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신불(等身佛)은 양자강(양자강) 북쪽에 있는 정원사(淨願寺)의 금불각(金佛閣) 속에 안치되어 있는 불상의 이름이다. 등신금불(等身金佛) 또는 그냥 금불이라고도 불렀다. 그러니까 나는 이 등신불, 또는 등신금불로 불리는 불상에 대해 보고 듣고 한 그대로를 여기다 적으려 하거니와, 그보다 먼저, 내가 어떻게 해서 그 정원사라는 먼 이역의 고찰(古刹)을 찾게 되었는지 그것부터 이야기해야겠다.
내가 일본의 대정대학 재학 중에, 학병(태평양 전쟁)으로 끌려나간 것은 일구사삼(1943)년 이른 여름, 내 나이 스물세 살 나던 때였다. 내가 소속된 부대는 북경서 서주를 거쳐 남경도에 도착되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른 부대가 당도할 때까지 거기서 머무르게 되었다. 처음엔 주둔이라기 보다 대기에 속하는 편이었으나, 다음 부대? 도착이 예상보다 늦어지자, 나중은 교체 부대(交替咐隊)가 당도할 때까지 주둔군의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때 우리는 확실한 정보는 아니지만 대체로 인도지나나 인도네시아 방면으로 가게 된다는 것을 어림으로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루라도 오래 남경에 머물수록 그만치 우리의 목숨이 더 연장되는 거와 같이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교체 부대가 하루라도 더 늦게 와주었으면 하고 마음속으로 은근히 빌고 있는 편이기도 했다.
실상은 그냥 빌고 있는 심정만도 아니었다. 더 나아가서 이 기회에 기어이 나는 나의 목숨을 건져내어야 한다고 결심을 했다. 나는 이런 기회를 위하여 미리 약간의 준지(조사)까지 해두었던 것이다. 그것은 중국의 불교 학자로서 일본에 와 유학을 하고 돌아간-특히 대정대학 출신으로- 사람들의 명단을 조사해둔 일이었다. 나는 비장(秘藏)한 작은 쪽지에서 '남경 진기수(陳奇修)'란 이름을 발견했을 때 야릇한 흥분으로 가슴이 후들거리며 머릿속까지 횡해지는 듯했다.
그러나 낯선 이역의 도시에서, 더구나 나 같은 일본군에 소속된 한국 출신 학병의 몸으로써, 그를 찾고 못 찾고 하는 일이 곧 내가 죽고 사는 판가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들, 또 내가 평소에 나의 책상머리에 언제나 걸어두고 바라보던 관세음보살님의 미소로써 나를 굽어보고 있는 것이라고 믿어지지 않았던들, 그때의 그러한 용기와 지혜를 내 속에서 나는 자아내지 못했을는지 모른다.
나는 우리 부대가 앞으로 사흘 이내에 남경을 떠난다고 하는- 그것도 확실한 정보가 아니고 누구의 입에선다 새어나온 말이지만- 조마조마한 고비에 정심원( 남경에 있는 중국인 불교 포교당)에 있는 포교사를 통하여 진기수씨가 남경 교외의 서공암이라는 작은 암자에 독거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날 내가 서공암에서 진기수씨를 찾게 된 것은 땅거미가 질 무렵이었다. 나는 그를 보자 합장을 올리며 무수히 머리를 수그림으로써 나의 절박한 사정과 그에 대한 경의를 먼저 표한 뒤, 솔직하게 나의 처지와 용건을 털어놓았다.
그러나 평생 처음 보는 타국 청년- 그것도 적국의 군복을 입은-에게 그러한 위험한 협조를 쉽사리 약속해줄 사람은 없었다. 그의 두 눈이 약간 찡그려지며 입에서는 곧 거절의 선고가 내릴 듯한 순간 나는 미리 준비하고 갔던 흰 종이를 끄집어내어 내 앞에 폈다. 그러고는 바른편 손 식지 끝을 스스로 물어서 살을 떼어낸 다음 그 피로써 다음과 같이 썼다.
'원컨대 살생을 면하게 하옵시며 부처님의 은혜 속에 귀의코자 하나이다' 나는 이 여덟 글자의 혈서를 두 손으로 받들어 그의 앞에 올린 뒤 다시 합장을 했다. 이것을 본 진기수씨는 분명히 얼굴빌이 달라졌다. 그것은 반드시 기쁜 빛이라 할 수는 없었으나 조금 전의 그 거절의 선고만은 가셔진 듯한 얼굴이었다. 잠깐 동안 침묵이 흐른 뒤 진시수씨는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를 따라오게."
나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뒤를 따라갔다.
깊숙한 골방이었다.
진기수씨는 나를 그 컴컴한 골방 속에 들여보내고 자기는 문을 닫고 도로 나가버렸다. 조금 뒤 법의(法衣) 한 벌을 가져와 방 안으로 디밀며
"이걸로 갈아입게."
하고 또다시 문을 닫고 나갔다.
나는 한숨이 터져 나왔다. 이제야 사는가 보다 하는 생각이 나의 가슴속을 후끈하게 적셔주는 듯했다. 내가 옷을 갈아입고 났을 때, 이번에는 또 간소한 저녁상이 디밀어졌다.
내가 빈 그릇을 문밖으로 내어놓자 밖에서 기다리고나 있었던 듯 이내 진기수씨가 어떤 늙은 중 하나를 데리고 들어왔다.
"이분을 따라가에, 소개장은 이분에게 맡겼어. 큰절의 내 법사 스님한테 가는...."
"......."
나는무조건 네, 네 하며 곧장 머리를 끄덕일 뿐이었다. 나를 살려주려는 사람에게 무조건 나를 맡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길은 일본 병정들이 알지도 못하는 산속 지름길이야, 한 밸 리 남짓 되지만, 오늘이 스무하루니까 밤중 되면 달빛도 좀 일을게구...그럼...불연(佛緣) 깊기를...나무관세음보살."
그는 나를 향해 합장을 하며 머리를 수그렸다.
나는 목이 콱 메여옴을 깨달았다. 눈물이 핑 돈 채 나도 그를 향해 잠자코 합장을 올렸다.
어둡고 험한 산길을 경암-나를 데리고 가는 늙은 중-은 거침없이 걸었다. 어무리 발에 익은 길이라 하지만 군데군데 나뭇가지가 걸리고 바닥이 파이고 돌이 솟고 게다가 굽이굽이 간수가 가로지른 초망 속의 지름길을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어쩌면 그렇게도 잘 뚫고 나가는지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내가 믿는 것은 젊음 하나뿐이련만, 그는 이십 리나 삼십 리를 걸어도 힘에 부치어 쉬자고 할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쉴 새 없이 손으로 이마의 땀을 씻어가며 그의 뒤를 따랐으나 한참씩 가다 보면 어느덧 그를 어둠 속에 잃어버리곤 했다. 나는 몇 번이나 나뭇가지에 얼굴을 긁히고, 돌에 차여 무릎을 깨고 하며 "대사..." "대사....." 그를 불러야만 했다. 그럴 때마다 경암은 혼잣말로 낮게 중얼거리며 나를 기다려주는 것이나 내가 가까이 가면 또 아무 말도 없이 그냥 휙 돌아서서 걸음을 옮겨놓기 시작하는 것이다.
밤중도 훨씬 넘어 조각달이 수풀 사이로 비쳐들면서부터 나는 비로소 생기를 얻기 시작했다. 이제부터는 경암이 제아무리 앞에서 달린다 하더라도 두번 다시 그를 놓치지는 않으리라 맘속으로 다짐했다.
이렇게 정세가 바뀌었음을 그도 느끼는지 내가 그의 곁으로 다가서자 그는 나를 흘낏 돌아다보더니, 한쪽 팔을 들어 먼 데를 가리키며 반원을 그어 보이고는 이백 리라고 했다. 이렇게 지름길을 가지 않고 좋은 길로 돌아가면 이백 리 길이라는 뜻인 듯했다. 나는 한마디 얻어들은 중국말로 "쎄 쎄" 하고 장단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여 보이곤 했다.
우리가 정원사 산문 앞에 닿았을 때는 이튿날 늦은 아침절이었다. 경암은 푸른 수풀 속에 거뭇거뭇 보이는 높은 기와집들을 손가락질로 가리키며 자랑스런 얼굴로 무어라고 중얼거렸다. 나는 또 고개를 끄덕이며 "하오! 하오!" 를 되풀이했다. 산문을 지나 정문을 들어서니 산무더기 같은 큰 다락이 정면에 버티고 섰다. 현판을 쳐다보니 태허루(太虛樓) 라 씌어 있었다.
태허루 곁을 돌아 안마당 어귀에 들어서니 정면 한가운데 높직이 앉아 있는 가장 웅장한 건물이 법당이라고는 짐작이 가나 그 양옆으로 첩첩이 가로 세로 혹은 길쭉하게 눕고, 혹은 높다랗게 서고 혹은 둥실하게 앉은 무수한 집들이 모두 무슨 이름에 어떠한 구실을 하는 것들인지 첫눈엔 그저 황홀하고 얼떨떨할 뿐이었다. 경암은 나를 데리고, 그 첩첩이 둘러앉은 집들 사이를 한참 돌더니 청정실이란 조그만 현판이 붙은 조용한 집 앞에 와서 기척을 했다. 방문이 열리더니 한 스무 살이나 될락 말락 한 젊은 중이 얼굴을 내밀며 알은체를 한다. 둘이서 (젊은이는 방문 앞에 서고 경암은 뜰 아래 선 채) 한참 동안 말을 주고받고 한 끝에 경암이 나를 데리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는 머리가 하얗게 세고 키가 성큼하게 커 뵈는 노승이 미소 띤 얼굴로 경암과 나를 맞아주었다. 나는 말이 통하지 않으므로 노승 앞에 발을 모으고 서서 정중히 합장을 올렸다. 어저께 진기수씨 앞에서 연거푸 머리를 수그리던 것과는 달리, 이번에는 한 번만 정중하게 머리를 수그려 절을 했던 것이다.
노승은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나에게 앉을 자리를 가리킨 뒤 경암이 내드린 진기수씨의 편지를 펴 보았다.
"불은(佛恩)이로다."
편지를 읽고 난 노스은 이렇게 말했다. (그것도 그때는 알아듣지 못했지만 나중 가서 알고 보니 그랬다. 그리고 이것도 나중에야 알게 된 일이지만 이 노긍이 두어 해 전까지 이 절의 주지를 지낸 원혜대사로, 진기수씨가 말한 자기의 법사 스님이란 곧 이분이었던 것이다.)
그날 저녁때 나는 원혜대사의 주선으로 그가 거처하고 있는 청정실 바로 곁의 조그만 방 한 칸을 혼자서 쓸 수 있게 되었다. 나를 그 방으로 인도해준 젊은이- 원혜대사의 시봉-
"저와 이웃이죠."
희고 넓적한 이를 드러내 보이며 빙긋이 웃었다. 그리고 자기 이름을 청운이라 부른다고 했다.
나는 방 한 칸을 따로 쓰고 있었지만 결코 방 안에 들어앉아 게으름을 피우지는 않았다. 나를 죽을 고비에서 건져준 진기수씨- 그이 법명은 혜운이었다- 나 원혜대사의 은덕을 생각해서라도 나는 결코 남의 입질에 오르내릴 짓을 해서는 안 되리라고 결심했던 것이다.
나는 아침 일찍이 일어나 세수를 하고, 예불을 끝내면 청운과 함께 청정실 안팎과 앞뒤의 복도와 뜰을 먼지 티끌 하나 없이 쓸고 닦았다. 뿐만 아니라 다른 스님들을 따라 산에 가 약도 캐고 식량 준비도 거들었다. (이 절에도 전쟁 관계로 식량이 딸렸으므로 산중의 스님들은 여름부터 식용이 될 만한 풀잎과 나무 뿌리 같은 것들을 캐러 산으로 가곤 했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손발을 깨끗이 씻고 내 방에 꿇어앉아 불경을 읽거나 그렇지 않으면 청운에게 중국어를 배웠다.(이것은 나의 열성에다 청운의 호의가 곁들어서 그런지 의외로 빨리 진척이 되어 사흘 만에 이미 간단한 말로 - 물론 몇 마디씩이지만- 대화하는 흉내까지 낼 수 있게 되었다.)
아무리 방에 혼자 있을 때라도 취침 시간 이외엔 방 안에 번듯이 드러눕지 않도록 내 자신과 씨름을 했다. 그렇게 버릇을 들이지 않으려고 나는 몇 번이나 내 자신에게 다짐을 놓았는지 모른다. 졸음이 와서 정 견디기 어려울 때는 밖으로 나와 어정대며 바람을 쐬곤 했다.
처음엔 이렇게 막연히 어정대며 바람을 쐬던 것이 얼마 가지 않아 나는 어정대지 않게 되었다. 으레 가는 곳이 정해지게 되었다. 그것은 저 금불각이었던 것이다. 여기서도 물론 나는 법당 구경을 먼저 했다. 본존을 모셔 둔 곳이니만치 그 절의 풍모나 품격을 가장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곳이라는 까닭으로서보다도 절 구경은 으레 법당이 중심이라는 종래의 습관 때문이라고 하는 편이 옳았는지 모른다. 그러나 내가 법당에서 얻은 감명은 우리나라의 큰 절이나 일본의 그것에 견주어 그렇게 자별하다고 할 것이 없었다. 기둥이 더 굵대야 그저 그렇고 불상이 더 크대야 놀랄 정도는 아니요, 그 밖에 채색이나 조각에 있어서도 한국이나 일본의 그것에 비하여 더 정교한 편은 아닌 듯했다. 다만 정면 한가운데 높직이 모셔져 있는 세 위의 불상을 그대로 살아 있는 사람으로 간주하고 힘겨룸을 시켜본다면 한국이나 일본의 그것보다 더 놀라운 힘을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나로서는 어디까지나 살아 있는 사람으로 간주하고 힘겨룸을 시켜본다면 하는 가정에서 말한 것이지만 그네의 눈으로써 보면 자기네의 부처님이 그만치 더 거룩하게만 보일는지 모를 일이었다. 더 쉽게 말하자면 내가 위에서 말한 더 놀라운 힘이란 체력을 뜻하는 것이지만 그들의 눈에는 그것이 어떤 거룩한 법력이나 도력으로 비칠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특히 이런 생각을 더하게 된 것은 금불각을 구경한 뒤였다. 금불각 속에 모셔셔 있는 등신불을 보고 받은 깊은 감명이 그 절의 모든 것을, 특히 법당에 모셔져 있는 세 위의 큰 불상을, 거룩하게 느끼게 하는 어떤 압력 같은 것이 되어 나타났다고나 할까.
물론 나는 청운이나 원혜대사로부터 금불각에 대하여 미리 들은 바는 없었지만 금불각이 앉은 자리라든지 그 집 구조로 보아서 약간 특이한 느낌이 그 안의 불상을 구경하기 전에 이미 들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법당 뒤꼍에서 길 반가량 높이의 돌계단을 올라가서, 거기서부터 약 오륙십 미터 거리의 석대가 구축되고, 그 석대가 곧 금불각에 이르는 길이 되어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더구나 그 석대가 꼭 같은 크기릐 넓적넓적한 네모잽이 돌로 쌓아져 있는데 돌 위엔 보기 좋게 거뭇거뭇한 돌 옷이 입혀져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법당 뒤꼍의 동북쪽 언덕을 보기 좋은 돌로 평평하게 쌓아서 석대를 만들고 그 위에 금불각을 세워놓은 것이다.
게다가 추녀와 현판을 모두 돌아가며 도금을 입히고 네 벽에 새긴 조상(彫像)과 그림에 도금을 많이 써서 그야말로 밖에서 보는 건물 그 자체부터 금빛이 현란했다.
나는 본디 비단이나, 종이나, 쇠붙이 따위에 올린 금물이나 금박 같은 것을 왠지 거북해하는 성미라 금불각에 입혀져 있는 금빛에도 그러한 경계심과 반감 같은 것을 품고 대했지만 하여간 이렇게 석대를 쌓고 금칠을 하고 할 때는 그대들로서 무언가 아끼고 위하는 마음의 표시를 하느라고 한 짓임이 틀림없을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그 아끼고 위하는 것이 보나마나 대단한 것은 아니리라고 혼자 속으로 미리 단정을 하고 있었다. 나의 과거 경험으로 본다면, 이런 것은 대개 어느 대왕이나 황제의 갸륵한 뜻으로 순금을 많이 넣어서 주조한 불상이라든지 또는 어느 천자가 어느 황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친히 불사를 일으킨 연유의 불상이라든지 하는 따위- 대왕이나 황제의 권위를 보여주기 위한 금빛이 십상이었기 때문이었다. 나의 이러한 생각은 그들이 이 금불각의 권위를 높이기 위하여 좀처럼 문을 열어주지 않는 것을 보고 더욱 굳어졌다. 적어도 은화 다섯 냔 이상의 새전이 아니면 문을 여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어느 선남선녀의 큰 불공이 있을 때라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큰 불공이 있을-에도 본사 승려 이외에 금불각을 참례하는 자는 또 따로 새전을 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더구나 신도들의 새전을 긁어모으기 위한 술책으로 좁쌀만 한 언턱거리를 가지고 연극을 꾸미고 있는 것임이 틀림이 없으리라고 나는 아주 단정을 하고 도로 내 방으로 돌아왔다가 그때 마침 청운이 중국어를 가르쳐주려고 왔기에,
"저 금불각이란 게 뭐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물어보았다.
"왜요?"
청운이 빙긋이 웃으며 도로 물었다.
"구경 갔더니 문을 안 열어주던데......"
"지금 같이 가볼까요?"
"무에 담에 보지."
"담에라도 그럴 거예요, 이왕 맘 난 김에 가보시구려."
청운이 은근히 권하는 빛이기도 해서 나는 그렇다면 하고 그를 따라 나갔다.
이번에는 청운이 숫제 금불각을 담당한 노승에게서 쇳대를 빌려와서 손수 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문 앞에 선 채 그도 합장을 올렸다.
나는 그가 문을 여는 순간부터 미묘한 충격에 사로잡힌 채 그가 합장을 올릴 때도 그냥 멍하니 불상만 바라보고 서 있었다. 우선 내가 예상한 대로 좀 두텁게 도금을 입힌 불상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내가 미리 예상했던 그러한 어떤 불상이 아니었다. 머리 위에 향로를 이고, 두 손을 합장한, 고개와 등이 앞으로 좀 수그러진, 입도 조금 헤벌어진, 그것은 불상이라고 할 수도 없는, 형편없이 초라한, 그러면서도 무언지 보는 사람의 가슴을 쥐어짜는 듯한, 사무치게 애절한 느낌을 주는 등신대의 결가부좌상이었다. 그렇게 정연하고 단아하게 석대를 쌓고 추녀와 현판에 금물을 입힌 금불각 속에 안치되어 있음 직한, 아름답고 거룩하고 존엄성 있는 그러한 불상과는 하늘과 땅 사이라고나 할까. 너무도 거리가 먼, 어이가 없는, 허리도 제대로 펴고 앉지 못한, 머리 위에 조그만 향로를 얹은 채 우는 듯한, 웃는 듯한, 찡그린 듯한, 오뇌와 비원이 서린 듯한, 그러면서 무어라고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이랄까 아픔 같은 것이 보는 사람의 가슴을 콱 움켜잡는 듯한, 일찍 본 적도 상상한 적도 없는 그러한 어떤 가부좌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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