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권지현<모른다고 하였다>

미송 2010. 12. 25. 10:59

모른다고 하였다 / 권지현


우루무치행 비행기가 연착되었다
북경공항 로비에서 삼백삼십 명의 여행자들은
여섯 시간째 발이 묶인 채 삼삼오오 몰려다녔다
현지여행객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여행가방에 다리를 올리고 앉아
떠들어대거나 서로 담배를 권했다
담배를 피워올리건 말건
나는 도시락으로 식사를 했다

비행기는 언제 올지 오지 않을지
아무도 모른다고 하였다
연착한다는 안내표시등 한 줄 뜨지 않았다
사람들은 연신 줄담배를 피우고
나는 로비를 몇 바퀴나 돌고
하릴없이 아이스크림을 핥다가
마침내는 쪼그리고 앉아 지루하게 졸았다
항의하는 나를 마주한 공항여직원
가슴께에 걸린 얼굴사진이 흐릿하게 지워져 있어
내가 가야할 길마저 희미해 보였다

비행기는 오지 않고
결리는 허리뼈를 아주 잊을 때까지 오지 않고
우루무치행 비행기는 언제 올지,
아무도 모른다고 하였다

-2010 세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1968년 경북 봉화
국민대 국문학과
2006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당선
현재 국민대 강사


[시감상]
시인은 당선소감에서 “시는 존재의 개명(開明)”이라고 말한 하이데거의 시론을 인용하고 있다. 시를 이루어 가는 과정이 ‘존재를 개명해 가는 행위’라는 뜻이다. 그런 의미로 삶을 이루는 여러 요소 중에서 시 쓰기는 생의 마지막까지 지속될 것이라고 그녀는 말한다.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일이라서,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보다는 숨이 붙어 있다 그러니 살아 있다 정도로만 실존적 상황을 말해도 좋겠다 싶다. 생각한다는 주체적 그 생각마저도 믿을 게 못 되는 바에야, 이 순간 쌕쌕 들려오는 제 숨소리는 경이로운 생명, 사랑보다 진한 동맹이 아니겠는가. 우루무치행 비행기를 타면 파란 호수가 열리는 실크로드에 닿을 수 있을까. 모르쇠로 고개를 흔드는 공항의 사람들. 문득,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은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 외에 아는 것이 없다고 한 소크라테스의 현명함처럼. 간이역 혹은 우루무치행 공항으로 비유되는 세상 속에서 나 역시 모르겠다. 내 귀에 들리는 숨소리와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것 외에, 아무것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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