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는
비누 향 풍기는 종이 꽃이다
영원을 약속한 남자에게
긴 머리 날리며 달려가는 여자
부르면 얼른 달려가 안기는 희열
아침 이슬이 햇살에 이마를 비비는 아픔이다
종이꽃에서
온갖 꽃술을 뽑아내면서
가시에 찔려가며 기다림을 익히는 그녀
한낮의 불기둥에 한사코 매달리는
그녀의 함성과 미소
시베리아의 카추샤에게
사죄를 받으려고 뒤쫓는 네플류도프를 마다하고
그녀는 화려하게 승천한다
돌문을 밀치고 나온 한 다발 광채가
커다란 독수리 모습으로 빚어지는 정오에
- 오정자 <장미의 부활>
20060502-20150112
단 한권의 내 시집에서도 빠져버린 시를 가끔씩 찾아 읽는다. 이 여자가 시방 무슨 말을 하는 겨, 할지 모르겠다, 독자들은 아마 다 모르겠지. 수필 속에 한 주인공 처녀가 시로 진입하여 변신했던 사실과 어쩌다 톨스토이 부활의 주인공이 결구에 돌연 등장하게 되었는지,를. 물론 시를 썼던 사람은 다 기억해, 하면 글쎄, 지만. 사연을 기억하니 시의 아리송한 뜻도 나는 안다 말 할 수 있겠다. 이기적인가, 왜 이기적이려 하는가. 미안하지만 이 시가 맘에 들기 때문이다. 오늘 센터 아이들과 두 번째 수업시간에 톨스토이를 했다. 톨스토이를 한 시간 반 말하기 위해서 네 권의 톨스토이를 읽었다. 물론 동화로 읽었지만. 세 가지 질문, 사랑이 있는 곳에 신이 있다, 사람에게는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할까,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모두가 경전처럼 다가왔다. 톨스토이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아이들은 왜 나의 스승인가. 그것은, 그들이 나를 다시 공부하게 하고 내가 몰랐던 톨스토이를 다시 생각하게 해 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고마움의 인사를 꾸벅하면서, 예전에 인용했던 부활의 인물들을 다시 또 다시 생각하고 들여다본다, 졸시 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