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문재<시학의 변주>, 서정시학, 2007.
차례
제1부
현재의 시학 ―마종기의 『우리는 서로 부르고 있는 것일까』론
기억의 시학 ―김사인의 『가만히 좋아하는』론
길의 시학 ―허형만, 김백겸, 윤은경의 시
얼굴의 시학 ―정한용의 『흰꽃』론
경계의 시학 ―김종옥의 시
구어체의 시학 ―이정록의 『의자』론
구체어의 시학 ― 이윤학, 반칠환의 시
형식의 시학
동심의 시학
제2부
나비와 광장의 시학 ―김규동의 시
님의 시학 ―하종오의 『님 시집』론
실재의 시학 ―최종천의 『나의 밥그릇이 빛난다』론
‘반쪼가리’ 시학 ―유홍준의 『나는, 웃는다』론
민족문학의 시학
진폐의 시학
노동의 시학
제3부
시름의 시학 ―김달진의 「寺村」론
성정과 이치의 시학 ―한정원의 『낮잠 속의 롤러코스터』론
자기애의 시학 ―장승기의 『아내의 잠』론
관계의 시학 ―김월수의 『그와 나의 파도타기』론
꽃의 시학 ―손한옥, 권영옥, 이혜민의 시
활원의 시학 ―박희철의 『천년을 서서 오는 바람』론
제4부
시어의 시학 ―박인환의 시
인식의 시학 ―박이문의 시
시장의 시학 ―김종미의 시
2635세대의 시학
사회적 상상력의 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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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재의 시학
―최종천의 『나의 밥그릇이 빛난다』(창비, 2007)론
1
‘실재’는 최종천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나의 밥그릇이 빛난다』에서 ‘상징’과 대척점을 이루면서 시세계의 토대이자 주제가 되고 있다. 이는 시인이 이 세계와 그 속에 존재하는 자신을 적극적으로 성찰한 결과로, 자신이 노동계급과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는 인식의 증표이자 그만의 세계관을 보여주는 증거다. 이 ‘실재’는 사회적 존재로서 시인이 수용한 가치이자 규범이고, 생활의 이치를 담고 있는 나침반이며, 인생을 꾸려가는 터전이기도 하다.
이러한 실재 인식이 어디에서 연유하는지 차분히 해명하는 것이 숙제가 되겠지만, 일단 서구철학에서 말하는 실재론이나 라깡 정신분석학의 삼분법을 빌려 이해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실재는 관념과 대립되는 것으로, 관념론이 정신적 존재를 본원의 것으로 보고 물질적 존재를 그 현상으로 보는 것에 비해, 실재론은 인간의 의식에서 독립된 객관적 존재를 인정하고, 그것을 인식의 기준으로 삼는다. 주관적 추상이 아닌 객관적 실체(존재)야말로 보편적 개념이라고 보는 것이다.
또한 라깡의 개념으로도 그 실재를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인간의 의식세계를 이루는 축으로 상상계와 상징계, 그리고 실재계를 설정했다. 상상계는 아이가 태어난 지 6~18개월 사이에 형성되며,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이상적인 자아로 갖는다. 이에 비해 상징계는 언어와 상징적 기호가 지배하는 것으로 인간의 무의식적 활동을 규율하는 규범이나 법이다. 상상계란 상징계와 함께 기능하며, 갈등을 일으키는 타자로 존재한다. 실재계란 이와 같은 상상계와 상징계를 연결해주는 영역이다. 보로메오의 매듭(Borromean Knot)처럼 이 셋은 하나로 묶여야만 정상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 만약 상징계 속에 있으면서 상상계에만 빠지면 정신병이 되고, 상상계라는 타자를 모르면 도착증이 된다. 정신병에서는 억압을 모르는 배제가, 도착증에서는 파시즘이 나타난다. 인간은 상징계 속에서 살아가면서 상상계라는 타자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환기하는 고리가 바로 실재계이다. 충동과 타자를 이어주고, 죽음 충동을 삶 충동으로 바꾸어주는 것이다.
시인은 이와 같은 실재에 대한 인식을 통해 상징을 비판한다. 상징으로 표상되는 관념과 추상과 형식주의를, 그것을 지향하는 예술을, 그리고 그것을 공고히 하는 이 세계의 가치기준을 허구라고 비판한다. 또한 시인은 실재를 강조하고 그 가치와 필요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상징과 대립시키고 있다. 그에게 실재가 긍정적인 대상이라면 상징은 부정적인 대상이다. 실재가 밥이나 빵과 결합된 것인 데 반해 상징은 예술이나 철학의 관념과 결합된 것이다. 실재가 가난과 상처와 노동과 결합된 것인 데 반해 상징은 풍요와 안온과 비노동 혹은 반노동과 결합된 것이다.
최종천 시인은 왜 상징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상징이라는 개념 자체나 그 의의를 부정해서가 아니라 오늘날 횡행하는 세계인식과 예술인식이 관념, 추상, 형식 등에 과도하게 기울었다고 진단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예술이나 문학은 인간다운 삶의 실현에 기여해야 하는 것인데, 상징에 지나치게 함몰되어 제 역할을 못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인에게 상징은 허상일 뿐이다. 상징은 심오함이 아니라 현실의 회피이고, 미학이 아니라 실재의 의도적 오류이며, 대상을 환기시키는 것이 아니라 명확한 명제를 포기하는 것이고, 풍부한 의미를 제공해주는 에너지가 아니라 허구의 수단일 뿐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상징을 위한 상징을 추구하거나 거기에 함몰된 예술과 계급을 단호하게 비판한다.
그렇다면 시인이 내세우는 실재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자신의 삶이 영위되는 일상이고, 일상의 구성원으로서 존재하는 사람들이다. 시인은 그 실재를 이루는 토대로써 노동을 이야기한다. 노동이야말로 실재의 바탕이고 철학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최종천의 시는 새로운 노동시, 즉 노동시의 가치를 관념이 아니라 실재의 차원으로 인식해, 노동시의 기반을 한층 다지면서 영역을 확장시켰다고 볼 수 있다.
나의 손은 눈이 멀었다
망치를 쥐어잡기보다는
부드러운 무엇을 원하다
강요된 노동에 완고해지며
대책없이 늙어가는 손
감각의 입구였던 열 개의 손가락은
자판 위를 누비며
회색의 언어들을 쏟아내고 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뚜렷하게 보여주던
손의 시력은 도수 높은 안경을 끼고 있다
열 개의 손가락에서 노동은 시들어버렸다
열 개의 열려 있는 입을 나는 주체할 수가 없다
모든 필요를 만들어내던 손
인간의 유일한 실재인 노동보다
입에서 쏟아지는 허구가 힘이 되고 권력이 된다니
나의 손은 이제
실재의 아무것도 만들지 않으며
허구조작에 전념하고 있다
나는 노동을 잃어버리고
허구가 되어간다
상징이 되어간다
―「가엾은 내 손」 전문
시인은 ‘상징’이란 “눈이 멀”게 된 것으로, “부드러운 무엇을 원하”고, “대책없이 늙어가는 손”으로, “회색의 언어들을 쏟아내”며 노동이 시들어버린 것으로, “열려 있는 입을 (…) 주체할 수가 없”는 것으로, 그리고 “허구조작에 전념하고 있”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에 반해 ‘실재’란 “망치를 쥐어잡”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모든 필요를 만들어내던 손”으로, “인간의 유일한 실재인 노동”으로 인식하고 있다. 시인은 ‘상징’과 대비하면서 ‘실재’를 옹호하는데, 이 모습이 단순한 이분법이나 일방적인 분류가 아니라 자기성찰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진정성이 느껴진다. 시의 화자는 잃어버린 노동을 외부 환경의 탓으로 돌리기보다 자신의 책임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리하여 시인은 ‘실재’와 ‘노동’을 임의관계가 아니라 결합관계로 바라본다. 피상적인 관찰을 넘어 그 사태(실재와 노동의 관계)를 간파함으로써 자신의 인식을 다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면모는 ‘노동’에 대한 시인의 애증이 매우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다. ‘노동’을, 먹여살려야 할 식구나 사귀어야 할 동지처럼 여기고 있는 것이다.
‘상징’이 지배하는 시대에 ‘노동’을 옹호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상징’이 요구하는 바를 민첩하게 파악해 적당히 타협하며 순응하기를 거부하고 주체성을 일관되게 지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도 이처럼 행동하는 것은 시인이 ‘상징’의 허구성을 간파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징’과 타협하면 결국 자아를 상실한 채 허우적거린다는 사실을 뼈저린 체험을 통해 자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 체험이 바로 ‘노동’이다. 시인은 ‘노동’을 저버리면 저버릴수록 진정한 자아를 상실하고 ‘허구’가 된다는 것을 체득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어떠한 타협도 계산도 없이 ‘노동’의 손을 잡고 있는 것이다.
삼풍백화점이 주저앉았을 때
어떤 사람 하나는
종이를 먹으며 배고픔을 견디었다고 했다
만에 하나 그가
예술에 매혹되어 있었다면
그리고 그에게 한권의 시집이 있었다면
그는 죽었을 것이다
그는 끝까지 시집 종이를 먹지 않았을 것이다
시의 의미를 되새김질하면서
서서히 미라가 되었을 것이다
그 자신 하나의 상징물이 되었을 것이다
―「상징은 배고프다」 전문
시인의 적극적인 실재 인식은 ‘상징’에 대한 극단적인 비판으로 나타난다. 가느다란 삶의 끈을 잡고 있는 생과 사의 경지에서 ‘상징’은 부질없는 것이다. 여기서 “삼풍백화점이 주저앉았을 때” “종이를 먹으며 배고픔을 견디”어낸 사람과, “예술에 매혹되어” “시집 종이를 먹지 않”고 “시의 의미를 되새김질하면서/서서히 미라가 되”어간 사람의 경우는 비교할 거리가 되지 못한다. 그럼에도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징’은 점점 더 옹호되고 생산된다. ‘예술’에 의해 찬미되고 전파되고 소비되고 있다. 아무리 먹어도 “상징은 배고”픈 상황이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비만에 불만을 표하지 말자」)라는 캐치프레이즈가 여실히 증거하듯이 ‘상징’은 점점 대량으로 생산되고 복잡하게 유통되고 과도하게 소비된다. 소비자의 욕구와 욕망을 철저히 파악해 거대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징의 비만화’에 반비례해 터무니없이 위축된 실재의 세계, 이것이 시인의 눈에 비친 오늘의 모습이다. 소비자들은 자동차를 생산한 노동자보다 자동차란 상징에 관심을 쏟는다. 또한 자동차란 실체가 아니라 자동차란 이미지를, 자동차란 대상이 아니라 자동차란 기호를, 자동차란 물건이 아니라 자동차란 이데올로기를 구매한다. 그리고 그 상징에 만족하고 감동한다. 그것으로 세계를 인식하고 자신의 능력을 평가하고 자신의 위치를 정립한다. 이런 이유에서 시인은 예술로 표상되는 ‘상징’ 앞에서 더이상 물러서지 않고 “모든 예술은 사기”(「화곡역 청소부의 한달 월급에 대하여」)라고 비판한다. 상징의 공세 속에서 실재를 방어하고 그 가치를 지향하는 것이다.
헤겔전집을 읽을 때 베토벤을 들을 때
나는 의미를 소비하고
의미는 나를 소비한다
의미에 나를 담아두고
어언 십년이 지나는 동안
나는 나를 팔아먹고 비어 있다
의미를 소비하지 못하는 인간
그를 우리는 무식한
문화를 모르는 인간이라고 한다
자신을 상징으로 만들지 못하는 인간은
적어도 천재는 아니다
천재가 이 지상에서 한 일이라고는
모순을 한층 치밀하고 정교하게 만든 것이다
덕분에 우리는 오류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예수의 상징에 절하는 사람들
헤겔의 상징에 머리를 싸맨 사람들
베토벤의 상징으로 귀를 막아버린 사람들
헤겔전집 속에는
헤겔이 소비한 헤겔이
문자로 분해되어 있다
그를 만나기 위해선 모든 문자들을 조립해
만질 수 있는 그 무엇으로 만들어야 한다
불가능한 시행착오의 쓰레기 속에서
얼마나 많은 인간들이
실재인 자신을 버리고 허구를 살고 있는가
―「나는 소비된다」 전문
헤겔의 관념론을 비판하면서 시인만의 ‘실재’론의 단초를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한데, 그야말로 ‘예술’의 허구성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시인이 이러한 태도를 취하는 이유는 작품 제목에서도 나타나듯 ‘예술’이 오직 소비의 대상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예술’이 생산적인 것이 되지 못하고 소비를 위한 소비의 대상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판단은 생산과 소비를 증식하는 시장의 속성을 인식했기보다 그 시장의 소용돌이에 빠진 주체성의 문제를 인식한 것이기에 의의를 갖는다. 다시 말해 “헤겔 전집을 읽을 때 베토벤을 들을 때/나는 의미를 소비하고” 있을 뿐 생산하지 못하는데, 단순히 시장성의 문제만이 아니라 그것들이 추구하는 사상이 무엇인지, 그것들이 어떤 사회적 가치를 갖는지를 주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음을 자각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주인이 되어 예술과 주체적으로 관계해야 하건만, 엄청난 ‘상징’에, 즉 명성과 지식과 교양과 정보라는 시장성에 주눅들어 복종만 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예술의 명성이라는 것은 그것을 옹호하는 자들이 만들어놓은 관습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아울러 “의미를 소비하지 못하는 인간/그를 우리는 무식한/문화를 모르는 인간이라”는 사회적 편견에 갇혀 “어언 십년이 지나는 동안/나는 나를 팔아먹고 비어 있”을 뿐이라고 토로한다. 상징 옹호자들에 순응해온 자신을 참회하는 심정으로 “천재가 이 지상에서 한 일이라고는/모순을 한층 치밀하고 정교하게 만든 것”뿐이고, “덕분에 우리는 오류를 즐길 수 있게 되었”을 뿐이라고 비판까지 한다. 언뜻 이 평가를 ‘예술’을 극단적으로 폄하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시집 전체를 놓고 보면 비만화된 예술과 상징에 표하는 일종의 거부이자 부정임을 알 수 있다. “예수의 상징에 절하는 사람들/헤겔의 상징에 머리를 싸맨 사람들/베토벤의 상징으로 귀를 막아버린 사람들”처럼 주체성을 상실한 채 굴복하는 현상을 비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압도적인 상징 우위의 세계에서 시인이 내세우는 대안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실재인 자신을 버리고 허구를 살고 있는” 현실을 극복하는 일, 곧 자신의 주체성을 회복하는 일이다. 다시 말해 “그를 만나기 위해선 모든 문자들을 조립해/만질 수 있는 그 무엇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처럼, 생산에 기여하는 노동을 추구하는 일이다.
이 점에서 최종천 시인의 시는 새로운 노동시라고 볼 수 있다. 기존의 노동시가 추구한 노동해방이라는 구호를 넘어서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그러한 구호 역시 관념이 앞선 것이라고, 진정한 생산에 기여하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노동의 문제를 ‘실재’의 차원에 놓고, 그것의 가치가 훼손되고 위협받는 것을 방어하고 경계하기 위해 탐구한다. 현상적인 계급문제보다도 노동의 가치를 위협하는 그 어떤 이념이나 제도나 윤리나 습관에 근본적으로 대항하고 있는 것이다.
올해 문화예술위원회에서 주겠다는
지원비가 드디어 한달에 100만원씩
1200만원으로 올랐다, 용렬하게
이 몸도 신청했다, 문득 화곡역 청소부에게
한달 월급이 얼마나 되느냐고
왜 물어보고 싶었을까?
63만원이라고 했다.
시집도 내고 목돈으로 1200만원이나 벌었으니
행복은 역시 능력있는 사람의
권리지 의무가 아니라고
누군가는 생각할 것이다, 솔직히
배때지가 꼴린다, 내가 못 받았기 때문이다
“모든 예술은 사기다.”
백남준의 이 말은 은유도 비유도 아니다
예술은 부를 창출하는 게 아니다, 그 청소부는
얼마나 많은 부를 창출하고도 그것밖에 가지지 못하나
예술은 허구를 조작하는 것이다.
이 사실을 자각하는 시인만이 시인이라고
단언하기는 그렇지만, 시인들이여
행복은 권리라고 생각하지 마라, 그렇다면 그대는
시인은 못되리라, 행복은 누구나의 의무다
우리의 행복함은 곧 우리가 선함이요
우리의 불행은 우리가 악하기 때문이라
이러한 행복과 불행의 원리는,
화곡전철역에서 하루종일 허리 구부리고 청소하시는
아주머니의 월급이 63만원밖에
안되기 때문이다.
―「화곡역 청소부의 한달 월급에 대하여」 전문
최종천 시인의 실재에 대한 인식이 노동계급을 통해 구체화되는 모습을 여실하게 보여주는 시다. 시인은 인간적인 관점으로, 즉 배제가 아니라 포용의 원리로 노동계급을 품는데, 이는 자신이 노동자라는 사실에 의지해서가 아니라 노동자다운 세계관에 따른 것이다. 이런 측면은 「시인의 말」에서도 잘 나타난다. “노동계급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사제(司祭)”이고 “노동계급의 사상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고 그는 믿는다. 노동계급이야말로 절대적인 실재인만큼 그들의 사상은 인간다운 삶의 형성에 필요한 철학이고 종교라고 보는 시인의 세계관은, “행복과 불행의 원리는,/화곡전철역에서 하루종일 허리 구부리고 청소하시는/아주머니의 월급이 63만원밖에/안되기 때문”이라고 진단하는 데서 한층 명확해진다. 모든 행복과 불행의 토대는 인간의 노동에 대한 댓가에 영향받는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화곡역 청소부가 월급을 ‘63만원’이 아니라, ‘문화예술위원회’가 ‘시인’들에게 창작지원금으로 주는 ‘1200만원’과 비교해서 제대로 받을 때, 행복과 불행의 원리가 통합된다고 생각한다.
이같은 주장은 공정한 사회적 분배를 내포하고 있기에 노동시의 가치를 지닌다. “모든 예술은 사기”이고 “예술은 부를 창출하는 게 아니”라고, 예술의 비생산성을 비판하면서 노동의 가치를 강조하는 것이다. 시인이 생각하기에 ‘시인’이란 이러한 가치를 인식하고 실행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진정한 시 쓰기 혹은 진정한 시인의 자화상이란 노동계급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 즉 노동시란 노동계급을 상징으로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를 형상화하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노동이라는 실재를 관념화해서는 진정성을 상실한다고 믿는 것이다.
최종천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노동의 관념성을 극복하고 실재를 인식하는 결실을 보여주었다. 노동현실을 소박하게 묘사하거나 관념적으로 외친 것이 아니라 깊은 성찰을 통해 인식했다. 그리하여 실재가 높아지고 상징이 낮아졌으며, 노동이 높아지고 예술이 낮아졌다. 실재는 좀더 보충되고 종합되고 창조되어 상징과 대등하게 되었다. 용기 있는 인식으로써 노동시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인간성 회복에 한층 기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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