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신화

삐에르 부르디외 <실천이성>

미송 2009. 3. 24. 09:22

 

이 책은 삐에르 부르디외가 일본, 미국, 네덜란드, 프랑스, 독일에서 행한 강연을 묶은 것이다. 부르디외의 사상을 대략적으로 집약해 놓았다는 말에는 수긍이 가지만, 그것을 쉽게 요약, 정리 했다는 말에는 솔직히 동의하기 힘들다. (아니, 이해하기 힘들다가 맞겠다)

 

부르디외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사회적 공간’ 개념으로 설명한다. ‘사회적 공간’이라는 개념은 거시적인 사회 구조, 즉 인종, 관료제, 계급(맑스적 의미, 혹은 베버적 의미에서의), 젠더, 국가 등을 모두 다루면서, 혹은 포괄하면서도 ‘아비투스(habitus)’, ‘장(field)' 등, 생소한 개념들을 전면에 내세우며 2차원도, 3차원도 아닌 새로운 공간 지각의 방법론을 보여준다. 그에게 있어서 ’사회적 공간‘은 사회라는 거대하고 복잡한 구조 틈, 어디엔가 존재하고 있는 개인의 위치다. 그것을 부르디외는 ’분화적 편차들의 체계‘ 풀어쓰면, ’사회라는 상징적 공간 안에서 파편화되어 어디엔가 위치해 있는 개개인과 그 관계들, 그리고 그 구조‘에 관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전적으로 ’이념‘적이거나 ’계급‘적, 혹은 ’자본주의‘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독특한 인류문화적인 문제다.

 

부르디외는 매우 가난한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그랑제꼴(그 자신, 그렇게 비판하던)을 졸업해 학자의 길을 걸은 사람이다. 그는 서구를 휩쓴 68혁명에 크게 고무되었다. 그러나 68혁명은 그에게있어 희망과 좌절, 즉 환멸의 새로운 이름이었다.

 

이런 그의 이력을 염두하면서 부르디외가 천착한 근본적이고 구체적인 주제부터 쉽게 접근해 보자. 먼저, ‘왜 가난한 집의 아이들은 사회 구조 속, 주류로부터 소외당하는가?’ 하는 문제, 둘째로 ‘왜 68년의 무정부주의자들은 다시 안락한 사회의 품으로 안겼는가?’ 하는 문제, 셋째로 ‘왜 자신의 계급과 어긋나는 정치적 선택들이 비일비재 한 것일까?’ 하는 문제 정도로 요약해 보았다.

 

첫째의 의문에 대해 부르디외는 ‘사회 구조 안에서의 교육과정은 인간을 분류하는 ’맥스웰의 데몬‘이다.’고 주장한다. 즉 관료적이고 일방적이며 비효율적인 교육 제도는 학생들을 선별하는 ‘중세 수도원’의 역할을 하고 있고, 이에 맞춰 따라가는 아이들을 분류해 사회의 지배관계를 ‘재생산social reproduction'하는 데 유용할 뿐이라는 것이다. 부르디외는 이 재생산의 매커니즘에 관해 ’(작금의 학교는)구조화된 구조들에 따라 (학생들을)선택하고, 그것은 그 질서를 알지도 못하고 원하지도 않은 채 재생산해내는 경향을 보인다.‘고 말한다. 맥스웰이 실험관 속에서 뜨거운 입자와 차가운 입자를 분류해 내는 데, 아~무 기준도, 아~무 이유도 없는 것을 그저 ’악마의 소행이다‘고 생각한 것처럼.

 

부르디외는 학교, 그리고 교육제도에 많은 관심을 쏟는다. 특히 현대의 ‘학교’가 많은 ‘학위 증명서’를 과잉생산하고 있는 문제점도 지적한다. 이러한 현상은 앞서 말한 것처럼 ‘알지도 못하고 원하지도 않’지만 어느 학교에서나 나타나고 있다.(주로 선진국의 학교들이겠다.) 이는 앞으로 논의의 대상이 될 ‘국가’ 그리고 ‘관료의 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므로 그 때 더 자세한 설명을 할 것이다. 

 

두 번째와 세 번째는 같이 설명될 수 있다. 부르디외는 양식이 선행하고, 그것이 행동을 결정한다는 것을 부정한다. 나아가 그는 그것을 ‘가능성의 공간’으로 표현한다. 즉, 중요한 것은 행동의 결과가 아니라 사회속에서 개인이 어떤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방점을 찍는다. 그 가능성의 동력은 ‘게임의 법칙’에서 볼 수 있는 ‘이해관계理解關係’와 ‘이해관계利害關係’인 것이다. 

 

즉 지금까지 사회, 그 안의 개인을 분석하는 작업은 개인이 속한 집단(회사든, 집단이든, 혹은 계급이든)이 있고, 그것이 개인의 행동 양식(취미든, 식생활이든, 정치 성향이든)을 결정한다는 전제가 암묵적으로 깔려 있었다. 하지만 부르디외는 그것을 부정하는데, 특히 막스적 관점의 ‘계급’ 개념의 맹점을 지적하며 설명한다. 그는 이렇게 단정짓는다. “사회과학의 주요 목표는 계급들을 구축하는 것이 아니다, 계급 문제가 드라마틱하게 제기되는 것은 오로지 그것이 정치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이렇게도 말한다. “실제적인 계급이 현실적으로 언젠가 존재했다면, 그것은 오로지 실현된 계급, 다시 말해 동원된 계급일 뿐이며, 본질적으로 상징적인(그리고 정치적인) 투쟁으로서의 계급 결정들의 투쟁이 낳은 귀결이다.” 그리고 투쟁은 ‘사회적 세계가 재단될 수 있게’, 즉 공산주의 유토피아를 만들 수 있도록, 사람들이 계급을 이루도록 강제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부르디외는 “공간을 구성하는 두 지점의 상이한 가능성들이 분석가들에게는 양립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지만 실제로는 양립하고 있다.”는 데 주목했다. 즉, 막노동하는 사람이 한나라당에 표를 던지는 것은 그의 계급을 생각해본다면 서로 ‘상이한 가능성’의 관계이다. 맑스 식이라면 그것은 불가능해야만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리고 골프를 좋아하는 사람이(우리는 한국사회에서 그를 상류층이라 부를 수 있다.) 소주를 좋아할 수도 있다.(소주는 한국 사회에서 서민의 술이라 부를 수 있다.) 사회 속의 개인에게는 이 상이한 아비투스(취향 쯤 되겠다)들이 복잡하게 섞여있다. 그 모든 아비투스들이 그가 어떤 ‘사회적 공간social space'에 위치하고 있는지 설명해준다. 그 아비투스는 후천적으로 경험한 것을 토대로 생겨나고, 그렇기 때문에 자본(경제, 문화, 사회, 상징)의 양에 의해 특정 계층 사이에서만 재생산 되는 것이다.

 

즉 ‘가능성의 공간’ 이란 이러한 개인의 여러 이해관계들이 게임의 법칙에 따라 움직일 수 있는 ‘사회적 공간의 여지(이 말은 내 멋대로 만들어냈다.)’다. 이 공간에서 각각의 장(문학의 장, 기술의 장, 정치의 장 등등)들은 서로 영향을 주며 관계를 맺고 있다. 그것은 ‘투쟁’이다. 각각의 장이 갖고 있는 쟁점들 사이의 투쟁이다. 장은 자율적인 것이고 그것은 필연적으로 자신이 진리라 믿는 것을 믿게 하고 싶어하기 때문에 투쟁인 것이다. 그리고 그 장들은 서로를 ‘구별’지으며 존재한다. 이는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말하는 ‘구별, 차이’ 등과 일맥상통하는 개념이다.

 

부르디외는 ‘장’의 개념, 그리고 그 사이의 '투쟁‘의 개념을 ’문학의 장‘과 ’과학의 장’의 예를 들어 설명한다.(챕터 3, 작품의 과학을 위하여) 부르디외가 말하는 ‘장’은 언뜻 위계 질서에 의한 수학적 집합 법칙에 적용되는 것처럼 보인다. 즉 소설의 장은 희곡의 장과 교집합이고, 이 두 장은 ‘문학의 장’ 안에 있는 소집합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이들 장은 위계질서를 뛰어 넘는 관계를 통해 서로 발전하고, 퇴행한다. 부르디외는 장의 ‘외부적 요인’이 장의 진보를 결정한다고 말한다. 이를테면 그는 “인상주의 혁명의 성공은 젊은 예술가들(신통치 않은 떠돌이 화가들)과 젊은 작가들로 이루어진 일단의 관객들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즉 미술자본의 장에서 이뤄지는 부르주아 미술가와 순수 미술가들(한국인들이 흔히 말하는 그 ‘순수’말고)의 투쟁 바깥에서, 떠돌이 화가들이 미술의 진보를 이뤄낸 것이다. 미술 뿐만 아니라, 문학, 과학 등 모든 장을 넘어서서 서로 영향을 주는 것이 가능하다. 또한 과학의 장이 가진 독단적인 생각에 대해서도(흔히 모든 사실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는 따위의) 그것이 단지 ‘과학의 장’에서 이루어지며, 보편적 리비도가 아니라 ‘과학적 리비도’를 추구한다는 사실을 종종 잊어버리는 과학자들의 태도가 문제라는 비판을 날리기도 한다. 그는 이어서 과학이 ‘사회’를 결정하지 않을 뿐더러, 과학의 장 안에서 벌어지는 권력 투쟁, 자본 투쟁은 권력의 장, 자본의 장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충고한다. 

 

이러한 장들 사이의 투쟁에서 가장 강압적이고 일방적인 ‘장’은 ‘국가’다. 그리고 국가의 핵심적 매커니즘인 ‘관료의 장’이다. 부르디외는 국가를 막스 베버의 유명한 정의를 변형시켜, “국가는 일정한 영토와 이에 상응하는 인구 정체에 대해 물리적이고 상징적인 폭력을 합법적으로 사용하는 무엇이다.”라고 정의한다. 부르디외의 표현에 따르면 국가는 일종의 ‘메타 자본의 보유자’이다. 매우 깔끔하게 정리된 이 말은 내게 트랄파마도어어처럼 들리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상당히 복잡하다. 모든 종류의 자본(문화, 경제, 사회, 상징 자본 등, 부르디외가 말한 ‘새로운 자본new capital')을 컨트롤하는 괴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뉴 캐피탈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앞서 말한 ‘재생산’의 전략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다. 사회는, 혹은 개인의 사회적 공간 안에서의 위치는 순수한 의미의 ‘자본’으로만 결정되지 않는다. 경제 외적인 축적물. 다른 이들의 사회적 위치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진 정도를 측정한 것이 바로 새로운 자본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경제적 자본 외에 새로운 자본은 문화자본cultural capital, 사회자본(사회관계자본이라고도 하는)social capital, 그리고 상징자본symbolic capital을 말한다. 쉽게 이야기해서 문화자본은 ‘교육 수준’, 사회자본은 ‘어떤 조직에서의 위치(즉 위계질서를 통해서든 아니든,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힘의 크기)’, 그리고 상징자본은 다른 세 가지 자본이 전통적으로 승인된 방식인(이 표현은 훔쳐온 것이다.)존엄, 명예, 명성 등을 말하는 것이다. 다른 모든 자본은 상징적 자본에 봉사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컨트롤 하는 것이 바로 국가다. 그리고 국가와 관료제의 이러한 힘은 사회적으로 규정된 계급이 재생산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그것을 ‘국가’ 스스로는 아는지 모르는지, 모른다.)

 

국가의 탄생과정은 “경제적 자본이 상징적 자본으로 변하는 원리로서 기능하는 재분배, 그리고 반대 급부 없는 징수에 토대한 매우 특수한 경제적 논리의 점차적 확립”에 의한 것이었다. 즉, 국가는 강압적 징수(이는 보통 전쟁과 관련이 있다)를 통해 경제자본을 컨트롤하고, 교육 제도의 통제를 통해 문화자본을 컨트롤하며, 위계질서를 토대로 한 관료제를 발달시켜 사회자본을 컨트롤하고, 이 모든 자본 체계를 고착화시켜 상징자본을 컨트롤해왔다.

 

이에 대해 부르디외는 이렇게 설명한다. “기존 질서에 복종하는 현상은 집단적이고(계통발생) 개인적인(개체발생)역사가 육체들에 새겨놓은 인식적 구조들과 이것들이 적용되는 세계의 객관적 구조들 사이의 일치가 낳은 산물이다.” 즉 국가구조는 개인들에 체화되어 있으며 이것이 ‘조국을 위해 죽는 일’같은 얼토당토하지 않는 실천을 가능케 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국가, 그리고 사회를 이루는 ‘상징적 질서’다. 상징적 질서는 ‘국가’에 복종하는 관료들이 ‘국가 일’을 수행하면서 자연스레 상호작용을 일으키며 ‘국가’를 규정해온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국가담론은 “그들이 차지하는 위치의 정당성을 제공해주면서 법률적 픽션으로서 국가를 성립하고 확립시켰”다. 이는 외관상으로 그럴 듯 하게 보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국가 앞에서 유순해진다. ‘법률적 픽션’이라는 부르디외의 표현은 보드리야르가 시뮬라시옹에서 국가의 구조를(구체적으로 말하면 ‘미국의 민주주의의 구조’를) 진실이 없는 ‘시뮬라크르들의 집합체’로 묘사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한 마디 덧붙이자면 이러한 픽션은 스스로 픽션임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성격을 가지고 있어(영화 매트릭스에서 바이러스를 치유하는 가상현실의 통제자처럼) 그것이 ‘픽션’으로 드러날 위기에 처하면 곧바로 ‘저지’ 시스템을 가동시킨다. 계속되는 ‘함열implosion'의 과정 속에서...

 

다시 처음에 제기한 고민으로 돌아와 보자. 왜 사람들은 자신의 현실을 배반하는 선택을 하게 될까? 수천년을 내려오며 체화된 사회의 ‘상징질서’를 거스르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질서 안에서 사람들은 ‘정치적 의도에 의해 미리 정해진' 계급과 같은 분류방법으로 설명되지 않는 사회적 공간 안 어느 지점에 자리하고 있다. 그것은 여러 아비투스들이 모여 이룬 개인의 위치다. 그리하여 2차원의 세계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사회적 공간은 마치 3D 게임의 영상과도 같은 공간이다. 그 안에 무수한 ’장‘들이 있지만 개인은 한정된 ’장‘에서만 활동한다. 간혹 공유하는 경우도 있지만 매우 제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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