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신화

로렌쪼<타고난 공격성>

미송 2009. 3. 28. 10:42

타고난 공격성/ 로렌쯔

 

 

우리는 인간 행동의 어떤 중요한 특성들은 경험에서 배워진 것이라기보다는 생득적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무시했다고 스키너를 비판했었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인간의 불행에 대하여 바로 이러한 가능성을 고려하고 진단한 로렌쯔에게로 돌려보자. 로렌쯔는 동물 행동학(ethology)이라고 불리우는 생명 과학의 분과를 창시한 사람들 중의 하나이다. 어원적으로 볼 때, 동물 행동학이라는 용어는 성격에 대한 연구를 의미하지만, 이제는 동물의 행동에 대한 과학적 연구를 의미하는 데 씌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 용어는 동물 행동학자가 역시 동물의 행동을 과학적으로 연구하기를 주장하는 심리학자와 어떻게 다른지는 명확하게 구별해 주지는 않는다. 궁극적으로는, 차이가 없겠지만, 그러나 분명히 두 개의 다른 접근 방식이 있어 왔고, 이 방식들은 겨우 이제 와서야 서로의 입장을 다소 이해하는 자세(rapprochment)를 갖게 되었다.

 

왓슨이나 스키너와 같은 행동주의자들은 의식보다는 행동을 연구한다는 방법론뿐만 아니라, 어떤 광범한 경험주의적 이론들__행동은 거의 전적으로, 조건화 메커니즘에 의해서 중재되는 환경적인 영향에 의해서 일어난다고 하는__을 고수하였음을 우리는 보았다. 따라서 그들의 실험은 어떻게 환경이 행동을 변화시킬 수 있는가에 관한 세부적인 것들을 연구해 왔다. 금세기의 20년대와 30년대에 와서, 초기의 동물 행동학자들은 동물 행동 패턴들 중의 아주 다수(전통적으로 "본능적인"것이라고 불리워져 온 것들)가 행동주의적 방식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것임을 인식하였다. 이러한 행동들에서 특이한 것은 그 행동들이 고정되어(fixed) 있으며, 환경이 실험적으로 아무리 심하게 조작되더라도 환경에 의해서 제거되거나 바뀔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물 행동학자들은 이러한 고정된 "본능적" 행동 패턴들에 관심을 집중하였고, 동물의 "자연적인" 행동을, 실험을 하기 위해 간섭하기 이전에, 야생 그대로 관찰하였다.
 

그러므로 동물 행동학의 특수한 강조점은 동물 행동의 가장 중요한 양상들 가운데 몇 가지 행동은 타고난 것이라고 하는 반 행동주의적 가정에서부터 나오게 된다. 이러한 행동을 설명하기 위해서 동물 행동학자들은 개개의 동물의 과거의 경험에 특별히 흥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그 동물이 그 종(that species)에까지 이르는 진화의 과정을 연구한다. 한 종에 있어서 어떤 본능적 행동의 존재를 설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 행동이 그 종을 위한 어떤 잔존 가치(survival value)를 가지고 있는지를 말하여야 한다. 따라서 동물 행동학은 일반적인 심리학보다는 직접적으로 진화론에 기초하고 있다. 그리고 인간 본질에 관한 현대의 동물 행동학적 이론들은 인간의 현재의 조건을 설명하기 위해 인간의 진화적 과거에 특별히 관심을 가진다. 그러므로 여기서 진화론의 요점들을 간단히 검토해 볼 만한 것이다. 이는 인간의 본질에 관한 어떤 타당한 이론도 이 진화론을 여하한 경우에도 무시해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다윈은 한 조상으로부터 점차적으로 갈라져 나온 종의 진화 이론에 도달한 유일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의 '종의 기원'(1859)은 과학적이며 통속적인 견해를 가진 이들로 하여금 이 이론의 진리를 확신하게 만든 고전이다.

 

그 본 제목은 '자연 도태에 의한 종의 기원:혹은 생존 경쟁에 있어서의 적자 보존'으로서, 이 책의 주요 사상을 효과적으로 요약하고 있다. 이 책은 교육받은 일반 대중을 위해서 씌어졌고, 그 전 20년간에 다윈이 그의 연구로부터 축적한 방대한 증거 자료를 가지고 그 요지를 논증하고 있다. 이 책에서 그는 그것이 분명하게 함축하고 있는 것__인간도 또한 동물 조상들로부터 내려왔다는 것__을 드러내서 진술하고 있지 않지만, 그럼에도 이 분명한 암시는 그 당시의 몇몇 신학자들과의 유명한 논쟁을 야기했다. 후기의 책들인 '인간의 유래'(1871)와 '인간과 동물에 있어서의 감정 표현'(1872)에서 다윈은 그의 이론들을 명백하게 인간에 적용시켰다.(후자의 제목이 어떻게 동물 행동학적 주제를 암시하는가를 주목할 것.)
 

다윈의 이론은 네 가지의 진정한 경험적 명제에서 논리적으로 연역해 낸 것이다. 처음 두 개는 유전학의 문제에 관계한다__즉, 부모의 특성들은 대체로 그 자손에 옮겨지는 경향이 있지만, 그럼에도 일정한 종의 개체간에는 상당한 변이가 있다는 것이다. 이 두 명제의 진실성은 폭 넓고 다양한 관찰에서 명백히 드러나고, 고의적으로 서로 다양한 가축을 기를 때 이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 이론적인 설명은 다윈의 시대 이후 멘델의 유전자론에서 비로소 발견되었다.("돌연 변이" '유전자에 있어서의 우연적인 변화'와 유효 유전자의 수, 그리고 그들의 상호 작용 패턴이 두 번째 명제에 진술된 변이를 설명해 준다.) 다윈의 논의에서 세 번째와 네 번째의 명제는 종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할 수 있는 반면, 환경 자원은 그러한 비율을 유지해 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두 개의 사실들로부터, 비례적으로 지극히 적은 수의 씨앗과 알과 그리고 새끼들만이 성숙에 이를 수 있다는 결론이 난다.

 

요약하면, 생존을 위한 경쟁이 우선적으로 같은 종간에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제 이 경쟁과 그리고 하나의 종 내부의 변이라는 사실로부터 우리는 가장 오래 사는 어떤 개체들(그들의 형질들은 주어진 환경에서 가장 "유리한" 조건을 가지는 것이다)이 있게 되리라는 것을 연역해 낼 수 있다. 그들은 자손을 남길 가장 좋은 기회를 갖게 될 것이며, 따라서 첫번째 유전자가 주어지면, 우성 형질들은 전해 주려는 경향이 있고, 반면에 열성 형질들은 소멸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리하여 일정한 시간이 경과하면 동물 개체군(population)의 대표적인 형질들은 변화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질 연대 같은 광대한 기간과 환경의 광범한 다양성이 주어지면, 공통 조상들에게서 서로 다른 종이 서서히 진화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진화를 산출하는 데 전적으로 필요한 것은 우연적인 돌연 변이에 의해서 일어나는 변이에 대한 끊임없이 영향을 끼치는 자연 도태의 압력이다. 생물학적으로 인정하기 어려운 "획득" 형질들(개체별로 습득되어진 형질들)의 유전__라마르크가 가정 했었고, 다윈 자신도 그의 저작의 어디선가 가정했던__을 가정할 필요는 없다. 진화의 메커니즘에 대한 이런 매우 일반적인 논의를 떠나서,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공통된 조상을 갖는다는 것에 대해서는 직접적이고 경험적인 많은 증거가 있다.

 

비교 해부학은 인간의 신체가 다른 척추 동물과 마찬가지의 일반 모형__제각기 다섯 개의 손(발)가락이 있는 사지 등__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인간의 태아는 하등 동물과 비슷한 발달 단계를 거친다. 성인의 신체에는 이러한 하등 동물의 "자취"__예를 들면, 꼬리 흔적__가 있다. 우리 신체의 기초적인 화학적 성질__예로 소화, 혈액, 유전자__은 다른 포유 동물들과 유사하다. 마지막으로, 원숭이와 비슷하지만 지금 있는 어떤 원숭이보다도 인간과 닮은 동물의 화석이 남아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조상이 동물이라는 것은 증거에 의해서 압도적으로 확증되는 것이다. 진화의 세세한 메커니즘에 대해서는 약간의 의문이 남아 있지만, 그러나 우리가 진화해 왔다는 것은 확립된 사실로서, 인간 본질에 관한 어떠한 진실된 이론이라 할지라도 이를 반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진화의 사실이 정확히 무엇을 함축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이론 그 자체에 의해서는, 해결될 수 없는 논쟁거리다.

 

어떤 19세기의 성직자는 진화론은 창조에 관한 기독교적 교리에 어긋난다고 생각했지만, 오늘날의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거기에서 아무런 실제적 모순을 발견하지 않는다.(떼이야르 드 샤르뎅은 독특한 진화적 신화를 형성하기조차 했다.) 마르크스는 이 이론을 인간 역사의 진보적 발전에 관한 그의 견해를 확증해 주는 것으로서 환영하였다. (그는 '자본론'의 영역판을 다윈에게 헌정하고자 하기까지 했는데, 그러나 다윈은 그 영예를 정중하게 거절하였다!) 그러나 우익 정치가들은, 진화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경제 경쟁이 적자 생존과 마찬가지로 "자연적인 것"이며, 따라서 올바른 것임을 의미한다고 주장하였다.(이러한 이론은 "사회적 다윈주의"라고 불리웠다.) 우리 시대의 몇몇 인기 있는 책들이, 우리가 원숭이 같은 조상들로부터 진화해 왔다는 것이 우리의 진정한 본질을 밝혀 주는 열쇠라는 생각을 써먹었다. 즉, 로버트 아드리가 '속지 명령'에서, 데스몬드 모리스가 '벌거벗은 원숭이'에서, 그리고 아더 쾨스틀러가 '기계 속의 유령'에서 그러했다. 그러나 그들의 사상들의 주요 원천 중의 하나는 로렌쯔의 저서이다. 그러므로 그의 사상들에 대한 비판적 고찰은 독자들이 이러한 최근의 인기 있는 작품들을 공감적인 그러나 회의적인 눈으로 볼 수 있도록 준비시켜 줄 것이다.
 

프로이트와 같이, 콘라드 로렌쯔는 비엔나의 과학적__문화적인 전통의 산물로서 인류를 위해 깊은 의미가 있는 새로운 과학 연구 분야를 창시하였다. 동물 행동에 대한 전문적인 논문에서 그는 많은 종에 대한 매우 광범하고 주의 깊은 관찰 결과들을 해석했고, 그가 도입한 개념들 중 얼마간은 현대의 생태학계에서 통용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또한 일반 독자들을 위해서도 썼는데, '솔로몬의 반지'(1950)나 '인간이 개와 만나다'(1954), 그리고 '공격에 대해서'(1963)에서 그는 품위와 유머와 매력적인 성품을 돋보이게 하고, 또한 인식론과 사회에 관한 심오한 문제들에 대한 식견을 발휘하고 있다. 처음 두 책은 동물 행동학적 주제들을 대부분 그 자신이 기르고 있는 애완 동물들에 대한 여러 가지 일화적 묘사들을 통해서 소개하고 있다. 그 세 번째 책은 공격적 행동에 집중하고 인간의 조건을 진단하고자 시도하고 있으므로, 필자의 페이지 참조는 이 책에 의할 것이다.(아메리칸 판을 위해서 이 장의 끝을 보라.)

   

우주론

 

로렌쯔는 생태 과학자이다. 따라서 그 이론의 바탕이 되는 가정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필자가 앞서 요약한 진화론이다. 어떤 특정한 기관(organ)이나 혹은 행동 패턴의
존재를 설명하기 위해서, 그 기관이나 행동 패턴이 종을 위해서 어떤 잔존 가치를 가지고 있는가를 그는 구명하고자 한다(pp.8__9). 동물 행동학자로서, 그는 모든 행동이 환경에 의해서 조건화 된다는 것을 거부하고(p.41), 본능적인 행동 패턴들을 연구하는 데 몰두하고 있다. 이 패턴들에 있어 특징적인 것은, 본능적인 행동을 일으키게 하는 데 있어서 외부적인 자극이 반드시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그 행동은 자발적으로 마치 동물 자신의 내부에 있는 동기들에 의해서 추진된 것처럼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암놈을 빼앗긴 숫비둘기는 박제된 비둘기나 헝겊 조각, 혹은 새장의 비어 있는 구석을 향해서까지도 구애하는 춤을 추기 시작한다(p.42). 그리고 파리를 잡아 본 적도 없고 다른 어떤 새가 그렇게 하는 것을 본 적도 없는, 집에서 기른 찌르레기는 파리가 없을 때에도 파리를 잡는 동작을 하는 것이(p.43). 로렌쯔는 "유전적 조정(hereditary co-ordinations)" 혹은 "본능적 운동"인 이러한 동물 행동 패턴들이 많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즉, 그 패턴들은 학습된 것이기보다는 생득적인 것이며, 그 패턴 하나하나에는 그 행동을 자발적으로 나타나게 하는 "충동"이 있(p.74). 그러나 그는 또한 약간 모호하게, 그리고 한 가정으로서 이러한 고정된 행동 패턴들은 네 가지 "중요한 충동들"__먹이, 생식, 탈출, 그리고 공격__중의 하나 혹은 그 이상의 것에 좌우된다고 제시한다(p.75). 그는 어떠한 행동도 보통, 적어도 두 가지 이상의 충동이나 내부적 원인들에 의해 일어나며(pp.73, 84), 그리고 독립적 충동들 간의 갈등은, 마치 정치 체제 내부의 권력의 균형과 같이, 전체 유기체에 팽팽한 관계를 부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p.80). '공격에 대해서'에서, 로렌쯔는 동물의 공격적 행동을 조직적으로 기술하는 데 대부분 그의 관심을 기울였는데, 그는 이 공격적 행동이 주요 충동들 중의 하나에 의해서 추진된, 본능적인 것이라고 믿는다. 그는 먹이(짐승)에 대한 육식 동물의 공격이나, 육식 동물에 대한 먹이 짐승의 떼를 지은 습격, 혹은 궁지에 몰린 어떤 동물의 자기__방어와 같은 것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같은 종의 구성원들 사이의 싸움과 위협에 관심을 갖고 있다(pp.18__22). 그리하여 종 안에서의 공격에 집중하면서 그는 그 종족__보존적 기능이 무엇일 수 있는가를 묻고 몇 가지 해답을 내놓는다.

첫째로 공격은 그 종의 개체들을 적당한 영역에 고르게 분산시킬 수 있으며, 따라서 각자에게 충분한 먹이가 있도록 한다(pp.24__30). 산호초에서 각 물고기 종류는 그 자신의 독특한 먹이원이 있으며, 각 개체는 그의 "영역"을 다른 종의 고기들에게는 쉽게 용납하지만, 같은 종의 다른 개체들에게는 대항해서 지키고자 한다.

 

두 번째와 세 번째로는, 한 종의 서로 경쟁자인 수컷들간의 공격은 제일 강한 개체가 자손을 남기며, 가족과 무리를 방어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을 보증한다(p.31). 마지막으로, 공격은 하나의 동물 사회에서 "먹이 질서" 혹은 위계 질서를 세우고 유지하는 것에 이바지하는데, 이 질서는 가장 나이 먹고 가장 경험이 많은 동물들이 무리를 지도할 수 있고 그들이 배운 것을 전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리한 것이다(pp.35__7). 그러나 어떻게 같은 종의 구성원들 간의 공격이 분명히 잔존과는 모순되는 상해나 죽음에 이끄는 법 없이 이러한 잔존 가치를 지닐 수 있는 것일까? 놀라운 사실은, 육식 동물들간에 공격이 그렇게 널리 퍼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야생 동물들이 그들 자신의 종의 구성 개체에 의해 죽임을 당하거나 심하게 상처를 입는 일은 드물다는 것이다. 많은 공격적 행동들은 실제적인 육체적 싸움보다는 위협이나 추격의 형태를 취한다. 로렌쯔는, 진화는 싸움의 "의식화(ritualization)"를 낳았고, 따라서 실제로 상해를 일으키지 않고 위에 말한 이점들을 얻을 수 있다고 이론화하였다(pp.93__8).

 

특히 번식이나 사냥을 위해서 협동해야만 하는 중무장된 동물들에 있어서는 공격이 금지될 수 있는 메커니즘이 필요하다(p.110). 그러므로 전형적으로 약한 동물이 보다 강한 동물의 공격을 제지할 수 있는 일종의 유화적인 몸짓, 혹은 의식적(ritual)인 항목 같은 것이 있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물린 개들은 그들의 취약한 목덜미를 적의 이빨에 대주는 데 이것은 어떤 특별한 금지 메커니즘을 작용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즉, 그렇게 함으로써 승리자는 자제하여 치명적으로 물지는 않고(pp.113__14), 단지 인정받은 승리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다.

   

인간론

 

로렌쯔는 인간을 다른 동물들로부터 진화된 동물의 하나로 본다. 우리의 실체와 그 생리가 현저하게 다른 동물들과의 연속성을 보여 주고 있는 것처럼, 로렌쯔는 우리의 행동양태들도 기본적으로는 동물과 유사한 것이라고 예견한다. 우리 자신을 동물과 본질적으로 다른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자유 의지의 이름이든 다른 무엇 때문이든, 하나의 환상이다. 우리의 행동은 모든 동물의 행동과 똑같은 자연의 인과 법칙에 종속되고 있으며(pp.190__2, 204, 214), 우리가 이 사실을 인식하지 않는 한 사태는 우리에게 나쁘게만 되어갈 것이다. 물론, 우리는 여타의 동물 세계와 정도에 있어서 다르며, 우리는 진화에 의해서 이만큼까지 오게 된 "지상 최고의" 성취 결과이다(p.196). 우리의 행동을 원인적으로 설명한다는 것은 반드시 우리의 "존엄성(dignity)" 혹은 "가치(value)"를 폐기하는 것은 아니며, 한편 우리가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이 차츰 증가됨에 따라 우리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힘도 증가되기 때문이다(pp.196__202).

 

로렌쯔는 이러한 철학적 물음들을 아주 깊이까지 진전시키지는 않았지만, 그는 자신이 스키너보다는 그 문제들에 대해서 훨씬 더 민감하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인간 본질에 대한 로렌쯔의 견해에서 결정적인 포인트는, 다른 많은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종족을 향해 공격적인 행동을 하는 생득적 충동을 가지고 있다는 이론이다. 그는 이 사실만이, 왜 갈등과 전쟁이 인간 역사를 통해 일어나고 있으며, 이성적인 존재들이 왜 끊임없이 비이성적인 행동을 하는가에 대해 설명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pp.203__4). 그는 프로이트의 죽음의 본능 이론도 인간 본질에 관한 동일한 기본적인 사실에 대한 해석이라고 말한다(p.209). 로렌쯔는 우리의 생득적 공격성에 대해서, 그리고 그 유별난 집단적인 공격성(왜냐하면 대부분의 파괴적 싸움은 개인간이 아니라 집단간에 있기 때문이다)에 대해서 진화론적인 설명을 하려 한다.

 

그는 우리 조상들의 어떤 진화 단계에서, 그들이 인간 외적인 환경의 위험을 다소 극복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주요한 위험은 다른 인간의 무리로부터 오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웃한 적대적 종족들간의 경쟁은 자연 도태에 있어 주요한 요소가 되었으며, 따라서 "전사의 용맹(warrior virtue)"에 잔존 가치가 있게 되었다(p.209). '자연 도태는 종뿐만 아니라 문화의 진화도 결정할 수 있다(p.224)'. 선사 시대일 것이라고 가정되는 이 단계에서는, 다른 무리들과 싸우기 위해서 가장 잘 뭉친 무리들이 가장 오래 잔존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런 사실에 의해서 로렌쯔는 인간 무리가 흥분하여 공격적이 되고 모든 이성과 도덕적 절제를 잃게 되는, 말하자면 그가 "호전적 열광(militant enthusiasm)"이라고 일컫는 그런 경향을 왜 갖게 되었는가를 설명한다(pp.231__5). 이 호전적 열광은 우리의 선사 시대의 조상들의 집단적 방어 본능으로부터 진화해 온 것이다(p.232).

   

진단
 

"인간의 개념적 사고와 그것의 표출인 언어는 인간성을 위협하는 큰 위험들을 직접적으로 초래한다"(pp.204__5). 그러므로 개념적인 사고와 언어 행위가 우리의 타고난 능력 중 무엇보다도 큰 비중을 차지하는 축복이긴 하되, 매우 착잡한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다. 한편 인간은 육체적으로 매우 약한 잡식 동물인 것이다. 그는 큰 발톱, 부리, 혹은 이빨 따위를 갖고 있지 않으므로 서로 무기 없이 싸워 상대방을 죽인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유인원(ape__men) 사이에 일어나는 싸움은 그것을 멈추게 할 만큼 센 억제 메커니즘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진화적 요구가 없었던 것이다. 중무장된 육식 동물들은 그러한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으나(p.207), 다른 동물들은 그렇지 못하다. 이것이 왜 비둘기__바로 평화의 상징인__가 같은 새장에 갇혀 도망칠 수도 없는 다른 비둘기를 억제의 영향을 받지 않고 죽도록 쪼아대는가 하는 것을 설명해 준다. ('솔로몬 왕의 반지', p.184를 보라.) 그러나 문화의 발달, 그리고 기술의 발달로 말미암아 우리는 손에 인위적인 무기들__선사 시대의 조상들의 막대기와 돌에서부터 역사 시대의 활과 칼을 거쳐 오늘날의 총알과 폭탄에 이르기까지__을 쥘 수 있게 되었다.

 

죽일 수 있는 잠재 능력과 억제 사이의 균형은 깨어지게 된 것이다(p.207). 이리하여 로렌쯔는 어떻게 인간이 바로 자기의 종을 대량 살육할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일 수 있는가를 설명한다. 인간의 갈등을 통제하는 데 있어서 이성과 도덕적 책임감에 호소하는 것은 아다시피 대단히 비효과적인 것이었다. 로렌쯔는 이 사실을, 공격성은 우리들 내부에 생득적인 것이라는 그의 이론으로써 설명한다. 이 공격성은 프로이트적인 이드 안에 있는 본능과 같이 여하한 방식으로든 배출구를 찾아야만 한다. 이성은 혼자서는 무력하며, 단지 어떤 결정된 목표에 이르게 하는 수단을 딴 방식으로 고안해 낼 수 있을 뿐이고, 어떤 본능적인 동기에 의해서 뒷받침되고 있을 때만이 우리의 행동에 대한 통제를 행사할 수 있을 뿐이다(p.213). 그러므로, 프로이트와 같이 로렌쯔는 진화에 의해서 우리에게 뿌리 박힌 본능들과 문명 사회에 필요한 도덕적 억제 사이의 갈등을 본다.

 

그는 선사 시대 인간 집단에 있어서는 종족 내에서의 공격을 처벌하는 원시 도덕이 있었음에 틀림없다고 생각한다(pp.215__16). 왜냐하면 내부에서의 싸움이 일어난 어떠한 종족도, 다른 종족과의 경쟁에서 곧 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경쟁의 압력들은 다른 종족에 대한 공격 본능을 낳았다. 그리하여 우리의 무기 제작 기술은 그 무기를 서서히 사용하는 데 적절히 통제할 수 있는 우리의 본능을 훨씬 앞지르게 되고, 우리는 오늘날 우리가 세계를 멸망시킬 수 있는 힘과 어떤 상황에서는 그렇게 할 수도 있는 자발성(willingness), 이 양자를 지닌 채 매우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이다.

 

처방

 

만일 공격성이 정말로 우리의 내부에 있는 본유적인 것이라면, 인류에게 희망은 거의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우리는 단지 이성과 도덕에 호소하는 것만으로는 소용이 없음을 보아 왔고, 만일 우리가 공격을 유발시키는 모든 자극들을 근절시키고자 한다 해도, 내부의 충동은 여전히 배출구를 찾으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론적으로는, 우리는 의도적인 우생학적 인간 재생산 계획을 통해 그 본능을 개량해서 없애고자 노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도덕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가능하다 해도, 로렌쯔는 우리가 공격 충동이 전체로서의 인간의 성격을 형성하는 데 얼마만큼 본질적인가 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것은 전혀 권장할 만한 일이 못 된다고 생각한다(p.239). 만일 우리가 공격성을 근절시킨다면 우리는 동시에 인간이 성취한 많은 고도의 문명들을 멸망시키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로렌쯔는 마지막 장에서 낙관주의를 공언하고, "이성이 올바른 방향으로 도태의 압력을 행사할 수 있고, 또 할 것임"을 믿고 있다(p.258). 왜냐하면 우리가 우리의 공격의 자연적 원인들을 좀더 이해하면 할수록 우리는 그 방향을 좀더 수정하는 이성적 단계를 밟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각(자기__지식)은 구원에 이르는 첫 단계이다.(이것은 프로이트와 사르트르와 소크라테스의 또 하나의 반향이다!) 그 다음은 승화, 즉 공격 방향의 대상을 해롭지 않은 방식으로 교체하는 일이다(p.240). 우리는 분노를 표현하기 위해서 싼 도자기를 때려 부술 수도 있고, 집단간의 경쟁을 팀 게임으로 유도할 수 있다. 우리는 인간의 집단간의 불신을, 서로 다른 민족과 다른 계급과 다른 문화와 다른 당파에 속하는 개인들끼리의 인격적인 친선을 도모함으로써 불식시켜야 한다(pp.243__4). 그리고 우리는 진정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이랄 수 있는 커다란 목적들__예술과 과학과 의학__에 우리의 정열을 돌리도록 수정해야만 한다(pp.244__9).

 

마지막으로, 로렌쯔는 우정을 촉진하며, 기만을 부수고, 이성적 통제를 벗어나지 않고 긴장을 해소시켜 주는 인간의 유머 감각에 커다란 신뢰를 보야 준다. 그러므로 유머와 지식은 문명에 있어서의 두 커다란 희망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는, 미래의 세계에는 우리의 공격 충동들이 그 본질적인 가능의 훼손 없이 적정 수준까지 감소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안고 있다.(pp.257__8).

   

비판적 논의
 

로렌쯔의 이론은 설득력이 있다. 왜냐하면 그는 프로이트의 통찰력과 스키너의 과학적 엄격성을 결합시키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의 이론과 인간 진단에 관해서 중대한 의문이 제기된다. 우리가 동물 행동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가가 되지 않는 한, 우리는 로렌쯔의 세부적인 이론들을 논의할 만한 자격이 없다. 그의 어떤 종에 관한 사실적 주장들 중 얼마간은__예를 들어 쥐의 "참혹한 대량 전쟁" 같은 것(pp.xi, 139)__논박되었다. 여기서 물론 우리는 확증된 사실들을 필요로 한다. 우리가 실제로 경험하지 않고도 논의할 수 있는 것은, 행동을 설명하기 위해서 본능 혹은 내적 충동을 가정하는 그의 방법론이다. 우리는 이것이 프로이트의 이론들 중 가장 취약한 부분임을 발견했지만, 우리는 이러한 가정을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스키너와도 동의할 수 없었다. 로렌쯔는 이 양극단 가운데서 옳은 중도의 길을 찾아낸 것인가? 결정적인 문제는 그의 충동과 본능에 대한 개념의 적용이 관찰과 실험에 의해서 반증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특정한 종에 있어서의 특수한 고정된 행동 패턴__찌르레기가 파리를 잡는 행동 같은 것__을 설명하기 위해서 어떤 충동을 가정했을 때는, 그 가설에 대한 명확한 검증이 있을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일정한 행동 패턴이 생득적임을 우리가 설정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종에 속하는 적당한 나이와 성별의 보통 개체들 모두가 다른 개체에게서나 혹은 시행 착오에서 미리 배우지 않고도 그 일정한 행동을 수행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또한 우리가, 보통 행동을 일으키는 자극이 항상 같은 효과를 가지고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짝을 짓는 행동은 계절에 따라 변화한다)을 알고 또한 행동은 때때로 보통 때보다도 작은 자극에 의해서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새장 구석을 향해 구애하는 혼자된 비둘기처럼)을 알아 냈을 때, 거기에는 그 강도에 따라 변화하는 어떤 내적인 충동적 요소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그러므로 특별히 고정된 행동 패턴에는 다양성 있는 충동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검증될 수 있다.

 

그러나 로렌쯔의 방법론에 있어서 보다 의심스러운 것은 이러한 "작은 세부적 충동들"은 종종 "네 개의 주요 충동(먹이, 생식, 탈출, 그리고 공격)" 중의 하나 혹은 그 이상의 것들에 좌우된다는 견해이다(pp.74__6). 그는, "자기 견제기능 (self__containefunction)l"은 단 한 개의 충동의 결과가 아니라고 주장하고(p.73), 공격은 충동적인 힘 중의 하나로서 이 충동적인 힘들은, 공격과 아무런 관계도 없고 겉으로는, 공격과는 반대로 보이기까지 하는 행동 패턴들의 배후에 자리 잡고 있다고 말한다(p.35). 겉으로 보아서 이런 주장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종류의 행동을 공격에다 귀속시키도록 하여, 이러한 귀속은 검증할 수도 없고, 비과학적인 것으로 돌려 버릴 수 있게끔 한다. (이것은 정확히 프로이트의 "반동 형성(reaction formation)"__이 반동 형성에 의해서 내부적 성향이 그 반대되는 행동으로 표현될 수 있다__과 유사하다.)

 

기본적인 충동들과 그 충동들의 혼합, 그리고 충동들의 서로 다른 행동으로의 전환들에 관한 이러한 이야기를 검증하는 방식들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검증 가능성이 나타날 때까지는, 이러한 이론화는 과학적이 못 된다. 그리고 그 검증이 확증을 주지 않는 한, 그것이 옳다고 뒷받침해 줄 근거가 없는 것이다. 일반 이론에 관한 이러한 방법론적인 물음을 떠나서, 로렌쯔가 동물에서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 논의한 방식에도 상당한 의문이 어절 수 없이 따른다. (이것은 또한 스키너의 주요 결함이다.) '공격에 대해서'에서 로렌쯔는 그의 대부분의 실패들을 물고기와 새들, 그리고 포유 동물 약간에서 얻어 왔으며, 우리와 가장 가까운 친족인 큰 원숭이는 거의 다루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유추에 의해서, 물고기와 새들이 선천적으로 공격적이라면, 인간 행동도 마찬가지 기본 법칙에 종속된다고 논의하고자 한다(p.204).

 

이 유추는 분명히 약점을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되어야 한다. 그가 최근의 연구가인 제인 반 라윅 구달처럼 (그녀의 '인간의 그림자 속에서'를 볼 것), 침팬지와 고릴라에 대해 세밀한 연구를 했다면, 그의 이론은 좀더 튼튼한 것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보다 가까운 친족인 침팬지와 고릴라에 대한 증거조차도, 우리에게 인간의 본질을 밝혀 주기에는__모리스 같은 인기 작가들이 우리에게 그렇게 믿게 하려고 하지만__매우 부족하다. 왜냐하면 인간과 다른 동물들 사이의 차이점도 그 유사점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체로, X가 Y에서 진화했다는 주장은 X가 Y라든가 혹은 Y에 불과하다든가 혹은 본질적으로 Y다라는 것을 말해 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지역 분쟁(가령, 울스터에서 있은)이 유인원(ape__men)종족들의 지역적 방어 메커니즘으로부터 진화되었다는 것이 설명될 수 있다 해도, 이것이 여전히 전자가 후자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을 설명해 주지 않는다.

 

어떻든 간에, 적대적인 종족들간의 경쟁이 이러이러한 것이었을 것이라는 로렌쯔의 가설과 같은, 선사 시대의 인간의 행동에 관한 어떠한 이론들도 매우 사변적이며, 그 이론들에 부합 혹은 반대되는 증거를 우리가 어떻게 발견할 수 있을지는 알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본질에 관한 로렌쯔 이론의 결정적인 면__즉, 타고난 공격성에 관한 사상__에서도 이러한 의문들이 제기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동물로부터의 유추가 이를 입증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의 사상을 검증하기 위해서 인간 행동을 직접 관찰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수준에서는, 로렌쯔는 인류학자도 아니고 사회학자도 아닌 여타의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아마추어이다. 우리는 그의 사변적인 이론 말고 사실들에 주목해야 한다. 인류학자들은 공격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뚜렷한 몇몇 사회들을 기술하여 왔다.

 

('인간과 공격'에 있는 논문들 몇 가지를 볼 것.) 이 사실은 공격성이 선천적이라기보다는 사회적으로 습득되어진 것이라는 것을 제시해 주는 것이리라. 현대 산업 사회에서는, 공공연한 폭력이 다소 사회적 배경에 따라서 변화하는 것 같다. 의심할 여지없이 중산 계급의 경제적 쟁투는 노동자 계급의 패싸움과 꼭 마찬가지로 "공격적"임이라고 말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그 용어는 폭력이나 그 위협 이상의 것을 포괄하는 것으로 확장되는 것이다. 용어의 보다 명확한 규정은 더 깊은 탐구를 위한 필수 조건이다. 그리고 그 탐구는 적어도 생태학적인 것만큼은 사회학적인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로렌쯔의 인간 이론을 그의 동물 관찰로부터의 사변적인 일반화로써 판단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인간 이론은 우리에게 인간 본질의 연구에 있어서 참으로 중요한 영역을 가리켜 주고 있는 것이다.

   

보충 참고 문헌

 

기초 텍스트:'공격에 대해서(On Aggression)', Marjorie Latzke역(Methuen, London,
대학 문본, 1966), Marjorie K. Wilson역(Bantam Books 문고, New York).

로렌쯔의 '동물과 인간 행동의 연구(Studies in Animal and Human
Behaviour)'(Methuen, London, 1970과 1971; Harvard 대학 출판부, Cambridge, Mass.,
1970과 1971)

 

두 권은 그의 동물 행동학 연구와 그 기저에 있는 과학 철학에 관해 더욱 세부적인 것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위의 책보다 더 기술적이긴 하지만, 이 책들은 과학이나 동물 행동학에 대한 사전 지식 없이 읽을 수 있는 것이다. 로렌쯔와 다른 동물 행동학 저술가들에 대한 비판으로는, M. F. Ashley Mantagu 편집의 '인간과 공격(Man and Aggression)'(Oxford 대학 출판부, Galaxy Books 문고, New York, 2nd edn., 1973)을 볼 것. 다윈의 진화론에 대해서는 펠리칸 고전(Pelican Classics 1968)과 Mentor 문고로 재출판된 '종의 기원(Origin of Species)'(New American Library, New York)을 볼 것. 이 장의 페이지 참조는 '공격에 대해서(Pn Aggression)'의 Methuen판에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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