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즐거운 편지 / 황동규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맬 때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언제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시감상>
이 시는 시인이 고 3때 연상의 여자를 짝사랑할 때 썼다. 시를 쓸 당시 물려받은 연애시의 전통은 김소월의 '진달래꽃'과 한용운의 '님의 침묵'이다. 고려가요 '가시리'에 깃든 '가시난 닷 도셔 오쇼셔‘가 이 시의 주제다. 결국 저 세상에 가서라도 기다릴 테니 '가시난 닷 도뎌 오쇼셔' 하는 애틋한 노래. 한용운도 '아, 님은 갔습니다 그러나 나는 님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노래했다. 그러나 이 시에선 그 오랜 전통에 '변형'을 꾀했다는 사실이 다른 점. 샤르트르 유의 실존주의가 유행하던 당시 사회적 분위기를 배경으로 그는 시의 변형을 실험한 것이다. '실존(實存)이 본질(本質)을 선행한다 고로 사랑도 늘 새롭게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고 늘 선택을 해야 되는 것이고 그리고 인간의 모든 일과 마찬가지로 끝이 있을 수 있다’는 중요한 생각이 시 안에 들어 있다. 한 번 주어진 사랑의 본질 때문에 그 사랑이 일생을 가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 시의 초점이다.
사랑은 동사형이라서 연인들을 잉잉(ing-ing)거리게 만드는가.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이해가 잘 안 되던 부분이다. 그러나 그 '반드시' 에서 오히려 사랑의 변증을 넘어선 신비한 생명력이 느껴졌다면, 황동규 시인의 시편들에서 두루 감지되는 건, 실존의 변화로서 존재의 거듭남과 일종의 낯설게 하기라 할까. 즐거운 편지를 좀 더 밀도 있게 바라보면 그다지 즐거울 것도 별로 없다. 오히려, 유한有限한 (그러니까 거창한, 영원불변한 신의 사랑 같은 건 일찌감치 빼고 어디까지나 변화무쌍한 인간적 측면에서) 사랑이라 일컬어지는 것에 대한 일체의 비애悲哀로운 예감을 즐겁게 말하고 있단 느낌마저 든다. 그건 일종의 '극서정(克 혹은, 極) 抒情을 통한 존재의 전환' 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의 이러한 존재변화에 대한 입장이 본격적으로 극명克明하게 노래되고 있는 게 바로 죽음에 관한 시(동시에 삶의 황홀함을 노래한) '풍장風葬' 연작시이다. 죽음이란 게 없으면 삶의 황홀함도 없다는,
내 세상 뜰 때 우선 두 손과 두 발, 그리고 입을 가지고 가리
어둑해진 눈도 소중히 거풀 덮어 지니고 가리
허나 가을의 어깨를 부축하고 때늦게 오는
저 밤비 소리에 기울이고 있는 귀는 두고 가리
소리만 듣고도 비 맞는 가을 나무의 이름을 알아맞히는
귀 그냥 두고 가리.
- <풍장 27>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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