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과 칼럼

이상한 나라의 리얼리즘

미송 2011. 4. 2. 22:57

이상한 나라의 리얼리즘

-『저녁 6시』(이재무, 창비, 2007)와 『휘파람소리』(최승익, 시와에세이, 2007)의 서평

 

1. L씨의 이상한 나라

 

언니 곁에 앉아 있던 앨리스는 견디기 힘들 정도로 지루해졌다.『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이렇게 시작한다. 그때, 이제껏 본적이 없는 모양을 한 토끼가 한 마리 뛰어왔다. 눈알이 빨갛고 털이 하얗다. L씨의 이상한 나라도 견디기 힘들 정도로 지루하다. 이때 이제껏 본적이 없는 두 권의 시집이 뛰어왔다. 『저녁 6시』(이재무, 창비, 2007)와 『휘파람소리』(최승익, 시와에세이, 2007)다. 하나는 눈알이 빨갈 것이고, 다른 하나는 털이 하얄 것이다.

 

앨리스는 치미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토끼를 따라 언덕배기 밑에 있는 굴로 들어섰다. 영리한 그 애는 어떻게 이 세상으로 다시 나올 것인가 생각지 않았다. 나도 그렇다. 저녁 6시까지 이 지상에서 잠시 머물다 자꾸만 자꾸만 떨어져 내려가 이 세상으로 다시 나올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두 권의 시집을 따라가는 것은 호기심 때문이 아니다. 작아진 앨리스가 자신이 흘린 눈물에 빠져 허우적대듯 손톱 만하게 작아진 리얼리즘 때문이다.

 

L씨와 함께 사는 이 세상은 신자유주의 체제의 나라다. 이상한 일이 자꾸만 벌이지는 바람에 L씨는 어느새 불가능한 일은 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 같다. 우웩! 영어를 모국어로 삼을 모양이며, 사교육 받지 못한 아이들을 추려내 팽개칠 생각이고, 쥐똥 같은 돈을 주며 몹시 부리다 노동자를 아예 쉬게 할 심산이고, 대운하를 파 물고기를 ?아내고 거기다 컨테이너선을 띄워 뱃놀이를 할 작정인가 보다.

 

L씨의 이상한 나라에서 시인들은 세상 사람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팔 다리는 떨어져 나갔고 눈앞에 펼쳐진 일들을 무시하려는지 목을 쭉 빼고 멀리 보는 습관이 생겨 목이 가느다랗게 길어졌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을 뱀이라 부른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시인들은 난 뱀이 아냐! 라고 고함치지만 궁색하다. 난…… 난 리얼리스트야.이렇게 말하면서도 지금 그런 말이 정당할지 스스로 의심한다. 이 두 권의 시집은 앨리스의 말을 흉내 내어 말하고 있다. 그렇지만 가야 할 곳이 있어. 그곳이 어떤 곳인지는 모르지만.

 

일종의 우화적 환상이다. 엔토니 이스톱(Antony Easthope)은 환상을 두 가지로 나눈다. 무의식적 백일몽이라 할 수 있는 환상(fantasy)과 사회적 기능과 의미를 생산하는 환타지(phantasy)이다. 시집『저녁 6시』에서 백일몽에 빠진 일상의 빨간 눈을, 시집『휘파람소리』에서 하얗게 탈색된 사회적 환타지를 보게 될 것이다.

 

 

2. 지상에서의 백일몽 -『저녁 6시』

 

하이데거는 일상적 삶의 존재양식을 잡담(Das Gerede), 호기심(Die Neugier), 모호함(Die Zweideutigkeit)이라 말한다. 시인의 일상 또한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우리가 듣는 시인의 목소리는 무어라 무어라 귓가에 맴돌 뿐 잘 들리지 않는다. 그가 전해주는 저녁 무렵 6시의 풍경들은 너무나 익숙한 일상이다. 논일 끝나면 밭일, 밭일 끝나면/읍내 장터에, 잔칫집에, 떡방앗간에, 예식장에, 초상집에,/공판장에, 면사무소에, 군청에, 시위현장에(「깊은 눈」에서)서 굳이 귀를 열지 않아도 들리는 소리들이다. 이 잡담과 같은 시 속에서 우리가 목도하는 것은 일상에 빠져든 시인의 모습이다. 저녁이 오면 인사동이나 청진동, 충무로, 신림동, 청량리, 영등포 역전이나 신촌 뒷골목(「저녁6시」에서)을 어슬렁거리는 시인을 만나게 된다. 그는 도시의 일상에 감각이 마비된 우리다. 그래서 우리는 일탈의 호기심을 갖는다. 여행이다. 현실적인 가치가 지배하는 일상에서 벗어나 삶의 깊은 의미를 찾아가는 행위가 여행이다. 시인도 그렇다. 미량으로, 문배마을로, 운문사로, 강진만으로, 백련사로, 양수리로, 사리암으로, 낙양으로 떠도는 그의 시심은 일상에 빠져 허우적대는 자아를 구출하려는 거리두기다. 시집 곳곳에 묻어 있는 일탈의 궤적은 그러나 너무 심심하다. 겨우 아득한 포구에서 갯벌 같은 여자와 꾸미는 불륜의 백일몽이 전부다. 그래서 이 시집의 일상은 모호하다. 잡담과 같은 일상에 빠져 불온한 것들을 맘껏 탐닉하다가 한편으로 속죄하듯 일탈하려는 꿈을 꾼다. 그러나 한낱 백일몽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추함과 아름다움의 동거 속에서 우리가 읽어야 하는 것은 자기 삶의 본래적 모습을 회복하려는 징후들이다. 시인에게 중요한 문제이기보다는 우리에게 심각하기 때문이다.

 

다시 하이데거는 말한다. 실존적 결단을 내리라고! 우리들의 실존적 결단은 새로운 차원에서 환하게 열려 밝혀진 자기 자신의 세계를 맛보게 할 것이며, 동시에 더 깊고 풍요로운 삶을 사는 본래적 삶의 문을 여는 열쇠를 손에 쥐어 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시집에서 읽어 내야 할 것은 일상의 잡담도, 호기심도, 모호함도 아니다. 거기서 풍기는 관념적 고통과 아름다움의 백일몽이 아니다. 하이데거는 본래적 삶을 살라 요청한다. 그 자기 자신의 삶 살기는 일상의 한 가운데에서, 그때그때 삶 속에서 피어오르는 불안과 양심의 부름, 그리고 자기 자신의 죽음 앞에 앞서 달려가 보는 것이다.

 

시「부드러운 복수」를 보라. 시인은 생의 분식, 삶의 연민, 사랑의 집착 때문에 불안하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높고 푸른 이념이 아니라 자기 소멸이다. 이 두려움이 이 시집을 구원했다. 그리고 우리도 구원할 것이다. L씨의 이상한 나라에서 자본을 향한 끊임없는 분식과 연민과 집착에 결박된 채 불안에 떠는 우리 자신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약하다. 우리는 시인이 숨겨둔 양심의 부름을 찾아 들어야 한다. 이 역시 우리 자신을 위해서다.

 

내면의 동굴 서늘하게 울리던 소리를 나는 들었던가

……

사는 동안, 살기 위하여 나 말에 멱살 잡혀

실감과는 상관없는 생 살아왔는지 모른다

―「말과 권력」에서

 

시인도 우리도 모두 알고 있다. 살면서 우리는 너무나 많은 실감과 결별했다는 사실을, 귀를 막아도 들려오는 소리가 있음을 알고 있다. 자본이 후려치는 채찍질에 돌고 돌아 눈이 빨개진 인간 팽이가 내뱉는 웅웅거리는 회전음은 이 지상에서 부르는 백일몽의 만가(輓歌)가 아니던가. 저녁6시도 곧 저물어 가는 시간이다. 이 시집은 그것을 전하려 하는가. 밤거리를 떠도는 유령처럼 살기를 아무도 바라지 않는다. 시인도 그렇다. 그래서 이 시집을 읽으며 우리는 죽음에 앞서 미리 가 우리의 미래와 만나야 한다. 푸른 늑대처럼.

 

내 생전 언젠가는 찾아갈 거야, 푸른 고독

광도 높은 별들 따로 떨어져 으스스 춥고

쩡쩡 우는 한겨울 백지의 광야

방랑과 유목의 부족 찾아갈 거야

……

내 생전 언젠가는 찾아갈 거야

한마리 변방의 야생을 살며 폭설 내린 어느날

비축해둔 식량마저 떨어지면 파오 우리 덮치다가

불 품는 총구 앞에서

한점 비명, 회한도 없이 장렬하게 전사할 거야

―「푸른 늑대를 찾아서」에서

 

죽음 앞에서 더 이상 우리는 백일몽에 빠져 자본의 거리를 헤매는 개떼들이 아니다. L씨의 이상한 나라에서 우리는 광야로 나가야 한다. 푸른 눈을 번뜩이며 변방의 전위가 되어야 한다. 그처럼 이 시집은 시인도 모르는 리얼리즘의 열쇠를 던져주고 있다.

 

 

3. 지하세계의 환타지 -『휘파람 소리』

 

이 시집을 대하며 목소리를 바꾸기로 합니다. 우리 안에 거주하는 여성적 목소리입니다. 왜냐하면 이 시집은 남성적인 대지의 상상력으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수컷이 수컷에게 갖는 헛된 리얼리즘의 환상을 버리기 위해 잠시 그렇게 하기로 합니다.

 

이 시집이 끌고 가는 공간이 있어요. 안타깝게도 이 시집은 그때를 말해 주지 않네요. 1980년 4월 사북이어요. 짧았던 봄이었어요. 서른 해가 다 되어 가는데 머릿속에 틀고 앉은 한 장면이 자꾸만 떠올라요. 린치예요. 김순이라는 살찐 여자가 홀랑 옷이 벗겨진 채 동원탄좌 정문에 묶여 있었어요. 노조지부장의 마누라였어요. 온통 새까만 남자와 부녀자들이 그 하얀 살 첨을 향해 검은 돌을 마구 던졌어요. 때론 음모를 뽑아 바람에 날리기도 했어요. 아아! 그녀는 예수처럼 측은해 보였어요. 그래서 우리는 그 두더지 같은 인간들을 폭도라 불렀어요.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됐어요. 린치는 악덕 기업주와 거기에 기생하는 어용노조에 대한 서툰 저항이었다는 것을요. 광산 노동자를 짓누르는 권력과 자본의 힘이 그들을 솟구치는 분노의 화산이 되게 했다는 것을요. 그리고 이 땅 노동운동의 봄을 가져온 첫 활화산이었다는 것을요.

 

그러나 대지의 상상력은 처절하다. 사북의 봄은 오래지 않아 짓밟혔고 광산 노동자와 부녀자들은 계엄군에 끌려가 사회정화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격렬하게 품은 희망은 고작 3일 동안이었다. 얼마 있지 않아 5월 광주에서 똑 같은 일이 벌어졌고 유혈과 혼란의 무법천지였다는 새빨간 거짓말이 아직도 이 땅을 짓누르고 있다.

 

이 시집은 사북이후 지하세계의 기록이다. 사북의 봄을 꿈꾸는 광산촌은 이제 이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석탄합리화라는 신자유주의의 흉폭한 바람이 스쳤기 때문이다. 지하세계는 달리 규폐병동이라 부른다. 그 나라 사람들은 빛을 볼 수 없기에 창백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규폐로 거친 숨을 몰아쉬며 살가죽만 남아(「규폐병동에서1」),원형의 창가 하얀 병상에 누워/마른 침 삼키며 숨 몰아쉬는(「규폐병동에서2」),좀비(Zombie)들이 아닌가. 악덕 농장주가 던져주는 저임금에 저당 잡힌 타이티의 흑인처럼 지난날 그들의 노동은 시체놀이에 불과하다. 그들을 묶어둔 서푼 임금은 탈출과 저항을 하지 못하게 한 부두교 주술사가 먹인 마약이다. 이처럼 지하세계는 검은 유령들의 나라로 변했다. 그처럼 L씨의 이상한 나라에서 광산 노동자들의 존재는 비현실적이다. 그러므로 이 시집에 등장하는 인물과 이들이 겪는 고통은 생경하다.

 

노동은 체험 삼아 해보는 것이 아니라/밥줄로 하여야 한다는 철칙을/밥줄로 이겨내야 한다는 형극을/어둠의 땅에서/그 무너진 어둠 속에서 다시 배웠다(「밥줄」에서)는 말은 낯설다. 왜 그들은 저렇게 말을 할까 고개를 갸우뚱 거릴 뿐이다. 이것은 이상한 나라의 리얼리즘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석탄합리화로 폐광이 된 광산촌의 유령들이 내뱉는 이 지상의 언어들은 우리를 뜨악하게 한다. 한 때 지하세계의 일원이었던 시인도 그것을 알고 있다. 그도 규폐병동을 한참 헤매고 다니다 결국은 유령의 소리를 우리에게 전해주지 않는가. 휘파람 소리다.

 

밤바람소리 문풍지 울어대는 긴 겨울밤

할머니 무릎팍에서 듣고 자랐던

뱀 지나가는 쉿 소리가 아니라

하늘이 무너지는 폭풍소리 같아서

남은 희망마저 빼앗기는 아내들의 몸부림 끝에

내 서방 잡아가는 소리 같아

땅이 꺼져라 울어대는 통곡소리 같대서

―「휘파람 소리」에서

 

그들의 휘파람소리는 진폐증 말기 환자의 색색거림이다. 시인에게 우리는 이렇게 주문해야 한다. 휘파람을 불어달라고. 지하세계의 노래는 바로 이런 유령의 언어로 들려달라고. 그리고 지하세계의 노래가 사북의 봄을 다시 불러오도록 활화산 같은 주술을 걸어달라고 요청해야 한다. 지금 지하세계 광산 노동자들은 휴화산이다. 그러나 그 안에 솟는 힘(force de soulévement)의 환타지를 갖고 있는 마그마다. 바슐라르가 말했듯이 수직성의 투쟁에 앞서 짓누름(écrasement)이라는 재기(在起의) 과정이 있어야 한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이고 눌러 그 에너지를 상승의 분출구로 이끌 줄 아는 자 그가 지하세계의 시인이다. 그래서 시인도 다음과 같은 시로 이 시집의 문을 닫고 있다.

 

수없이 이어진 길을 잰걸음으로 걷다가

무릎 꺾인 관절로 이 거리 한 귀퉁이

정차된 위치에 머물렀던 젊음의 족적들은

어둠을 가셔낸 새벽 질주하던 삶은 아니었지만

파란불 속에 감춰진 내일을 품어

수 없는 길을 횡단해온 이 거리에서

건너야 할 길과 돌아가야 할 길을 다시금 묻고 있다

한 발자국 또 한 발자국

신앙처럼 살아오며 믿어왔던 시선의 날들 거듭 놓아

어둠을 이겨나온 이 거리에서

새로운 길을 향해 일단정지 해야 하는

이맘때쯤, 역사를 돌이켜 이 길 어디쯤에서

한 걸음 또 한 걸음

길을 건너야 하는 걸까

―「건널목」의 전문

 

 

4. 리얼리즘의 패배

 

이 두 권의 시집은 우리에게 그렇지만 가야 할 곳이 있어 라고 말하는 것일까? 섭섭하게도 그렇지 못하다. 이 두 시집은 그곳이 어떤 곳인지는 모르지만 이라고 고백하는 일상의 기록이며 우화일 뿐이다. 어떤 곳인 줄도 모르며 그리로 갈 수는 없지 않는가?

돌이켜 보면 리얼리즘의 위대한 승리는 정통왕당파 발자크의 손에서 성취되었다. 그러나 L씨의 이상한 나라에서 위대한 발자크는 존재하지 않는다. 스스로 자신의 몰락을 실감나게 전해 줄 귀족은 없다. 오직 천민자본가만이 제 배를 문지르며 이상한 말을 쏟아 놓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 두 권의 시집은 오늘날 리얼리즘의 패배를 단적으로 보여준 상징물이다. 일상의 백일몽이, 짓눌림의 과정이 없는 분노가 오늘날 극악한 현실을 담아내지 못함을 이 두 권의 시집에서 처연하게 목도한다. 그것은 지루함이다. 다행히 이들 시집에는 시인 자신도 모르게 숨겨 논 금쪽같은 시들이 빛나고 있다. 이 땅의 리얼리스트여! 그대가 그것을 찾아 읽기 바란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말미에는 이런 말이 쓰여 있다. 하지만 눈을 뜨는 순간 모든 것은 현실로 바뀔 것이라고. 우리는 지금 눈을 뜨고 있는 것인가 감고 있는 것인가? 브레히트는 말한다. 어서 눈을 감으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