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과 칼럼

멀티라이프(Multi Life)와 시의 스크린(Screen)

미송 2011. 4. 10. 17:45

 

 

【웹진 시인광장 Webzine Poetsplaza S
INCE 2006
2011년 1월호(2010, January
)

 

 

 신경미학은 인간의 미적경험을 신경학적 수준에서 이해하고 신경과학적 기술로 분석하는 경험미학의 한 분야이다. 런던대학에 신경미학원( The Insitute of Nueroesthetics)을 설립한 세미르 제키(Semir Zeki)에 개척되었다. 이 분야는 추상미술에서의 자기표현과 신경기능사이의 시각적 유사성을 연구한다. 추상은 구체적 대상의 표현에서 본질적인 구도나 양상만을 표현할 뿐 나머지 부수적인 표현을 생략한다. 사물의 주요특성만 보겠다는 태도이다. 우리 뇌도 이런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한다. 사물의 세부 정보를 모두 파악해 이해의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시간과 에너지 소모가 많다. 시 지각을 담당하는 뇌는 대상의 특징만 이미지로 저장했다가 다른 대상의 차이와 같은 방식으로 비교하는데 과감한 생략을 사용한다. 이 과정에서 정보의 요약과 대조가 일어나는 시물레이션(Simulation)이 의미작용과 관련하여 인간에게 쾌락과 심미를 주는 것 같다. 신경미학자들은 화가의 표현이 인간에게 심미를 준다면 뇌신경 회로의 최적화가 이루어진 프로그램과 같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예술과 사유의 표현은 신경회로가 작동하는 기전의 외부표현이다. 그래서 거꾸로 예술작품과 문화의 표현을 연구하면 인간의 뇌 구조와 작동방식을 분석할 수 있다고 본다. 시란 사유와 언어의 추상이 결합한 결과이다. 신경미학은 시인의 뇌에서 일어난 지각과 추상이미지들의 결합을 뉴런의 결합과 매트릭스로 표현한다.

   

 

 1. 공광규

 

  파혼 

 

  작년엔 홍매 아래서

  붉은 얼굴이 다정했고요

 

  올해는 청매가 환해

  흰 이마가 아름다웠어요

 

  봄바람에 매화 흩날리기 전

  당신을 파혼시키러 가겠습니다

 

  이런 일도 먼 후일엔

 

  매화나무 가지 사이로 지나는

  한 점 눈발이겠지요.

 

(계간 『문학청춘』 2010년 가을호) 

 

요즈음 광광규는 시가 길어지는 추세에 역행해서 짧은 시로 승부한다. 짧은 시에는 긴 배후의 이야기가 생략되어야 하기에 연과 연 사이 비약이 있어야 아름답다. ‘매화’로 표현한 시의 ‘당신’은 여러 원관념(本義)이 가능하다. 독자는 자신의 체험에 맞추어 ‘매화’를 감상하면 되겠다. 이 시는 시간의 경과가 드러나는 이미지들이 물 흐르듯이 드러난다. “작년의 홍매”와 “올해의 청매”가 제시되고 “먼 후일”에 “한 점 눈발”로 그려진 인생의 퀼트(quilt)를 보여준다  사랑과 아름다움과 약혼과 파혼의 가슴앓이도 모두 시긴의 무늬라는 인생의 영고성쇠가 주제이다.  기승전결의 구조가  한시(漢詩)를 연상하게 한다.

 

 

 

 2. 박준

 

 

  태백중앙병원                                         

  

  태백중앙병원의 환자들은 더 아프게 죽는다

  아버지는 죽어서 밤이 되었을 것이다

  자정은,

  선탄(選炭)작업을 마친 둘째형이 돌아오던 시간이다

  미닫이문을 열고 드러내보이던 형의 누런 이빨

  같은 별들이 환히 켜지는 시간이다

 

  (웹진 『시인광장』 2010년 8월호)

 

 

지난 호에도 얘기했지만 리얼리즘 시도 이미지들이 미학적이면 현실의 아픔은 동양화의 배경으로 물러난다. 드러나는 것은 아버지가 죽어서 변한 “밤”과 “형의 누런 이빨”같은 “별”이다. “밤”과 “별”에 시선을 두고 이 시를 읽는지 “태백중앙병원의 환자”와 “선탄(選炭)작업”에 의미의 무게를 두고 읽는지에 따라 독자의 세계관이 드러난다. 전자가 로맨티스트라면 후자는 리얼리스트인데 작가인 박준은 어디에 방점을 두었을까.  

 

 

 

 3. 김유석

 

  

  회廻                                               

 

  복사꽃 만장輓章을 세우고 여든 번째 봄 사행蛇行으로 들러 가네.

  마을에서 뒷산 사이, 몸에 두르고 헤메던 길 뱀 허물처럼 벗겨지네.

  바늘땀 없는 옷을 입은 나비 종이로 접은 꽃 위에 앉아 떠나네.

  소 모는 노인은 못 듣고 소에게만 들리는 나른한 요령소리

  노자路資를 꽂은 새끼줄에 붉은 고추 매달던 문간 금줄이 겹치네.

  아기 울음을 내며 떨어지는 복사꽃들   

 

  (계간 『시와 경계』 2010년 가을호 발표)

 

 

김유석은 상여가 있는 장례행렬의 시로 그림을 그려냈다.  이미지들이 “복사꽃”처럼 만발한 ‘시나무’ 한그루가 서 있는 것 같다. 이 시도 망자의 탄생과 죽음이 같이 오버랩되면서 입체적인 플롯을 보여준다. 짧은 시에 압축한 한 일생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언뜻 보면 각각의 이미지들이 따로 노는 느낌도 있다. 시적이미지에 훈련이 된 사람들에게만 보이는 이런 의미 구조를 작가는 시인은 공들여 배치했다. 시가 단단한 구조(構造)의 산물이 아닌 시정신의 질주여야 한다는  들뢰즈가 제기가 있다. 들뢰즈는 언어의 ‘구조’대신 느슨한 ‘배치’라는 말을 사용했다. 도시의 성곽처럼 잘 설계된 시의 구조는 시의미를 정적인 형태로 가둘 수 있다. 건축공학적인 설계미를 즐길 수 있지만 야생마처럼 달려나가는 시의 생명력은 반대로 감소한다.    

 

 

 

 4. 문태준

 

 

 구순의 입과 입술에는  

 

  내 옆집 구순九旬의 입과 입술에는 작은 언덕이 하나 느릿느릿 움직여갔습니다

  구붓하게 걸어갈 때 큰 귀가 풀잎처럼 떠 있었습니다

  숨이 가쁘고 지난 해 풀벌레 소리가 났습니다

  가끔 어떤 속말에는 잔물결처럼 웃고 이내 허물어지듯

  손을 내저었습니다

  앉아도 꽤 여럿이 앉을 긴 의자에 혼자 앉았습니다

  흐릿한 빛이 지나가는지 슬며시 눈을 감았다 떴습니다

  두어 번 물어도 그렇지, 그러지, 라고만 나직이 말했습니다

  구순의 입과 입술에는 저 먼 계곡처럼 무른 구름더미가

   가득하였습니다     

 

   (계간 『문학과 창작』 2010년 가을호 )

 

문태준은 구십대의 노인의 모습과 생각을 구름과 계곡이 아득한 진경산수화처럼 그려냈다. 인생의 영욕을 놓아버린 망아(忘我)와 탈속(脫俗)처럼 노인은 다른 세계에 있는 것 같다. 현실의 노인은 아마 몸과 마음이 무너져 있는 고달프고 어려운 생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시인의 시선이 별서유거(別墅幽居)에 있는 거사(居士)나 신선처럼 구순(九旬)의 노인을 바라보고 있다. 사물은 작가가 보고자 하는 대로 보인다. 시인의 정취(情趣)가 유현(幽玄)에 가 있어서 이런 시가 만들어졌다.

 

 

 

 5. 김신용

 

 

로즈 버드 1

로즈 버드···· 장미꽃봉오리···· 작고 사소한 것의 가치라는 뜻····

작고 사소한 것의 가치라니···· 언제 그런 것에도 의미가 있었나? 싶으면서도····

마당가에 핀···· 장미의 넝쿨 앞에 자주 선다···· 채 피지 않은····초경의 젖몽우리처럼···· 이제 갓 망울지기 시작하는 것들을 보면···· 이 가슴 환한 두근거림이 어디서 오는지 알 것 같아····

로즈 버드···· 하찮은 쓸모없는 것들의 가치를 상징하는···· 저 장미꽃봉오리를···· 쓰레기통에 버려진···· 온갖 것들을 살아있게 하는···· 정크 아트 같다고 해야 하나····돌의 연금술 같다고해야 하나····

 

그러나 오오, 저런 집어등들이 있나···· 새로운 세계를 향해 열린 호기심들이···· 동경이···· 자석처럼 빨아들이는····

색깔들은 벌써 붉어···· 자신만의 독특한 향기까지 머금고 있어····저렇게 삶이 아름다워 보이던 때가 언제였을까····

별을 잃어버린 지 이미 오래인 내 부박한 생활에서도···· 아무렇게나 열린 앞섶의 단추를 매만지게 하는····

이제 갓 망울지기 시작하는 장미꽃봉오리···· 로즈 버드····

그래, 물건이란 제 각각의 생명을 지니고 있어서····

영혼이라는 것을 깨우기만 하면 된다····*

 

오오, 저런 가슴 두근거림이 있나···· 울타리를 낮게 포복해가는 장미의 넝쿨이 집요하게 움켜쥐고 있는····

 저 집어등!

 

*마르께스의 『백년의 고독』에서

 

(계간 『애지』 2010년 봄호)

 

 

김신용은 장미 속에 내재한 생명력의 찬가를 노래했다.  장미를 “집어등”으로 보는 시인이 시각이 매우 감각적이다. “로즈 버드”(Rose bird)란 제목도 조어이지만 은유효과가 있다. ‘장미’는 과거부터 현재까지 시인들이 사용하는 주요 상징어이다. 요새 젊은 시인들이 많이 사용하는 ‘고양이’ 만큼이나 시인들의 상상력을 끌어당기는 단어이다. 수많은 시인들이 사용한 언어라 왠 만큼 참신해서는 낡고 진부한 비유를 면치 못한다. “정크 아트”와 “돌의 연금술”같은 이미지룰 끌어와 장미를 낯설게 보이게 하는데 성공했다. 단순히 낯설게 하기로는 미래파 시인들의 폭력적 언어기법을 빌려오면 웬만큼 된다. 그러나 스토리를 부여하면서 정서적 이미지를 통합하는 수법은 노련한 작시경험을 요구한다.  

 

 

6. 변의수

 

 

 석전 손형남, 태양, 2010년.   

                                                                                                                                                                                  

 

먹구름 속의 빗물     

 

이 그림은 무명의 작가가 나를 위해 그려준 수묵화이다. 어둔 길을 집을 찾아 돌아갈 때 폐허의 건물에 등불 하나 켜져 있는 것을 보았다. 걸인 같은 행색의 나는 초라한 마음으로 불 켜진 문을 밀었다. 홀로 나이 든 무명의 작가는 미소 지으며 나를 맞아주었다. 그는 ‘태양 명상’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나도 실은 태양 명상가였다. 나의 예술은 태양으로부터 비롯한 것이다. 까뮈가 태양에 대한 명상으로부터 그의 문학과 사상을 끌어내었듯이. 르 끌레지오가 태양의 아들이었듯이. 나는 목덜미에 떨어지는 태양의 햇살로 영혼이 성장했다. 나는 밤길을 걸었지만 명상은 태양 아래서 행했다. 나는 태양 아래 탄소동화작용을 하는 한 그루 나무였다. 나의 엽록소의 감각들은 태양빛을 받아 성장하고 사고했다.

 

폐허가 된 건물을 지키고 있는 파산 상태의 이름 없는 그 작가는 태양 명상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이미 죽음에 이르렀을지도 몰랐다. 예술은 그의 등불처럼 그의 삶을 지켜주었다. 그는 나의 삶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도대체 어디를 둘러보아도 불균형한 무질서의 먹구름과 검은 어둠뿐이다. 나는 그의 먹빛 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잘난 태양 하나, 어둠을 겨우 뿌리치고 조그만 원 속에 자리하고 있다. 마치 나의 삶처럼 그의 삶처럼 반 폐허의 건물 더미 안에 휑덩그러니 가부좌 틀고 앉았는. 이제는 초로의 사내. 나의 삶은 끝에 다다랐다. 모든 것을 다 보았다. 아니, 더 이상은 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 정확한 말이다. ‘그 모든 것’이란 흑과 백뿐이지만, 내게는 천변만화하는 폭풍이다. 빛은 가냘픈 종이 위에서 빛날 뿐이다. 우리는 망막의 벽에 새겨진, 존재하지 않는 그 어떤 무형의 움직임들을 ‘빛’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제 나는 끝에 다다랐다. 무無만이 자리하고 있다. 나의 눈엔 독수리가 허공을 맴돌고 먹빛 한 점 그림자처럼 웅크리고 있다. 가끔 빛을 촬영하곤 하던 무명의 작가는 그의 삶 자체를 벽에다 배접해두었다. 십자가에 걸어두듯. 자신의 사지와 늙어가는 얼굴을 못으로 눌러두었다. 꼼짝할 수 없도록. 이제는 숨을 쉬지 못하도록 액자 속에 넣어 둘 생각이었다. 그런 그는 방문을 들어선 나에게 그의 흑과 백의 영감을 선사한 것이다. 이제 내가 그의 삶에 무언가 내어놓아야 할 차례이다.

 

어둔 골목길을 걸어 들어가며 나는 앞날을 점쳐 보았다. 가깝게는 내일 아침 일어날 나의 운명에 관하여. 도대체 내게 흑과 백의 관념 외에 무엇이 남아 있단 말인가. 점점이 부서져 흩어지는 태양의 파편 조각들. 태양은 검은 어둠의 아들이다. 저 무시무시한 어둠 속의 먹구름들. 그래도 나는 태양의 명상가 또는 그 아들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옷 속을 스며드는 지긋지긋한 빗물들. 영혼까지 젖게 하는 검은 어둠. 나는 무명의 작가의 육체를 벽에서 떼어내었다. 그리고 줄로 묶어서 가지고 왔다. 조심스레 펜으로 염殮하고 태워서 재로 만들었다. 이제 무명의 작가 그가 남긴 것은 박제로 만든 태양과 짙은 어둠뿐이다. 그것이 그의 마스터피스이다.

 

어두운 반 폐허의 건물더미 속에 덩그러니 등불처럼 웅크리고 앉아 있는 그는, 마지막 얼굴을 떼어낸 채 이제 그 어떤 명목으로 그의 육체를 끌고 갈 수 있을까. 나는 그 무명의 작가에게 감히, 예술이란 영혼으로 전수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언어는 예술을 낳지 않는다. 흑과 백의 빛과 어둠 속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실체! 저 무시무시한 물고기 속의 입. 그리고 그 어둠 속에 내걸린 종잇장보다도 얇은 태양 하나! 그것이 저 무명-작가의 마지막 운명이다. 혹은 내게 선물된!  

 

 (계간 『다층』 2010년 여름호)

 

변의수가 그린 이 산문시는 “태양”을 매개로 한 ‘예술혼’에 대해 말한다. 무명화가의 ‘예술혼’에 빗대어 시인은 스스로의 ‘예술혼’을 드러낸다.  작가의 시선과 욕망이란 대상(타자)의 얼굴에 비친 나의 얼굴이다. 화가의 표현이란 뇌 안의 생각이 외부로 드러난 것이며 지각의 왜곡과 수정으로 자신의 생각을 투사한다. 시인도 마찬가지이다. 시인은 대상을 객관적 사실자체에 근사(近似)해서 보지 않는다. 시인은 시인자신의 주관과 감정을 투사해서 대상을 본다. “태양 명상”이라는 신비감이 도는 단어는 현실을 초월해서 있는 어떤 정신(여기서는 포에지의 예술혼)을 은유한다. 이 시는 예술에 대한 화가(시인)의 염결한 태도와 예술지상주의 시각이 드러나 있다.

 

 

 

시 여섯 편을 들여다 보았다. 시인 각각의 사유구조가 달라서 이 작품들을 신경미학적 관점에서 들여다 본다면 매우 다른 이미지의 집합과 매트릭스의 그래프가 그려질 것만 같다. 마음의 흥분- 뇌 신경의 흥분-은 왜 일어나는가. 공감을 일으키는 거울뉴런( Mirror Neuron)이 존재한다고 한다. 타인의 행위와 의도를 그대로 알아차리고 모방하는 이러한 능력은 진화적 필요에 의해 발달되었다. 인간의 꿈도 일종의 시뮬레이션이다. 뇌는 이 가상현실을 참이라고 여기는데 실제의 현실만큼 생생한 정보를 요구하지 않는다. 시도 일종의 꿈과 시뮬레이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시는 대상의 특질을 시인의 주관이 해석한 이미지와 결합해서 몇 개의 그림을 추상으로 그려낸다. 대상을 현실(산문)처럼 세세하게 묘사하지 않아도 우리는 시를 통해 시인이 보고자 한 대상의 특징을 알아차린다. 시는 꿈을 꾸는 뇌의 작동방식과 같다. 멀티라이프(Multi Life)를 경험하려는 인간의 욕망이 있고 시의 스크린(Screen)이 펼쳐진다. 욕망은 시의 가상세계에서 리얼과 환상을 구분하지 않는다.

 

  

김백겸 시인

1953년 대전에서 출생. 충남대학교 경영학과와 경영대학원 졸업. 198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기상예보〉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비를 주제로한 서정별곡』, 『가슴에 앉힌 산 하나』, 『북소리』, 『비밀 방』, 『비밀정원』등이 있음. 대전시인협회상, 충남시인협회상 수상. 현재 웹진 『시인광장』主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