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 제2장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 故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較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 是以聖人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萬物作焉而不辭 生而不有 爲而不恃 功成而弗居 夫唯弗居 是以不去
사람들이 아름다움을 아름다운 줄 알지만 이는 추악한 것이고, 선을 선한 줄 알지만 이는 선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유무가 상생하고, 난이(難易)가 서로 성취하며, 장단이 서로 비교되고, 고하가 서로 기대고, 음과 소리가 서로 조화를 이루고, 전후가 상종한다. 이로써 성인은 무위에 합하여 일하고 말하지 않고도 가르침을 행한다. 만물은 그 짓는 것을 사양하지 않고 다투어도 마음에 두지 않으며, 일을 하되 자랑하지 않고, 공을 이루어도 머무르지 않는다. 대저 머무르지 않을 뿐 아니라 또한 뿌리치지도 않는다.
인도의 시성 타고로가 하루는 선상에서, 아름다음(美)에 대하여 시상을 떠올리기 위하여 깊이 몰입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등잔불속의 기름과 심지는 타들어갔고... 끝내 등잔불은 꺼지고 말았다! (그순간, 그찰라)타고로는 깨달았다. 사방은 고요하였고, 달빛은 은은하게 수면위에서 편린을 잘게 부수고 있었으며, 반딧불은 춤을 추고, 적막한 새벽강가의 풀벌래 소리는, 그의 시심을 벗어나서 이미 그렇게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벗이여!
이렇듯 진정한 아름다음(美)과 좋음(善)은 관념속에 있는것이 아니라 관념에서 깨어났을때, 이미 그렇게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노자는 이를 "세상 사람들 모두가 아름다움(美)을 아름다운지 알지만, 이는 美가 아니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좋음(善)을 좋은지 알지만, 이는 善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대 벗이여!
그대는 깨달았는가? 못깨달았는가? 이를 노자는 이렇게 이야기 한다 "그러므로 '깨달았다(有)' 하기에 '못깨달았다(無)'는 것이 있게 되고, 어려움(難)'이라는 것에 마음의 무게를 두기에 '쉬움(易)'이라는 것에도 집착하게 된다. 길고 짧음도 결국은 마음의 산물이며, 높고 낮음, 음(音)과 성(聲), 앞과 뒤라는 것도 그 각각의 것이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비교하고 분별하는 우리의 마음이 지어낸 허상(虛像)일 뿐이다."
사랑(愛), 도(道), 아름다음(美), 좋음(善) 이것들은 언어가 아니며, 관념이 아니며, 규정지울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정의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here and now(지금 여기) 이미 그렇게 존재하고 있었던 것을 단지, 지금 이순간의 분별심이 못보고 있는 것 뿐이다. 이를 노자는 이렇게 이야기 한다 "그렇기에 성인은 언제나 분별(分別)하고 간택(揀擇)함이 없는 무위(無爲)의 일에 처하여 말없는(집착이 없는 행동)가르침을 행하고, 만물(萬物)을 짓되 그 어느 것도 사양하지 않으며, 낳되 소유하지 않고, 하되 '했다'는 의식이 없으며, 공(功)을 이루되 거기에 거(居)하지 않는다.
" 대저 오직 거하지 않기에,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무위(無爲 : 행위 없는 행위, 그 어느 것 어느 곳에도 집착하지 않는 행위)
이것은 노자의 일상속에서의 깨어있음을 뜻한다. 그는 단지, 이를 길(道)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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