그것은 당신이 미래를 위해 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당신이 엘리트라면 더욱 경쟁적으로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고 있다. 현대인은 죽었다 깨어나도 현재를 살 수 없다. 왜냐하면 자본주의가 그런 삶을 결코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실은 돈의 메커니즘을 보면 잘 드러난다. 종잇장에 불과한 돈이 어떻게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가? 마법은 신용(미래의 약속)에서 일어난다. 돈은 신용을 약속한 종이 쪼가리다.
신용은 어디에서 발생하는가? 경제학의 이론이야 어쨌든 소수 금융 권력이 사회적 합의를 앞세워 법률로 강제하는 데서 생긴다. 이것을 법화(法貨)라 하는데, 사전에는 '통화의 원활한 유통을 위하여 법률에 의해 강제로 통용시킨 화폐'라고 나온다. 그런데 왜 강제로 돌려야 하는 걸까? 그 까닭은 마법을 일으키기 위해서다. 여기서 잠시 파우스트의 마법을 살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재무장관 : 폐하께서 선선히 서명해주셨고, 이날 밤 즉시 마술사(파우스트)를 시켜 수천 장을 인쇄하였습니다. (…) 십, 삼십, 일백 크로네짜리 지폐가 마련된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백성들을 기쁘게 했는지 상상도 못하실 겁니다. (…) 다른 글자는 이제 무용지물이 되었고, 폐하께서 서명하신 글자 속에서만 행복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황제 : 백성들 사이에 그것이 금화 대신 통용되고 있단 말이냐? 군대와 궁중의 급료도 그것으로 다 치를 수 있단 말이지? 너무 놀라운 일이라 이해가 가지 않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구나. (<파우스트>, 괴테 지음, 정서웅 옮김, 민음사 펴냄)
이해가 가지 않은 이 일을 존 로(John Law·1671~1729)가 해치웠다. 연극 무대가 아닌 현실에서 말이다. 재정 파탄에 직면한 루이 15세의 프랑스를 구해낸 것은 놀랍게도 금이 아닌 인쇄기였는데, 존 로의 지폐 아이디어가 바로 그것이다. 그는 도박의 천재이자 현대 금융의 창시자다. 그의 아이디어가 실현되어 지폐가 화폐로서 인정받은 것은 국가의 약속과 국민들의 믿음 덕분이었다. 지폐 경제의 생명은 이 두 개—약속과 믿음—로 이루어진 신용이다. 존 로의 대도박(아이디어)이야말로 시간에 대한 인류의 관념을 획기적으로 바꾸어놓은 대사건이다.
신용은 거래한 재화의 대가를 앞으로 치를 수 있음을 보이는 능력이다. 즉, 미래에 약속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을 믿음으로써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게 지폐다. 바로 이 '미래에 약속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을 믿음', 이것이야말로 지폐를 쓰고 있는 당신의 삶을 규정하는 법칙이다. 따라서 (지폐를 사용하는) 현대를 살고 있는 당신에게 현재는 없다. 아직도 당신은 이해가 잘 가지 않을 것이다. 당신의 골수까지 이 사기, 이 거짓 약속, 그리고 이 강요된 믿음에 세뇌당해 있기 때문에.
여기서 <시대정신(Zeitgeist)>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 한 편을 소개한다. 이 다큐멘터리를 통해 우리는 세계 기축 통화인 달러의 생산과 유통에 관한 희대의 사기를 보고, 현대인이 어떻게 자발적으로 돈의 노예가 되었는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이 글의 이해를 돕기 위해 영화의 내용 가운데 일부를 소개한다.
1. 기존의 통화 체계는 종교처럼 가장 의심받지 않는 믿음의 대상이다. 돈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떤 정책을 따르고, 사회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 대부분 모른다. 세계의 1퍼센트가 40퍼센트의 부를 차지하고 있고, 날마다 3만 4000명의 아이들이 가난과 (치료할 수 있는) 병으로 죽어가고 있으며, 전 세게 인구의 50퍼센트가 하루 2달러 미만으로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알든 모르든, 우리의 살아 있는 피로 이루어진 모든 제도, 그리고 그러한 사회 자체가 돈이다. 우리의 삶이 이렇게 된 이유를 알려면 통화 제도를 이해해야 하지만, 경제학은 복잡한 금융 용어와 무서운 수학으로 도배돼 있어서 우리를 곧 포기하게 만든다. 그러나 금융 체계의 복잡성은 가면에 불과하다. 역사상 사람들을 가장 무력하게 만드는 제도라는 것을 감추기 위해서다.
2. 미국 중앙은행 연방준비제도가 '현대 통화 흐름(Modern Money Mechanics)'이라는 문서를 만들었는데, 이 문서는 전 세계 상업은행 망을 떠받치는 연방준비제도가 돈을 만드는 과정을 보여준다. 첫 장, 이 문서의 목적에는 지불준비제도 안에서 돈을 만드는 기본 과정이 나온다. 이를 알기 쉽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① 미국 정부가 돈을 찍어내기로 결정하면, 그 결정에 따라 연방준비제도에 연락해서 100억 달러를 요청한다.
② 연방준비제도가 승낙하는 과정을 거쳐 100억 달러의 재무부 채권을 사들인다.
(여기서 정부와 연방준비제도의 거래 관계를 다시 보자.
- 정부가 종이를 사서 거기에 공식적으로 보이는 그림을 그려 넣고 '재무부 채권'이라고 이름 붙인다. 그러면 100억 달러의 가치가 생긴다.
- 이 채권을 연방준비제도에 보낸다. 그 대가로 연방준비제도는 자신이 만든 인상적인 종이 다발을 건넨다. 이 상태의 종이를 연방준비권이라고 하며 재무부 채권과 마찬가지로 100억 달러의 가치가 있다. 연방준비제도는 연방준비권과 채권을 교환한다.
③ 교환이 끝나면 정부는 100억 달러의 연방준비권을 갖게 되고, 그 액수를 은행계좌에 입금한다. 그러면 공식적으로 법정통화가 되어 미국 통화는 100억 달러 늘어난다.
난데없이 100억 달러의 돈이 생긴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예로 든 이 교환은 종이를 전혀 쓰지 않고 전자적으로만 일어난다. 미국 화폐량의 3퍼센트만이 실제 화폐로 존재하고 나머지 97퍼센트는 컴퓨터에 있다.)
재무부 채권은 본래 채무증서다. 연방준비제도가 느닷없이 만들어낸 돈으로 이 채권을 구입하면 정부는 그 돈을 연방준비제도에 갚기로 약속하는 것이다. 갚기로 약속하는 것, 이것이 돈이다. 조금 더 알아보면, 돈이 빚(채무)에서 생겼다는 어처구니없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아무튼 교환이 끝나면 100억 달러가 시중은행 계좌에 들어간다. 여기부터 재미있어진다. 지불준비제도 때문에 그 100억 달러 예금이 순식간에 은행의 준비금이 되는 것이다. 모든 예금이 마찬가지다. '현대 통화 흐름'에서 말하는 지불준비율이란 은행이 규정된 예금비율에 맞게 법적인 준비율을 맞추는 것인데, 현재 규정에 따르면 10퍼센트, 즉 100억 달러의 예금이 있으면 그 10퍼센트인 10억을 준비금으로 보유하고 나머지 90억은 초과 준비금이 되어 대출 자금으로 쓸 수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하면 100억 달러 예금에서 또 느닷없이 90억 달러가 생기는 것이다. 그리하여 돈은 100억+90억=190억…. 이런 식으로 계속 늘어난다. '현대 통화 흐름'에 나온 내용처럼, 당연히 은행들은 예금으로 받은 돈에서 생긴 대출금을 갚지 않는다. 만약 갚아버리면 추가적인 돈이 생기지 않는다. (후술하겠지만, 갚아버리면 현대의 금융은 그 즉시 동결돼 버린다. 한 마디로 망해버리는 것이다.)
대출할 때 은행은 약속어음(대출증서)을 받는다. 그 대가로 차용자에게 신용(돈)을 준다. 단지 지불준비율을 맞추는 100억 달러가 있고, 그런 대출 요구가 있기 때문에 난데없이 90억 달러가 생기는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은행에 가서 새로 생긴 90억 달러를 빌린다. 그들은 돈을 받아 자신의 계좌에 예금한다. 이 과정이 반복된다.
그 예금이 또다시 지불준비금이 된다. 10퍼센트를 떼어 내고 90억 달러의 90퍼센트(81억 달러)가 새로 대출할 수 있는 돈으로 생긴다. 물론 81억 달러는 대출되었다가 예금되어 72억, 65억, 59억…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예금으로 대출을 만드는 과정이 이론상 무한정 반복된다. 원래 100억 달러에서 생길 수 있는 돈은 최대 900억 달러가 된다. 즉 은행에서 발생하는 모든 예금에 대해 불쑥 9배의 돈이 생긴다. 돈이 급한 사람은 당장 돈을 빌리기 위해 미국 은행을 찾아가 편리한 개인 대출 형태로 '돈'을 받는다. 이제 우리는 지급준비제도로 돈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알았다.
이처럼 세계 대부분의 은행에서 시행하고 있는 지불준비금제도는 사실 현대판 노예 제도다. 생각해보라. 돈은 빚에서 나온다. 빚을 지면 사람들은 어떻게 하는가? 빚을 갚기 위해 고용된다. 돈이 빚에서 생기는데 사회가 어떻게 빚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불가능하다. 그것이 요점이다.
여기서 다시 한 번 강조하자. 현대 금융 체제에서 돈은 빚이고 빚은 돈이다. 이 돈은 대출을 통해서만 생긴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래서 정부를 포함하여 모든 사람이 모든 빚을 갚을 수 있으면 단 1달러도 돌지 않게 된다. "우리 통화 체제에서 빚이 없으면 한 푼의 돈도 없다"고, 연방준비제도 총재 머리너 에키스는 말했다(1941년 9월 30일).
빚의 자가 재생산 시스템(현대 통화 체계)—이 완벽한 시스템의 최종 생산물은 노예다. 모든 사람들이 재산을 지키고 잃지 않으려는 두려움 속에서 자발적으로 노예가 된다. 그래서 임금 노예가 줄을 서게 만든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인류 전체가 쳇바퀴를 돈다. 이들은 피라미드 정상에 있는 엘리트에게만 이득이 되는 제국을 강화하기 위해 생존하고 있다.
진보는 퇴보의 다른 이름 ② 노예로 살고자 경쟁하는 이상한 세상…당신은?
이런 놀이를 영속하려면 빚이 사라져서는 안 된다. 또한 그러기 위해서는 갚기로 한 약속이 무한히 유예될 수 있어야 한다. 앞서 말한 존 로는 천부적인 수학 계산능력을 발휘해 '약속의 무한 유예'를 가능케 하는 지폐 경제 체계를 구상, 이 아이디어를 프랑스에서 실현했다.
현대 금융은 바로 이 존 로의 구상에 기초한다. 그는 경제의 시간을 현재에서 미래로 옮겨놓았다. "지금 당장 금은보화가 없더라도 국가는 미래의 수익을 근거로 화폐를 발행하여 국고를 채울 수 있다"는 존 로의 주장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시간 개념의 변경이 전제되어야 했다. 신용은 미래의 시간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신용의 본질은 현재의 위기를 미래의 어느 시점으로 연기하는 데 있다. 신용 체계 아래서 자본의 자기 운동은 저축을 위한 욕망 때문이 아니라 지불 결제를 기약 없이 연기하려는 절망적인 요구 때문에 발생하게 된다. 그 결과, 지불 결제를 계속해서 무기한 연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차이(잉여가치)를 보장하기 위해서 자본의 운동은 끊임없이 차이 짓기를 필요로 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기술 혁신이 진보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진보 이데올로기 그 자체가 자본 운동의 한 결과로서 발생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신용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자본의 운동은 더 이상 단순히 이윤 창출을 위해 없어서는 안 될 것이 아니고, 지불 결제를 위해 하지 않으면 안 될 그런 것이다. 끊임없는 차이 짓기의 과정 속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자본주의의 시간성은 결코 무한한 미래를 향한 진보가 아니며, 기약 없는 미래로 지불 결제를 끊임없이 연기하는 것이다." (<은유로서의 건축>, 가라타니 고진 지음, 김재희 옮김, 한나래 펴냄)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간이란 이런 것이다. 현대인은 정말 필사적이라 할 만큼 노력하고 있다. 유년기, 소년기, 청소년기, 청년기를 영어와 입시와 취직 시험에 완전히 소진하고 있다. 이 꽃다운 시기의 생명이 피워내는 아름다움의 결정체를 무엇을 위해 그토록 학대하는가? 엘리트가 되기 위해서,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 남한테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서, 제 밥벌이는 하기 위해서···.
그래 가지고 사회에 나오면 목적은 이루어지는가? 또다시 경쟁이고, 줄 세워진 서열에서 탈락하지 않기 위한, 그리고 하나라도 위로 올라가기 위한, 현재 삶의 희생이다. 아니, 학살이다. 당신은 임종을 맞아 당신의 삶이 학살당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까?
그러지 못할 것이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학살하는 의지를 '인간이 취할 가장 훌륭한 태도'라고 교육받아왔으니까. 그래서 당신은 기꺼이 노예가 되었으며 임종 때 더 노예이지 못한 자신의 인생을 후회하며 죽어가는 것이다. 역사상 어느 노예가 이런 적이 있었던가!
노예이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노예. 이것이 현대인의 자화상인데, 주님 앞에 노예이기를 간청하는 것과 같은 종교적인 트랜스 상태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이 종교의 이름은 '역사의 진보'라는 종교다. 자본의 운동이 만들어낸 진보 이데올로기는 시간의 진행 방향 자체를 바꾸어버렸으며 동시에 현재를 거세해버렸다. (시간의 방향에 관한 이야기는 뒤에 다시 하겠다.) 전 세계가, 전 사회가, 역사의 진보를 향해 엔진을 돌리고 있기 때문에 인류는 역사에 갇히고 기약 없는 미래에 농락당하고 있다.
이때의 역사는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고, 나아가서 신의 능력을 가지려는 이른바 문명의 역사다. 이 불가능한 일(역사 속의 유토피아)은 '빚의 자가 재생산 시스템'과 궤를 같이한다. 전자(역사 속의 유토피아)는 최대다수 최대행복이라는 공리주의적(=행복주의적) 성격을 띠며, 심지어 공산주의가 붕괴된 원인도 이러한 행복주의를 거슬렀기 때문이다. 월러스틴은 공산권의 붕괴 원인이 사회에 작동되고 있는 '가치법칙'과는 다른 논리로 국가를 운영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유토피스틱스>, 이매뉴얼 월러스틴 지음, 백영경 옮김, 창비 펴냄)
행복주의는 자본주의 경제의 원리인 가치법칙에 아주 잘 호응하는 철학이다. 자본주의에서 최고 가치로 내세우는 자유는 행복주의에서 말하는 자유로, 타인에게 피해만 주지 않는다면 무엇을 해도 되는 자유를 뜻한다. 그러나 "자유는 행복을 배제하는 데에 존재한다"(칸트). 행복주의의 행복은 이익이다. 자유는 나의 이익을 참고 함께 사는 사회(타자)에 기반을 두지 않으면 안 되는 가치다.
개인의 이익을 위한 자유를 자유라 한다면 우리는 모두 호모에코노미쿠스(=경제적 동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존재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다. 우리가 믿고 있는 '역사의 진보'는 인간이 미래를 위해 살도록 하면서 행복을 미끼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불러일으켜, 마침내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이데올로기다.
이와 같이 우리의 생활이 돈 위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돈의 정체를 밝히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아는 지름길이다. 이 돈 위의 삶은 다른 말로 하면 어떤 무엇인데, 이제 그 무엇-진보-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다시 한 번 '진보란 무엇인가?' 사례나 종류가 아닌 그것들에 공통된 것으로서의 진보를 말할 수 있을까?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하기를, 개별의 꽃에 대해서는 몰라도 꽃들에 공통된 것으로서의 꽃에 대해서는 알 수 있다고 했다. 그의 스승인 플라톤은 <메논>에서 상기로써 가능하다고 설파했다. <메논>은 "덕이란 가르쳐질 수 있는가?"라는 주제를 놓고 소크라테스와 메논이 대화한 내용을 뒷날 플라톤이 기록한 책이다.
소크라테스는 덕은 지식이 아니기 때문에 가르쳐질 수 없고 오직 상기해야 한다고 설득한다. 이때 상기는 전생(前生)에서 배운 것을 상기하는 것이다. 여러분은 놀랍지 않은가. 갑자기 웬 전생? 잘 알려진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은 합리적인 방법과 공정한 규칙에 의해 규제되는 기술'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영혼불멸과 윤회 사상'의 근거인 '전생'을 이 기술, 곧 문답법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이른바 증명의 기술이 증명 불가능한 것(=형이상학)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도 마찬가지로 진보를 형이상학(=증명 불가능한 것)에 의존하지 않고는 그 본질을 설명할 수 없는 것 아닌가? 할 수 있으면 해보시라. 증명 불가능한 것에 의존하지 않고 증명하기 위해 서양 철학은 2500년 동안이나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괜히 헛수고하지 말고 국어사전에 나온 대로 진보를 말해보자. ①정도나 수준이 나아지거나 높아짐. ②역사 발전의 합법칙성에 따라 사회의 변화나 발전을 추구함. 이게 진보라고? 이것은 진보의 겉, 즉 형식만을 설명하는 것이다. 내용이 빠져 있으니 엿장수 마음대로고,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다. 좌파 또는 우파의 간판을 내걸고 사회 발전을 위한답시고 싸우지만 당연히 결론은 아전인수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덕은 가르쳐질 수 있는가?'를 알려면 반드시 먼저 '덕이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고 했는데, 산파술(maieutikē)이니 비판적 검토(elenchos)니 대화법(dialektikē)이니 온갖 장기를 다 부려서 알아낸 결과가 무엇인가? '덕은 앎이다'라는 것이다. 얼마나 옹색한가? 덕은 덕이고 앎은 앎인 거지, 어떻게 생각했기에 이런 결론을 냈을까?
그 과정을 한번 들여다보자. ①덕은 뛰어난 것이다. ②뛰어난 것은 유익한 것이다. ③그러므로 덕은 유익한 것이다. ④그런데 유익한 것은 앎이다. ⑤그러므로 덕은 앎이다. 여기에 대해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다. 다만, 앎으로 귀결됨으로써 덕의 내용이 사라져버렸다는 사실은 짚고 넘어가야 한다. 애당초 덕의 내용은 사례와 종류임에도 소크라테스가 그것을 거부하고 공통된 본질을 원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저 유명한 방법론—대화법, 산파술, 비판적 검토—을 세상에 확고부동하게 정초하기 위해 자신의 소중한 목숨까지 버리면서.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아무래도 찜찜했던지 다시 질문을 던진다. "앎이라면 당연히 가르칠 수 있어야 하는데, 도대체 누가 덕을 가르쳤거나 가르치고 있는가?" 아무도 가르친 적이 없었고 또 없기 때문에 다시금 덕은 가르칠 수 없는 것이고, 오직 참된 확신을 통해서만 덕을 가질 수 있다고 결론 내린다.
그러면 이 확신은 어디에서 오는가? 신적인 섭리에 의해서 생긴다는 것이다. 이것이 메논이 던진 최초의 질문('덕은 가르칠 수 있는가?')에 대한 최후의 답인데, 소크라테스는 대화를 처음 시작할 때 "덕은 지식이 아니기 때문에 가르칠 수 없고 오직 상기해야 한다"고 메논을 설득했었다. 우리가 소크라테스의 최초의 답과 최후의 답을 가장 적절히 정리해 이해하면 아래와 같다.
덕을 가지려면 전생에서 배운(또는 얻은) 내용을 상기해야 하는데, 이 내용은 지식이 아닌 믿음(확신)으로 되어 있으며 이 믿음을 얻는 경위는 신적인 섭리에 따라서이다.
여기서 분명해진다. 내용을 알려면 확신과 신적인 섭리를 통해야 하고, 내용을 잘 알려면 대화법(논리적 형식)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대화의 전제조건으로 '먼저 덕이 무엇인지를 규정'하자고 제안하고 그렇게 하기로 동의를 받아낸 뒤 계속 비판적으로 검토해나가는데, 그 결과 덕이 수식어('잘' '확연히' 따위)로 전락해버리고 만다. "메논에게 덕은 내용의 문제이고, 소크라테스에게 그것은 방식의 문제다. 덕은 무엇을 행하는가에 따라 결정된다고 생각하는 메논에게 있어 모든 것에 공통되는, 한 가지 의미의 덕은 없다. 다양한 종류의 덕들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에게 있어 덕은 부사적('잘' well)으로 기능한다. 그것은 다른 여러 활동을 한 가지 의미로 수식한다. 소크라테스는 메논이 그 한 가지 의미를 찾도록 돕는다." (박재주, '플라톤의 <메논>에 나타난 도덕교육론', <서양의 도덕교육 사상>, 청계(휴먼필드) 펴냄)
부사적으로 기능하는 것은 다름 아닌 덕의 수행 방식에 대한 강조다. 이처럼 소크라테스의 대화 목적은 본질을 탐구하는 것인데도 그 귀결점은 내용의 수식('잘' well)이 되었다. 이것은 소크라테스 방식의 아이러니다. "소크라테스는 증명을 하나의 대화로 도입하면서 동시에 대화 그 자체의 본래 목적을 제거해버림으로써 그 이전의 체계를 견고하게 만들었다"고 가라타니 고진은 말한다. 뒤에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체계를 견고하게 만드는 것이―소크라테스 방식이며―바로 '잘'이다. '덕' 대신 '진보'를 대입시켜도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은 똑같다.
본질로서가 아닌 쓰임에서 보면 진보는 '역사의 진보' 아래에서만 생명을 부지한다. 역사의 진보는 '역사는 자연을 정복하면서 시작되었다'라는 근대적 역사관 그리고 문명관에 입각해 있다. 역사 속에서 이룩한 진보는 자연을 정복한 대가, 즉 문명화를 뜻한다. 진보의 이념 아래 인간은 자연을 분리해낼 뿐 아니라 자연을 지배의 대상으로 삼는데, 이를 실현시키는 힘은 '이성'에 있다.
진보가 추구하는 이상은 이성의 힘으로 사회와 자연을 재-디자인하는 것이다. 진보는 애초에 유대-기독교의 엘리트들이 창안한 개념이다. 이들만이 유일하게 여느 종교와 달리 '직선의 시간관'을 사용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이야기할 것이다).
근대적 진보의 역사적인 출발은 유대-기독교적 시간관이 르네상스기에 그리스ㆍ로마의 고전문화를 만나 물질세계까지 장악하기 위해, 즉 이성의 힘으로 사회와 자연을 재-디자인하기 위해 거듭 태어난 '직선의 시간관'에 있다. 다시 태어난 진보는 '천국' 대신 이성에 의해 운영되는 이상적인 사회로서 '유토피아'를 제시했다.
진보는 퇴보의 다른 이름 ③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받아든 진짜 이유는?
근대적 진보의 역사적인 출발은 유대-기독교적 시간관이 르네상스기에 그리스·로마의 고전문화를 만나 물질세계까지 장악하기 위해, 즉 이성의 힘으로 사회와 자연을 재-디자인하기 위해 거듭 태어난 '직선의 시간관'에 있다. 다시 태어난 진보는 '천국' 대신 이성에 의해 운영되는 이상적인 사회로서 '유토피아'를 제시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를 들 수 있는데, 그것은 플라톤의 이상국가를 계승한 것이다. 다른 글에서 따로 다루겠지만, 유토피아는 근대가 역사 속에서 이루려는 진보의 추동력이요 도달하려는 신이었다. 유토피아의 건설은 자유주의, 민주주의, 파시즘, 공산주의, 사회주의, 군사독재 등 현대의 모든 정치 체제에 '보이지 않는 손'으로 작용한다.
체제와 정파에 따라 이념도 다르고 구호도 다르겠지만, 모두 유토피아의 건설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지 않으면 현대의 어떤 사회도 돌아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양한 정치 체제를 창조하고 돌보는 세계 자본주의는 유토피아를 천국으로 하는 종교라 할 수 있다. 이 종교의 이름은 앞서 말한 '역사의 진보'이며, 여기에서는 유토피아(천국/성부)와 이성(성령)과 세계 자본주의(성자)가 삼위일체를 이룬다.
우리의 주제인 '진보'가 영혼도 입도 다 마비시켜 잡아먹어버리는 '전자가오리' 같은 이념이라는 점을 폭로하지 않고선 현대인이 노예 상태에서 풀려날 길이 없다. '전자가오리'는 메논이 소크라테스에게 붙여준 별명인데, 소크라테스가 대화를 할 때 상대를 호리고 현혹하여 난관에 빠뜨리는 주술사 같다고 해서 그렇게 불렀다. 그러면 진보가 '전자가오리' 이념임을 보여주기 위해 '진보 이념=소크라테스 방식'이라는 사실을 '직선의 시간관'이 거듭난 것과 관련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해보자.
사실 진보 이념은 재생한 '소크라테스의 상기론'에 입각해 있다. 여기서 '재생'은 르네상스를 통해 거듭 태어난 것을 뜻하는데, 재생-상기론은 이 '거듭난' 상기론을 말하고 원(原)-상기론은 원래의 소크라테스 상기론이다. 재생-상기론은 신비주의의 형이상학을 걷어치워버렸다. 원-상기론에서 보면, 상기가 일어나는 곳인 '영혼'은 전생에서 왔다. 전생은 원형(圓形)으로 된 시간관의 소산이다. 소크라테스가 메논에게 엘레우시스 신비 의식에 참여하여 입문하기를 권유했고, 플라톤이 신비 의식에 입문했다는 사실로도 원-상기론에서 신비주의 형이상학은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사형당한 이유는, 나라가 믿는 신을 믿지 않고 다른 새로운 다이모니온(영적인 것)을 믿은 죄 때문이다. '다이모니온'은 다분히 고대 오리엔트의 냄새를 풍긴다. 소크라테스가 권한 엘레우시스 신비 의식이 '나라의 종교'라는 점에서 모순이 일어나지만 이때(<메논>)까지만 해도 소크라테스가 '나라의 종교'와 공존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나는 다이모니온을 '신의 소리에 응하는'의 뜻이라고 파악한다. 플라톤의 <에우티프론,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파이돈>(박종현 옮김, 서광사 펴냄) 35쪽 역주 참고. 이렇게 보면 '응하는 자'가 중시되며, 신의 소리를 듣는 '응하는 자의 내면'이 인간의 중심 기관이 된다. 이 내면이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혼이다. 혼은 몸과 분리된 존재로, 소크라테스에게 대화는 혼이 혼에게 하는 것이다. 대화에 실려 나가는 말(언어)이 로고스다. 로고스는 혼이 혼에게 하는 말이지 혼이 몸에게 하는 말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말(=로고스)은 이성(의 산물)이다.
소크라테스/플라톤은 오랫동안 외부의 신과 소통하던 주술적인 성격의 '말'을 내면의 혼이 소통하는 이성적(변증적)인 성격으로 바꾸어버렸다. 이런 변화에는 이란(조로아스터교)이나 이집트의 영향이 큰 것으로 보인다. 또 나는 다이모니온이 영지(그노시스)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고 페르시아에서 온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이 큰 것으로 생각한다. 다음의 인용을 참고하라.
"플라톤은 소크라테스가 죽은 직후 페르시아로 가서 조로아스터교를 직접 연구하려고 했으나 기원전 386년에 발발한 스파르타와 페르시아 간의 전쟁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세계 종교사>, 존 노스 지음, 윤이흠 옮김, 현음사, 177~178쪽) 그러나 가라타니 고진은 다이모니온이 이집트에서 온 것으로 보는 듯하다. "플라톤은 분명히 그리스 사상가들 가운데 소수파에 속했다. (…) 그의 신념은 일반적인 그리스 사유의 문맥을 완전히 벗어나서 갑자기 나타났음에 틀림없다. 그것은 그리스의 바깥, 즉 이집트로부터 온 것이 분명하다. 이집트는 영혼의 불멸, 일신교, 계획적으로 통제된 국가라는 개념들이 비롯된 곳이다. 철학자/왕이라는 플라톤적 개념 자체는 이집트로 거슬러 가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은유로서의 건축>, 68쪽.))
니체는 <그리스 비극 시대의 철학>(이진우 옮김, 문예출판사 펴냄)에서 "플라톤으로 전혀 새로운 것이 시작된다. (…) 그들(플라톤 이후의 철학자들)은 이단 종교의 창립자들이며, 이들이 창립한 이단 종교들은 모두 헬레니즘 문화와 전래된 양식의 통일성에 대항하는 반대 기관들이었다"고 비난한다. 여기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로 봐도 무방하다. 그의 저작이 대부분 소크라테스를 주인공으로 하기 때문이다. 특히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에게서 독립해 자신의 사상을 펼치기 시작한 것은 <메논> 이후다.
소크라테스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다이모니온'은 그리스의 전통적인 '다신교의 신'이 아니라 외국에서 들어온 '일신교의 신'과 관련돼 있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소크라테스가 '로고스'를 '다이모니온'과 관련해 인간 '이성'이라는 의미로 처음 사용했다.
'상기'는 로고스(이성)를 사용하여 전생에 알았던 것을 떠올리는 것이다. 이성(로고스) 속에서 일어나는 작용 역시 로고스(말)다. 나아가 말(대화)을 통해 확실한 지식을 얻는 것도 로고스다. 상황이 이러하므로, 원-상기론이 재생-상기론으로 거듭 태어나기 위해서는 '전생(前生)'의 시간관인 '원형(圓形)의 시간'을 폐기하고 '직선의 시간'만 확립하면 되었다. 재생-상기론의 핵심도 로고스, 즉 이성(그러나 전생과는 무관한)이기 때문이다.
이를 달성하는 것은 두 가지 점 때문에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나는 로고스가 이미 기독교(스콜라 철학)에서 하느님의 말씀으로, 또 하느님의 아들(성자)로 채용되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그 때문에 사형당했을 만큼 소크라테스가 진리를 추구하는 방식 속에 이미 직선적 시간관의 씨앗이 자라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의 '상기론'이 전생에 심어진 씨앗을 자라게 하는, 즉 배양하는 과정을 앎 자체로 여기므로-따라서 소크라테스에게 앎은 내용이 아닌 과정이요 방식이다-최고의 가치인 덕(훌륭함)을 미래에 획득할 것으로 설계해놓은 것이었다. 덕을 탐구하기 위해 현재를 희생함으로써 더 나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
소크라테스의 철학을 대표하는 "덕은 앎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그런 각도에서 다시 음미해보면, 상기론이 재생의 조건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덕은 원어로 aretē(아레테)라고 하는데, 모든 사물의 각 종류에 따른 훌륭하거나 좋은 상태를 말한다. 예를 들면 좋은 눈, 좋은 구두, 훌륭한 농부, 훌륭한 정치가 따위다.
"소크라테스가 든 예를 따라 이해해보도록 하자. 예컨대 훌륭한 제화공은 어떤 사람일까? 그의 훌륭함을 우리는 도대체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제화공의 '훌륭한 상태'는 구두에 대한 앎, 그리고 구두를 제대로 만들 줄 아는 것과 관련되어 있으니, 그의 '나쁜 상태'는 이와 반대되는 경우의 것이다. 구두를 제대로 만들 줄 안다는 것은 구두의 기능이 무엇인지를 알 때 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제화공의 '훌륭한 상태'(aretē), 즉 제화공으로서 훌륭함은 구두의 기능에 대한 앎과 그것을 제대로 만들 줄 아는 앎, 즉 기술이 있어야만 되는 일이요, 그 반대의 경우, 즉 그의 '나쁜 상태'는 구두의 기능에 대한 '무지'와 그걸 제대로 만들 줄 모르는 무지에서 비롯되는 당연한 귀결이다." (<에우티프론,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파이돈>, 21쪽.)
이처럼 오늘날의 '지식'과 별반 차이가 없는 소크라테스의 '앎'은 끝없는 기능의 개선을 목표로 하는 미래 지향적 과정을 내포하고 있다. 최고의 훌륭함인 덕의 경우에는 획득을 위해 죽을 때까지 아니, 죽은 이후에도 노력해야 한다(전생의 것을 이어받아야 하므로). 이는 로고스=이성=말(논리)을 통해 달성된다. 소크라테스의 로고스는 방식이기 때문에 이미 '직선의 시간'은 잉태되어 있다. 이렇게 해서 재생-상기론은 힘차게 거듭나는 것이다.
(니체는 이 점과 관련하여 소크라테스의 로고스를 헤라클레이토스의 로고스와 비교해 격렬하게 비판한다. <그리스 비극 시대의 철학>, <비극의 탄생> 등 참조. 헬라클레이토스의 로고스는 직선의 시간에 대립되는 원형의 시간, 즉 영원회귀의 시간을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이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대우주년의 일 년은 1만800 태양년을 주기로 모든 사물이 영원히 회귀한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로고스는 신적이지 소크라테스와 같은 인격적인 정신이 아니며, 내재적인 생성의 법칙(대립 투쟁의 변증법)을 특징으로 한다. <서양철학사>, 요한네스 힐쉬베르거 지음, 강성위 옮김, 이문출판사 펴냄)
재생-상기론의 진보 이념에 입각한 교양과 지식이 상인·장인 등의 신흥 부르주아지가 봉건 귀족에 대항해 새로운 시대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수단이었듯이 원-상기론의 변증법도 소크라테스의 출현과 함께 평민이 귀족에 대항해 상부로 올라서는 수단이었다. 초기에 이들 사회 계급은 모두 이윤에 밝은 거상들이 주도했다.
진보는 퇴보의 다른 이름 ④ 대한민국 '보수'의 진짜 이름은? '매국노' 집단!
이제 우리는 진보가 '방식'의 형태를 취하는 문제에 집중할 차례다. 진보의 운동은 필연적으로 방식을 통해 관철된다는 것을 가장 잘 보여준 사람은 헤겔이다. 진보가 방식이라고 말한다면, 소크라테스가 덕은 앎이라고 한 만큼이나 옹색하다. 그러나 "덕은 앎이다"라는 정의도 내용이 아닌 방식이라는 사실이 벌써 드러나지 않았는가!
진보가 방식이라는 난센스는 우리 삶의 방식으로 벌써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특히 엘리트가 되려면 방식에 탁월함을 보여야한다. 법률가, 회계사, 기자, 건축가, 공학자, 디자이너 그리고 예술가까지도 방식을 다루는 전문가다. ('잡설' 연재를 시작하는 첫 처음 글에서 "앞에서 말한 작가도 일상을 생활 동화라는 '방식[형식]'으로 꾸며내자고 이야기하고 다닌다지 않는가. 이 같은 '방식'의 속임수에 대해서는 다른 장에서 상술할 것이다"라고 말한 '방식'이다.)
우리가 교육을 통해서 배우는 것은 방식이다. 심지어 인성 교육까지도 방식이다. 그 대표자가 '덕은 앎'이라고 가르친 소크라테스니까. 방식은 체계 속에 들어 있다. 앞서 "소크라테스는 증명을 하나의 대화로 도입하면서 동시에 대화 그 자체의 본래 목적을 제거해버림으로써 그 이전의 체계를 견고하게 만들었다"고 한 가라타니 고진의 말을 기억하기 바란다. 여기에 '방식'과 '체계'의 관계가 고스란히 들어 있다. '방식'을 통해 본래의 목적을 제거해버림으로써 이전의 '체계'를 견고하게 만드는 것—이것이 '진보'의 정체다.
방식은 체계를 견고하게 하고 체계는 방식을 발전시킨다. 방식의 발전이 진보이므로, 진보는 체계를 더욱 공고히 한다. 따라서 방식에 길들어져 있는 한, 체계를 빠져나갈 길이 없다. 우리의 논의에서 '안'이라는 것은 빠져나갈 수 없는 이 체계의 '안'을 말한다.
20세기 구조주의와 모더니즘도 소크라테스-플라톤과 마찬가지로 방식의 발전을 거쳐 체계를 공고히 하였다. 화이트헤드의 말처럼 서양 철학 2000년이 모두 플라톤 철학의 주석에 불과하다면, 서양 철학은, 플라톤이 철학자를 건축가에 비유했듯 '건축=체계(형식)=안=유심론'의 철학이다. 이 철학의 임무는 자아와 이성을 위해 체계(형식)를 건축하는 일이다.
이런 건축은 형식화 또는 형식주의를 향한 욕망이다. 형식주의는 형식이라는 말과는 다르게 본질을 추구한다. 마치 소크라테스가 본질을 추구한 결과 그것(본질)을 방식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듯이 똑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본주의는 하나의 건축물이자 방식이다. 돈은 이 건축물이 토대로 하는 본질의 표상이다. 그것은 종이에 잉크를 발랐을 뿐이지만 정확히 본질의 대행자이다. 따라서 돈은 물질의 대표 브랜드처럼 보이지만 기실은 형이상학(환영이자 속임수인 본질)을 베일 속에 숨기고 있다. 나는 이 베일을 벗기고 속임수를 폭로하기 위해서 '잡설'을 쓰고 있다.
형식주의의 궁극은 '무오류의 체계'를 창조하는 것이다. 때문에 '바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우리는 돈의 바깥에서 살 수 있는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약점은 있다. 신용의 붕괴는 자본주의의 붕괴를 가져온다. 스태그플레이션과 공황 등이 신용의 붕괴로 갈 수 있는 지름길이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자본주의를 붕괴시킬 수 없다. 오직 신용의 붕괴를 통해서만 가능한데, 그것은 체계에 난 균열이 무너져 바깥의 바닷물이 해일처럼 밀려와 휩쓸어버릴 때다. 돈의 바깥은 신용의 바깥, 즉 '돈의 가치를 아무도 믿지 않는 것'이다. 휴지 조각으로 자본주의를 움직일 수는 없지 않은가!
진보를 믿고 따르는 삶은 '바깥'이 없는 까닭에 폐쇄회로에 갇힌 삶이다. 이 폐쇄회로가 다름 아닌 '무한대의 직선으로 뻗은 자본주의의 시간'이다. 얼마나 해괴한 이율배반인가. 이러니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기 바쁜 사람들이 이 전도(顚倒), 이 도착(倒着)을 알 도리가 없다. 자본주의는 모든 정당한 가치를 전도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앞서 본 것처럼 '본질'이 '잘'이 되고, '형식'이 '안'이 되고, '폐쇄회로'가 '무한한 직선의 시간'이 되는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자본주의 시간성은 무기한으로 연기된다는 점에서 유대-기독교의 시간성과 유사하다. (…) 우리를 움직이는 것은 관념도 아니고 현실적 필요나 욕망도 아니다. 우리를 움직이는 것은 오히려 형이상학과 신학이다. 이 형이상학과 신학은 상품 그 자체의 형태 속에 새겨져 있으며, 이것은 또한 우리의 의사소통과 교환 속에 내재한, 근거 없음(예를 들면, 돈은 어떤 근거에서 돈이냐?)과 (근거 없음에서 오는) 위기 속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은유로서의 건축>, 263~264쪽. 괄호는 필자)
앞서 나는 "원-상기론이 재생-상기론으로 거듭 태어나기 위해서는 '전생(前生)'의 시간관인 '원형(圓形)의 시간'을 폐기하고 '직선의 시간'만 확립하면 되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만큼 '직선의 시간'은 근대의 진보 이념이 성립하는 전제조건이다. 자본주의 역시 '직선의 시간' 위에서 운동하지 않고서는 존립이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주의'와 '진보 이념'은 미래를 위한 '직선의 시간'을 모태로 해서 태어난 쌍생아인 것이다.
유대-기독교에 내재한 직선의 시간관은 모세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느님은 모세에 의해 처음으로 '야훼'란 이름을 갖는다. 그 전에 이름을 갖지 않았던 하느님이 이름을 갖게 되었다는 것은 하느님의 의미가 분명해졌음을 뜻한다.
의미(환영)를 통해 본질이 규정된 것이다. 그 본질의 규정이 바로 모세가 시나이 산의 불꽃 속에서 받은 열 가지 계율, 즉 십계다. 십계를 실행하여 하느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세워라! 야훼는 유대 백성한테 역사 속에 유토피아를 세우라고 명령한 것이다. 신의 백성은 야훼의 역사(役事)를 역사(歷史) 속에서 이루어야 하며 대망은 현재가 아닌 미래의 사건이다. 물론 최후의 대망은 종말론이다. 이것이 유대-기독교 엘리트들이 모세한테서 물려받은 직선의 시간관이다.
(모세의 메시아 신학은 그가 이집트에 있을 때 태양신학의 영향을 받아 성립됐을 것으로 보인다. "아켄아톤의 종교 개혁(기원전1375~1350년)으로 유일신이 된 태양신 아톤은 '얼굴을 가린 신' '다른 세계에 숨어 있는 신'이었던 태양신 '라'와는 달리 세상에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엘리아데, <세계종교사상사1>, 이용주 옮김, 이학사 펴냄, 172쪽 참고).
이는 야훼가 모세의 종교 개혁으로 세상에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것과 매우 비슷하다. 태양신의 아들 파라오는 마트의 화신인데, 마트가 '진리, 질서, 도리, 정의 이것들은 태양신의 존립 기초다'를 뜻하는 것으로 보아, 모세가 백성들에게 마트(십계명)를 주어 스스로를 파라오로 위치 지었을 가능성이 있다.)
야훼는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라고 말한다. 이것은 바깥(타자)이 전혀 필요 없다는 점에서 완전함의 표현이다.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는 세계자본주/체계/이성의 특성이다. 예수는 '모세의 체계'(구약)를 파괴하기 위해 마구간/바깥에서 태어났으며, '가난한 자, 병신, 거지, 과부'/바깥을 쉽게 말해 혁명 세력으로 여겼다. 그러나 체계를 지키려는 자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말았다.
오늘날 체계/세계자본주의 바깥에서 예수가 태어난다면 어떤 활동을 할까? 가장 먼저 직선의 시간을 휘어서 원으로 만들 것이며, 그런 다음 손을 들어 '희망과 기쁨의 시간'을 가리킬 것이다. '희망과 기쁨의 시간'은 다름 아닌 미래 없는 현재다. '지금! 여기! 기쁨!'이 그의 슬로건이다.
직선의 시간이 가리키는 '미래의 희망'은 인간을 노예로 만들고 지구를 파멸시키는 최고의 악덕이다. 그것은 진보라는 멋진 언어로 무시무시한 악덕을 은폐한 채 빛나는 상아에 둘러싸여 있다. 인간은 금수가 되지 않기 위해서 배운다고 하지만, 현대는 되레 배움을 통해 악덕의 계단을 하나씩 올라가고 있다. 어린 시절과 청년기 내내 시험에 나올 지식 따위를 배우느라 푸릇푸릇 싱그러운 생명의 빛을 지옥에 내던지면서까지.
첫 머리에 한 이야기를 다시 되풀이하겠다. "빚의 자가 재생산 시스템(현대 통화체계)—이 완벽한 시스템의 최종 생산물은 노예다. 모든 사람들이 재산을 지키고 잃지 않으려는 두려움 속에서 자발적으로 노예가 된다. 그래서 임금노예가 줄을 서게 만든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인류 전체가 쳇바퀴를 돈다. 이들은 피라미드 정상에 있는 엘리트에게만 이득이 되는 제국을 강화하기 위해 생존하고 있다."
악덕(배움)의 계단 정상에 최고의 교육을 받은 엘리트들이 자리하고 있다. 왜 천인공노할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직선의 시간 위에 있는 '미래의 희망'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것을 타파할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할 수는 없다. 나에게는 그만한 능력이 없다. 더 솔직히 말하면, 대안은 또다시 진보의 이념 안에 갇히고 만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과학적인 대안이 아닌 세속적인 대안을 추구한다. 세속적인 대안에 대해서는 '유언비어의 사회학' 등 몇 곳에서 드문드문 언급하였다.
자, 이제 '진보'의 허위를 벗기기 위하여 사회 속으로 뛰어들자.
사람들은 진보 덕분에 정신없이 바빠졌다. 왜 바쁘냐고 물으면 "더 나은 삶을 위해서" 또는 "잘 살기 위해서" 또는 "목구멍이 포도청이라서"라고 말한다. 그러나 아무도 더 나은 삶이 무엇인지, 잘 사는 게 무엇인지 묻지 않는다. 철학자나 종교인 같은 정신을 다루는 전문가들이 알아서 할 문제로 넘겨버린다.
현대인은 그들에게 돈을 주고 위안(慰安)을 사면 된다. 슈펭글러가 오늘날의 종교는 위로를 위한 기분 전환용이 됐지만 현대 문명에 필수적이라고 한 것은 아주 적절한 지적이다. 비단 종교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라는 것은 3S(screen, sport, sex 또는 speed)만 떠올려 봐도 알 만큼 더 이상 설명이 필요치 않다.
실제로 사람들은 돈을 더 벌고 스펙을 더 쌓고 교양을 더 넓히고 몸을 더 아름답게 가꾸고 더 잘하기 위해서 불철주야 여념이 없다.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더 잘한다는 것'은 인간이 추구해야 할 최고의 '덕'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무엇을 '잘'인가?"에서 '무엇'을 신적인 섭리와 확신이라는 형이상학에 넘겨버렸다. 대학에 있는 정신 전문가들은 이 형이상학을 형이하학으로 다루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그 결과 이들 역시 소크라테스처럼 '잘'로 돌아간다.
대중은 전문가에게 공을 넘기고 전문가는 다시 대중에게 공을 넘긴다. 이 순환은 자본주의체계 속에서 운동하는 상품의 G(화폐)-W(상품)-G′(G+ΔG)의 과정과 정확히 일치한다. 형이상학을 형이상학으로 대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난 일종의 사기극이다. 그 결과, 형이상학이 사각지대에 방치됨으로써 일부 거대종교는 사이비종교와 구별하기 힘들 만큼 '사기의 전당'이 돼버렸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바로 이 '형이상학으로부터의 도피'가 정당정치에 의해 완전하게 보장된다는 사실이다. 보자. 정치가들이 모인 국회는 법을 만든다. 법은 사회의 근거다. 정치가 사회의 근거를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만든 근거(법)는 무엇에 근거하고 있는가? 국민의 의사에 근거한다. 국민의 의사는 무엇에 근거하는가? 법에 근거한다. 이 순환논법이 자본주의 상품의 G(화폐)-W(상품)-G′(G+ΔG)의 과정과 정확히 일치한다. 이게 날조가 아니면 무엇이 날조인가? 오늘날 국민들에게 정치는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는 형이상학적 욕구를 위한 대용품에 지나지 않는다. 사회의 근거를 만든다는 신화 속에서.
이 신화 속에서 보수는 체계를 유지하는 역할을 하고 진보는 체계를 발전시키는 역할을 한다.
자신들이 사회를 운영하는 '방식'이 좋은 사회를 만드는 최선의 길이라고 주장한다. 좋은 사회의 내용은 모두 각 정당이 추구하는 '방식'으로 환원된다. 그것이 바로 정강 정책이다. 이들의 좋은 사회는 결국 좋은 방식인 것이다. 따라서 좋은 삶의 내용은 어디에서도 담보되지 않는다(이 점은 현대 문명의 비판과 직결되는 것으로, 내가 '잡설'의 연재를 통해 줄곧 제기하는 문제다). 복지국가에서 자살률이 높은 것도 그러한 사실을 반증하는 하나의 예다.
보수는 경쟁과 성장 그리고 상층을 위한 정치를 표방하고, 진보는 연대와 평등 그리고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는 정치를 표방한다. 그러나 이들이 하는 정치는 결국 세계자본주의의 두 측면을 대표할 뿐이다. 보수는 경쟁과 이익=행복이라는 기치 아래 체제의 안정을, 진보는 평등과 정의=방식이라는 기치 아래 체제의 변혁을. 이 둘은 자본주의체제가 굴러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두 축인 것이다.
한국의 경우는 진보 세력이 자신들의 이념을 적용할 사회 현실이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참으로 우스꽝스럽게도 한나라당이 보수를 자임하고 있음으로 해서 진정한 의미의 보수가 진보 이념이 아닌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사회진화론을 배경으로 태어나 사회의 진화를 이념으로 하는 보수주의가 어떻게 역사의 진보를 추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보수주의야말로 선진국의 이데올로기다. 선진국이라는 게 뭔가? 가장 진보한 국가를 말하지 않는가.
(보수주의의 바이블인 에드먼드 버크(1729~1797)의<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한길사 펴냄)을 번역한 이태숙 교수는 <한겨레>와 인터뷰에서 보수주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보수주의는 근본적으로 선진국 이데올로기예요. 긍정하고 지켜야 할 제도와 가치가 부재했던 신생국 대한민국에서 보수주의가 강세를 보인 것은 기이한 현상입니다. 전쟁의 경험과 북한이라는 외부 위협의 존재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 한국에서 보수주의가 세력을 유지할 수 있느냐의 여부는 결국 북한의 위협을 계속 설득력 있게 제시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만약 북한의 위협이 약해지거나 사라진다면, 1990년대 미국의 네오콘이 그랬던 것처럼, 새로운 위협 세력을 만들어내야겠지요.")
그런데 우리는 보수가 역사의 진보를 뒷걸음치게 만든다고 생각하고 있다. 바로 이것이 보수를 빙자한 한국의 수구세력이 언어의 장난질을 통해 권력을 잡은 탓에 빚어진 '사회 현실의 혼란'이다. 한국의 진보 세력이 '매국노 집단과 군사 독재 집단'에 뿌리를 둔 세력에게 '보수'란 이름을 갈수록 더 허용하고 있는 것은, 그래서 한국의 정치 지형을 보수와 진보로 정착시키는 것은 가장 결정적인 잘못이다. 이에 관해서는 앞의 글 '우파의 가면을 쓴 모리배'에서 충분히 살폈으므로 생략한다.
진보는 퇴보의 다른 이름 ⑤ "돈보다 당신을 사랑해!" 외치는 거짓말쟁이들
진보 이념이 현대 생활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보기 위해 이제부터 우리의 일상이 어떻게 진보의 레일 위를 굴러가고 있는지를 살펴보겠다. 세 가지 예를 들어본다.
먼저, 사랑에 대해서.
얼마큼 사랑하느냐고 물었을 때, "너무나 사랑해서 말로 표현할 수 없어." "우리 사랑에는 바닥이 없어." "백번을 다시 태어나도 너만을 사랑할 거야." "너를 위해 죽을 수 있어." "나보다 더 사랑해." 그러나 "돈보다 더 사랑해"라고 말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가혹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당신이 연인을 목숨보다도 사랑할망정 돈보다 더 사랑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죽으면 돈이고 뭐고 다 소용없는데 무슨 소리냐고 되묻겠지만, 그렇지 않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돈은 소용이 아니고 형이상학이다. 사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것은 순간의 결정이지만 돈은 ('돈 위의 삶'은 체계에 복종하는⎯진보를 믿고 따르는⎯삶이라고 했듯이) 당신의 전 존재를 죽음 이후까지도 지배한다.
인류 최초의 서사시 <길가메시>에 나타나는 '사랑과 재물'의 원초적인 관계를 한번 살펴보자. "길가메시, 내게로 오세요. 신랑이 되어주세요." 사랑의 여신 이슈타르가 길가메시에게 반하여 구혼을 하지만, 길가메시는 여신을 모욕하며 거부한다. 여신은 분에 떨며 하늘로 올라가 부모 앞에서 눈물을 쏟는다. "아버지, 길가메시를 쳐부술 수 있는 황소를 제게 주세요." 여신은 하늘의 황소를 몰고 길가메시를 공격해온다. 지상에서 가장 유능한 사냥꾼 길가메시는 하늘의 황소와 싸워 목덜미와 뿔 사이를 칼로 찌르고 목을 베어버린다. 사랑을 거부한 대가로 하늘의 황소를 획득한 셈이다. 5000여 년 전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다스린 길가메시 왕의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사랑의 거부가 황소를 오게 한 것'을 읽을 수 있다. (<그리스 문명의 오리엔트 전통>, 발터 부르케르트 지음, 남경태 옮김, 사계절 펴냄)
또 한편의 서사시를 소개한다. 게르만 서사시를 오페라로 만든 바그너의 <니벨룽겐의 반지>를 보면, 라인의 딸이 이렇게 노래한다.
"사랑의 힘을 거부한 자만이,
사랑의 쾌락을 거부한 자만이,
황금을 강요하여 반지로 만들 수 있는
마법을 얻어낼 수 있으리."
여기서 반지는 무제한의 권력과 세계의 상속권을 지닌 반지다.
공교롭게도 세계 금융 중심지라는 미국의 월가 한복판에는 검은 황소의 상이 서 있다. 세상은 월가의 검은 황소 밑에 있는 사냥터일까? 우리는 길가메시의 범례를 따라서 날마다 사냥터로 나가는 것일까? 당신은 어떤가? 일을 위해, 성공을 위해, 사랑을 거부하고 있지는 않은지? 현대인은 황소를 위해 사랑을 거부했으면서도 사랑하는 당신을 위해 사냥터에 나간다고 믿고 있다.
예컨대, 당신과 K씨는 사랑하고 있다. 일에 파묻혀 있는 K씨는 사랑하는 당신을 만나기 위해서 일에 지장이 없는 시간을 고른다. 만약 K씨가 약속을 어길 경우, 일 때문이라면 당신은 이해한다. 하지만 K씨가 약속을 번번이 어기면 당신은 참지 못하고 화를 낸다. K씨는 당신을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 데려가 기분을 풀어준다. 당신은 K씨의 변명을 들으며 사랑의 감정을 회복할뿐더러 그를 이해하지 못한 걸 미안해하면서 더 열심히 일하라고 격려한다.
그러고는 라디오 음악 프로그램 같은 곳에 사연을 보낸다. "그 사람을 사랑하는 건 그 사람의 일까지 함께 사랑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자기야 사랑해!" 이렇게 사연이 나가고, "참 아름답군요. 일이란 게 그렇잖아요. 자기도 어떻게 할 수 없을 때가 많으니까 말이죠. 사랑은 연인의 일에 대한 이해 없이는 쉽게 사그라지는 불꽃인 것 같아요" 운운하는 진행자의 멘트와 함께 '험한 세상 다리 되어' 같은 노래가 흘러나온다.
사랑보다 일(돈)을 중시하지 않으면 삶의 터전에서 추방당하는 엄혹한 현실이다. 길가메시든 니벨룽겐 반지의 주인공이든, 이들이 사랑을 거부한 대가로 얻은 부와 권력은 야망 때문이다. 그런데 현대의 소시민은 '빚의 자가 재생산 시스템'(현대 통화체계)의 최종 생산물인 노예이기 때문에 사랑을 위해 '빚'(일/돈)을 거부할 권리가 없는 것이다.
둘째, 스케줄에 대해서.
꽉 짜인 스케줄을 보고 숨이 막힐 때도 있고, 시류에 뒤처지지 않았다는 자부심이 들 때도 있다. 전자일 때는 이렇게 살아서 뭐 하나 하는 회의가 밀려와 여행이라도 떠나고 싶고, 후자일 때는 경쟁사회가 주는 희열 속에서 성취를 위해서라면 뭐든 감수할 것 같다. 이 두 감정이 한 사람한테서 일어난다.
바쁜 스케줄상에서 당신은 주인인가 노예인가? 분명히 스케줄은 당신이 짜는데도 후자의 경우마저 선택의 여지없이 당신은 스케줄의 노예다. 마치 인간이 정해진 운명의 각본대로 살면서도 자신의 의지대로 산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스케줄에 작용하는 운명의 각본 같은 것, 그것이 바로 진보의 레일이다. 스케줄은 진보의 레일 위를 달리는 열차이자 진보의 레일이 깔려 있는 행선지다.
스케줄이 이 레일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은 일상이 그렇다는 얘기다. 우리가 일상을 말할 때는 공기와 같이 자각되지 않는 현상에 주목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거기에 일상의 진실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면 일과 무관한 경우에도 당신이 자신의 스케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뚜렷하게 보게 된다. 그것은 당신의 스케줄이 진보의 레일 위를 달리는 열차라는 반증이다.
예를 들어, 같이 놀아주기를 원하는 딸이 날이면 날마다 얼마나 외롭게 지내는지를 몰라서 함께할 시간은 내지 못해도, 허구한 날 보는 사람들과 건수 만들어서 보는 모임은 빠지기 힘들다. 또 우울증에 시달리는 늙은 아버지가 오늘 저녁 와달라는 부탁은 거절할망정 노인의 외로움을 다룬 영화 약속은 기꺼이 지킨다. 등산모임, 친목회, 술자리, 미술관 관람, 사진 강좌, 스포츠센터, 영어회화, 인터넷 동아리 활동 등 수없이 많은 스케줄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당신은 이것들을 인간적인 일(딸이나 부친)과 바꾸려 하지 않는다. 이는 당신이 원래 비인간적이어서가 아니라 스케줄이란 게 본디 당신의 의지에서 독립하여 진보의 레일 위를 달리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스케줄상의 일 하나하나를 사용가치로 대하지 않는다. 모든 상품이 그렇듯, 스케줄도 물신(物神)이라는 환영으로 인해 당신을 떠나 하나의 독립된 세계를 이룬다. '일과(스케줄)의 세계'와 '당신'의 관계. 여기에는 필연적으로 논리와 방식이 관철된다. 당신은 이 논리와 방식—메커니즘—에 종속된 상태에서 살지 않을 수 없다. 이 메커니즘이 바로 스케줄에 작용하는 운명의 각본 같은 것이자 더 잘 살기 위해 미래의 시간을 향해 깔린 진보의 레일이다.
마지막으로, 여행에 대해서.
복잡다단한 업무와 현실을 떠난다는 것이야말로 여행이 안겨주는 큰 기쁨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대부분 피상적인 기쁨만을 맛보고 돌아오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떠남', 이것을 방해하는 장본인은 바로 '진보'라는 괴물이다.
히말라야의 안나푸르나를 여행한 경험을 예로 들어 잠깐 살펴보겠다. 바로 내 눈앞에 펼쳐진 장관에 감탄을 금치 못하고 사진을 찍고 일행과 감동을 나눈다. 산에 흠뻑 취하고 싶어 홀로 계곡에도 앉아 있어보고, 무심한 마음으로 오두막의 베란다에도 앉아 있어본다.
그러나 정말로 잠시만 산에 집중할 수 있다. 산과 나 사이에 장벽이 둘러쳐져서 내 머릿속은 세상일로 다시 분주해진다. 이런저런 골칫거리, 크고 작은 스트레스, 창피한 기억들, 떠올리고 싶지 않은 얼굴들, 억울한 일, 분노할 일 따위…. 이 감옥을 벗어나지 않고서는 산과의 교감은 요원할 뿐이다. 벗어나려고 발버둥 칠수록 감옥으로 다시 붙잡혀온다.
이 장벽이 왜 진보와 관계가 있다는 것인가? 반대의 경우를 생각하면 답은 훨씬 쉽게 나온다. 나는 서울을 떠나 섬에 가서 사는데, 한 3년 넘어가니까 장벽(스트레스, 창피한 기억 등 세상의 일로 이루어진 장벽)이 서서히 걷히는 것을 느꼈다. 그 기간만큼 진보의 레일에서 이탈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인 덕분이다. 즉, 그 기간 동안 나는 생활 속에서 직선의 시간을 휘어 원형으로 만들려고 애쓴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생략하고 결론만 말하면 이렇다. '직선의 시간관을 가지고서는 어떤 수행을 해도, 또 어떤 영감으로 가득한 예술혼으로 접근해도, 자연은 당신에게 문을 열지 않을 것이다.'
안나푸르나를 내려와 카트만두 시내에서 쇼핑을 한다. 기념품을 비싸게 샀느니 싸게 잘 샀느니 하며 일행들과 함께 밥을 먹는다. 이 나라는 한국의 5, 60년대 같다고들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어느 곳을 가나 한국의 경제 수준과 비교하는 건 필수다. 사정이 이러한데, 우리의 여행이 진보의 레일을 달리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제 마무리를 하도록 하자. 진보에 대한 비판은 진보 '바깥'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한국의 정치 지형에서 진보 세력이 거듭 새롭게 태어나려면 제일 먼저 스스로를 비판할 그 바깥이 어디인지를 발견해야 한다. 그 바깥은 결코 보수일 수 없을뿐더러, 보수로 위장한 모리배 집단과의 논쟁이나 경쟁 또한 결코 바깥을 발견할 수 없게 만든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다. 그것은 자본주의가 원하는 구도만 확고하게 해줄 뿐이다.
나는 진보에 대한 비판을 '바깥'에서 행하였다. 이 '바깥'은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바깥이며, 더 멀리 가면 문명의 바깥이다. 또, 인간의 바깥, 사회의 바깥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학문의 아웃사이더로서의 바깥이며, 나아가 내가 쓰고 있는 이 '문자' 세계의 바깥이다.
진보 세력이 그 '바깥'을 어떤 '사회주의적인 이상' 같은 것에서 찾는 향수, 그리고 그것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패가망신할 뿐이다. 이를 염려하여 아래 인용과 함께 끝으로 내 의견을 몇 자 덧붙인다. "사회주의는 이른바 '인간의 동일성'이라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마르크스가 그런 종류의 사회주의적 이상가(idealist)를 철저하게 비판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그것은 마르크스가 '가치'에 대해 보다 깊이 있는 통찰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전경제학은 두 개의 이질적인 사용가치가 등가일 수 있는 근거를 거기에 포함된 동질의 인간 노동에서 구한다. 사실 이것(모든 상품 속에 동질의 인간 노동이 들어 있다는, 고전경제학의 노동가치설)은 화폐 형태를 전제로 한 발상이며, 화폐를 각 상품 속에 내재시키는 일이다. 요컨대 화폐의 성립에 의해 비로소 각 상품은 '공통의 실체(동질의 인간노동)'를 지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그들은 각 상품은 원래 '공통의 실체'를 지닌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 마르크스가 말하는 것은 '인간은 똑같다(평등하다)'는 사고가 선험적인 진리가 아니라 '상품 형태가 노동생산물의 일반적인 형태인 사회'에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결국 동질의 인간노동이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화폐경제의 확대 속에서 나타난 것이다."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 가라타니 고진 지음, 김경원 옮김, 이산 펴냄)
이처럼 상품에 내재한 '공통의 실체'는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인간의 동일성'이라는 가짜 개념'(=노동가치설), 즉 '본질'의 철학에 입각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본질에 기초한 진보는 자본주의 변혁('차이'의 철폐)을 목 놓아 부르짖으면서 실제로는 오히려 '산업자본주의를 옹호하는 고전경제학(차이의 확대)을 맹렬히 신봉한 꼴이 되었다.
산업자본주의는 시간적인 차이에서 이윤을 얻는다. 즉 기술 개발을 통해 가치체계를 끊임없이 차이 짓기 함으로써 잉여가치를 획득한다. 이것은 시간적 차이가 가치의 차이를 생산하는 '방식'의 발전이다. 근대적인 의미의 진보는 이 방식이 주축이다.
여기서 방식은 인간의 호불호(好不好)에 상관없이 자기운동으로 관철된다. 인간의 감정이 사상된 바로 이 메커니즘, 형식주의, 수학적일 만큼 엄밀하고 논리적인 방식; 이념-비판-대안-토론-계획-실천. 이것이 진보주의자가 가장 좋아하는 태도이자 철학이다. 이곳에서는 생명이 질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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