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팽이 / 김철식
내가 퇴행을 각오하면서까지
너의 네 줄 가로무늬를 주술처럼
지니고 있는 이유를 나는 모른다
내 몸 속 또 하나의 나인 너를
철갑으로 껴안고 있는 이 고집도 알 수 없다
오직 너의 예민한 촉각에 굴종하기 위하여
빛깔 없는 나의 노래는
허공을 흔들고, 단 한 순간
천년을 떨게 하는 오르가슴을 위해
그 황홀 같은 기절을 위하여
음지를 기어가며 너와 나의 살점을 뜯는다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 하든
그것이 소통이 아니라 하든
아, 그것이 소멸이고 폐허라 하든
운명처럼 너 있는 곳에 내가 있고
내가 토하는 모든 슬픔이 네 안에 고임에야
하여, 장마철 나의 힘겨운 산란은
너를 위한 아름다운 퇴화가 되고
너의 네 줄 무늬는
치욕으로 잉태한 나의 기적이 된다
김철식
1967년 경남 사량도 출생.
1996년 <문학동네>로 등단.
시집 "내 기억의 청동숲" 등.
<시감상>
Y염색체가 꾸준히 퇴화하면서 결국엔 사라질 것이라는 예상이 있었다. 그러나 오히려 Y염색체가 여성의 것 보다 빠른 속도로 진화한다는 주장을 미국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 생의학연구소의 데이비드 페이지 교수팀이 올 초에 제기(提起)하였다. 만약에 이 시에 화자가 남성이라면 일반적 기준으로도 그는(수컷 달팽이)두 배나 더 퇴화를 겪는 셈인가. 퇴행과 퇴화라는 부정적인 변이형식을 저토록 아름다운 시선으로 바라봤다는 것은 관능과 폐허를 스스럼없이 받아들였다는 의미.
문득, 면벽한지 9년이 된 달마를 획 돌아앉게 했던 여자가 감상 속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죄목은 클 것이다. 내버려두었으면 이미 열반에 들었을 남자를 궤도이탈까지 시켜서, 삶, 삶까진 정말 아니었다. 달마는 자신의 현실을 뭐라 말했을까. 너라는 여자를 만나기 위해 9년 동안 그렇게 면벽했던 거야, 농담을 던지고 만약 그렇게 서로 믿었다면 그들은 완벽한 건달들이다. 인생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사랑, 사랑을 가르쳐 준 주고 있는 한 남자를 떠올린다. 네 줄 무늬가 대체 뭐기에 (무슨 황금테두리라도 된다고) 퇴행으로의 길로 기꺼이 들어선 당신. 당신은 내가 준 그 치욕으로 나 또한 목 메이게 만들고 있다.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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