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신화

노자 제1장

미송 2011. 4. 3. 17:53

 

노자 제1장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故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徼

此兩者 同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장자 제1장

 

1. 소요유 / 逍遙遊

 

(1) 북쪽 바다에 물고기가 있어 그 이름을 곤(鯤)이라고 하는데, 그 크기가 몇 천리나 되는지 알지를 못한다. 그것이 변화해서 새가 되니 그 이름을 붕(鵬)이라하며 이 붕의 등 넓이도 몇 천리나 되는지 알지를 못한다. 이 새가 한번 기운을 내어 날면 그 날개는 마치 하늘에 드리운 구름과 같다. 이 새는 바다 기운이 움직일 때 남쪽 바다로 옮겨가려고 하는데 남쪽 바다란 천지(天地 : 천연적인 연못)를 말한다.

 

<제해>(齊諧 : 사람의 이름이라고도 하고, 또는 책이름이라고도 함, 제해란 말은 세계가 하나로 조화한다는 뜻)란 기괴함을 적은 것으로 거기에 이런 말이 있다.

「붕새가 남쪽 바다로 옮겨갈 때에는 물결을 치는 것이 삼천리요, 회오리바람을 타고 구만리나 올라가 육 개월을 가서야 쉰다.」하였다.

 

아지랑이와 티끌은 생물들이 불어내는 입김이다. 하늘이 저렇게 푸른 것은 저 하늘의 본래의 빛인가? 너무 멀어서 끝이 없는 까닭인가? 저 위에서 이 지상을 굽어보아도 또한 이러할 뿐이다.

 

 대체로 물이 고인 곳이 깊지 못하면 큰 배를 띄울 힘이 없다. 한 잔의 물을 뜰의 패인 곳에 부으면 하나의 지푸라기는 배 마냥 뜨지만 술잔을 띄우면 가라앉는다. 물은 얕고 배는 크기 때문이다. 바람이 쌓인 것이 두텁지 않으면 저 붕새의 큰 날개를 날리기에는 무력할 것이리라. 그러므로 구만리쯤이나 올라가야 바람이 그 밑에 있게 되고, 그런 뒤에야 바람을 타고 푸른 하늘을 날아가는데, 가로막는 것이 없어야 곧 남쪽으로 갈 수 있는 것이다.

 

 매미와 메까치는 이를 비웃는다.

「우리는 훌쩍 솟아올라 느릅나무나 박달나무가 있는 곳까지 가려 해도 때로는 이르지 못하고 땅바닥에 떨어지고 마는데, 어째서 구만리나 올라가서 남쪽으로 가려 하는가?」

 

가까운 들판으로 가는 자는 세 끼니만 먹고 돌아와도 배가 여전하지만, 백리를 가는 사람은 전날 밤부터 양식을 준비해야 하고, 천리를 가는 자는 3개월 동안의 양식을 준비해야 하는 법이니, 이 두 마리 벌레들이 또한 무엇을 알겠는가,

 

작은 지혜는 큰 지혜에 미치지 못하고, 단명하는 이는 장수하는 이에 미치지 못한다. 어째서 그런 줄 아는가? 아침나절에만 사는 버섯은 그믐과 초승을 알지 못하고, 쓰르라미는 봄과 가을을 알지 못하니 수명이 짧기 때문이다.

 

초(楚)나라 남쪽에 명령(冥靈 : 나무의 이름이라고도 하고, 바다거북의 이름이라고도 함.)이라는 것이 있는데, 오백년을 봄으로 삼고 오백년을 가을로 삼았다. 또 태고 적에는 대춘(大椿 : 참죽나무라고도 하는데, 일설에는 무궁화나무라고도 함.)이 있었는데 팔천년을 봄으로 삼고 팔천년을 가을로 삼았다. 그런데 팽조(彭祖 : 요임금의 신하인데 팔백년을 살았다 함.)가 지금에 와서 오래 산 것으로 소문이 났으니 또한 슬프지 아니한가?

 

탕왕(湯王)이 극(棘 : 탕왕의 신하 이름)에게 물은 것도 이와 같은 것이다. 궁발(窮髮 : 초목도 가지 않는 북극지방의 불모지)의 북쪽에 명해(溟海)가 있는데 천지(天池)다. 거기에 물고기가 있는데 그 넓이가 수 천리나 되고 그 길이를 아는 자가 없다. 그 이름을 곤(鯤)이라 한다. 또 거기에 한 마리 새가 있는데 그 이름을 붕(鵬)이라 한다. 등은 태산과 같고 날개는 하늘에 드리운 구름과 같은데 회오리바람을 타고 구만리를 돋아 올라 구름을 벗어나고 청천을 등에 진 연후에야 남쪽을 도모하여 남쪽 바다로 간다.

종달새가 이를 비웃어 이렇게 말한다.

 

「저들은 바야흐로 어디로 가는 것일까? 우리는 뛰어올라 두어 길도 못가서 도로 내려와 쑥대밭 속에서 펄떡거리는데, 그리고 이런 정도도 최고의 비행인데, 저들은 대체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이것은 작은 것과 큰 것의 구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대체로 지혜가 겨우 한 관직이나 담당할 만하고 행동이 그 고을 사람들에게만 칭찬받을 정도이며, 덕은 그 나라 한 임금의 비위에나 맞는 정도라서, 한 나라의 신하로 임명된 자가 스스로 뽐내는 것은 이 종달새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송영자(宋榮子 : 전국시대 송(宋)나라 사람 송경(宋牼)을 말함. 송견(宋銒)이라고도 함, 그는 무저항주의, 반전주의 사상가.)는 오히려 이들을 비웃는다.

그는 온 세상이 그를 칭찬해도 으스대는 법이 없고 온 세상이 그를 비난해도 그만두지 않으니, 안팎의 분수가 정해져 있고 영예와 굴욕의 경계가 구분되면 그만일 뿐이다. 그런 사람은 세상에 아직 흔치 않다. 비록 그렇다 해도 아직 지극한 덕을 세웠다고 할 수는 없다.

 

대저 열자(列子 : 전국시대초기의 철학자, 도가에 속함)는 바람을 타고 돌아다니며 시원하게 잘 지내다가 보름 만에야 돌아온다. 그래서 그는 복을 받는 사람 중에서 아직도 그리 흔한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이는 비록 걸어 다니는 것을 면했다 하더라도, 오히려 의지해야 할 바람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저 천지의 바른 기운을 타고 육기(六氣 : 천지춘하추동의 여섯 기운, 음양, 풍우, 회명<晦明>의 여섯 기운, 곧 천지자연의 대기운)의 변화를 몰아서 무궁에 노니는 자는 그가 다시 무엇을 의지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지인(至人)은 물아(物我)의 구별이 없고, 신인(神人)은 공을 의식하지 않으며, 성인(聖人)은 명예를 무시한다.”는 것이다.

 

 

[해설]

이상은 <소요유편>의 앞부분인데 장자는 먼저 동물세계를 이끌어다가 인간세계를 풍유하고 있다. 곧 곤(鯤)과 붕(鵬)의 최대의 동물과 매미, 메까치, 종달새 등 작은 짐승과를 견주어 인간의 대지(大知)와 소지(小知)에다 비유하고 있다. 또 장자는 자기의 견해를 확증하기 위하여 또 다른 생물의 세계에도 언급하여 버섯이나 쓰르라미와 명령(冥靈), 큰 참죽나무(大椿) 등에 견주어 소년(小年)과 대년(大年)의 차이를 설명하고 있다. 다음 상식적인 가치와 규범의 세계에 안주하며 스스로 즐기는 하찮은 인간세계를 초월하여 거의 절대자의 경지를 소요하는 송명자, 열자를 끌어다가 속인의 지식과 능력의 한계를 비웃고, 더 나아가 지인, 신인, 성인의 경지를 설명하여 초월자, 절대자를 크게 다룸으로써 장자의 절대자유의 세계에 소요하는 고차원의 사상을 피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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