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과 산문

김경주<못은 밤에 조금씩 깊어진다>

미송 2009. 3. 14. 12:39

     

    못은 밤에 조금씩 깊어진다

    김경주


    어쩌면 벽에 박혀 있는 저 못은
    아무도 모르게 조금씩 깊어지는 것인지 모른다

    이쪽에서 보면 못은
    그냥 벽에 박혀 있는 것이지만
    벽 뒤 어둠의 한가운데서 보면
    내가 몇 세기가 지나도
    만질 수 없는 시간 속에서 못은
    허공에 조용히 떠 있는 것이리라

    바람에 벽이 스미면 못도 나무의 내연(內緣)을 간직한
    빈 가지처럼 허공의 희미함을 흔들고 있는 것인가

    내가 그것을 알아본 건
    주머니 가득한 못을 내려놓고 간
    어느 낡은 여관의 일이다
    그리고 그 높은 여관방에서 나는 젖은 몸을 벗어두고
    빨간 거미 한 마리가
    입 밖으로 스르르 기어나올 때까지
    몸이 휘었다

    못은 밤에 몰래 휜다는 것을 안다

    사람은 울면서 비로소
    자기가 기르는 짐승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2003년 대한매일(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
    2005년 대산창작기금 수혜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기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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