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과 산문

조연현<침묵과 여백>

미송 2009. 3. 25. 10:37

 

 

침묵과 여백 

 

조연현

 

 

'침묵은 금이요, 웅변은 은'이라는 격언이 있다. 이 말은 불성실한 다변(多辯)보다는 무엇의 성실이 더 가치 있다는 교훈적 의미를 말하는 것이지만, 때로는 침묵이 웅변보다 더 강한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는 수사학 상의 한 기교로 해석될 수 없는 것일까. 만일 이러한 해석도 가능하다면 침묵이 웅변보다 설득력을 갖는다는 것은 어찌된 일일까.

 

서양화와 동양화의 차이는 여러 가지 면에서 지적될 수 있지만 전자가 여백을 적게 남기는 데 비하여 후자는 여백을 많이 활용하는 것을 지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대개의 서양화는 전 공간을 점유해 가는 경향이 강한 데 비하여 대개의 동양화는 여백으로써 그림의 효과를 얻으려는 경향이 강하다. 회화에 있어서 색채나 선이 언어에 해당되며 색채나 선의 활동이 웅변으로 볼 수 있다면, 회화의 효과를 더욱 빛낼 수 있다는 것은 '침묵은 금이요 웅변은 은'이라는 격언을 회화에 적용한 일례가 되는 것일까.

 

웅변이 '표현에의 활동'이라면 침묵은 그것을 '정지한 상태'다. 표현이 인간의 본능이라면 웅변에의 충동은 심리적으로나 생리적으로나 인간의 정상적인 활동이며, 침묵이 오히려 이상異常적인 것이다. 그러나 때로 인간은 스스로의 의사에 반하여 침묵 속에 잠긴다. 사람들이 침묵 속에 잠기는 데에는 두 가지의 원인이 있다. 하나는 '언어에의 불신' 때문이요, 다른 하나는 '언어의 궁핍' 때문이다. 언어가 권위나 위신을 갖지 못할 때 언어 활동은 공허한 것이 되며, 언어가 비록 권위와 위신을 가졌을지라도 언어로써 완전한 표현이 불가능해지면 이것 역시 언어의 허망을 나타낼 뿐이다. 사람들은 이럴 때 곧잘 침묵 속에 빠진다.

 

언어를 하나의 정신적 부호로 볼 때 '언어에의 불신'은 인간의 정신적·사상적 가치나 권위에 대한 불신이 된다. 이것은 무서운 절망이 아닐 수 없다. 언어를 하나의 표현적 방법으로 볼 때 '언어의 궁핍'은 완전한 표현의 불가능을 의미해 준다. 이것은 무서운 고독이 아닐 수 없다. 이를테면 침묵은 이와 같은 '절망과 고독'을 그 배경으로 하고 결과된 하나의 체념의 상태다. 만일 침묵이 웅변에 승리했다면 그것은 침묵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 배경인 '절망과 고독'이 이해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때로 절망은 '강요된 신념'보다 더 신임을 받을 수 있으며, 불완전한 표현보다는 때로 표현을 단념한 안타까운 체념이 좀더 절실한 인상을 주게 되는 것은 아닐까.

 

웅변이 언어의 활발한 활동이라면 침묵은 그것을 정지한 상태다. 웅변이 설득에의 적극적인 의지의 발동이라면, 침묵은 그것을 포기한 상태다. 웅변이 대상에 대한 능동적인 자세라면, 침묵은 대상에 대한 수동적인 자세다. 웅변이 오해를 불허하는 태도라면 침묵은 오해까지도 수용하는 태도다. 웅변이 전진하는 생의 형식이라면, 침묵은 현상을 인내하는 생의 형식이다. 웅변이 운명을 개척해 가는 방향이라면 침묵은 운명에 복종해 가는 방향이다. 이와 같은 침묵의 불리한 여러 조건이 웅변의 유리한 여러 조건에 승리할 수도 있다는 것은 우리의 일상을 어지럽히는 무내용한 다변(多辯)과 불성실한 요설(饒舌)에 대한 미움에서가 아닐까. 다변과 요설은 웅변의 속성이 되기 쉬운 데에서 침묵 쪽에 동정이 기울어지는 것은 아닐까.

 

침묵이 일종의 여백이라면, 여백은 일종의 침묵의 상태다. 그러나 여백은 '언어의 궁핍의 결과'로 볼 것인가, '언어의 절약된 결과'로 볼 것인가 하는 데 따라서 이 양자의 성질은 달리 해석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해석되든 여백은 침묵과 마찬가지고 '언어의 직접적인 활동'이 아닌 점에 있어서 이 양자는 일치된다. 그러므로 여백이 갖는 여운의 효과는 침묵에도 해당되며 침묵이 갖는 무언의 암시는 여백에도 적용된다. 이 때문에 여백은 침묵의 기술이며 침묵은 여백의 한 방법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침묵이나 여백이 수사학상의 한 기교가 될 수 있는 비밀이라고나 할까.

 

침묵과 여백이 갖는 수사학상의 효과를 과학적으로 완전히 분석하거나 설명하기는 어려운 것이 될지 모른다. 그것이 과학적으로 충분히 설명되고 분석될지라도 침묵이나 여백의 수사적인 효과는 어느 편이냐 하면 대개 직관이나 직감의 산물은 아닐까. 그것은 엄밀한 계산의 산물이기보다는 비약적인 암산의 산물은 아닐까. 타고르는 "서양 정신은 계산하는 정신이며, 동양 정신은 암산하는 정신"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래서 서양화는 언어(색채나 선)로써 전부를 계산하는 표현을 갖는 데 비하여 동양화는 여백이나 침묵으로써 암산하는 표현을 남겨 놓은 것일까.

 

동서를 막론하고 문학이 걸어온 길을 살펴보면 그것은 언어로써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언어로써 설명해 가는 방향을 발전시켜 왔다고는 볼 수 없을까. 인간의 외부 표현에만 그 기능을 발휘했던 고대 문학은 인간의 내부를 설명하지 못했다. 근대 문학은 그것을 설명해 주고 있다. 음악이 갖는 청각적 분야를 정복한 언어 활동이 근대 이후의 문학에 있어 회화적인 시각적 분야에까지도 자신의 기능을 확대시킨 것은 무엇을 말해 주는 것일까. 언어의 이와 같은 기능의 확대는 결국은 언어의 기능이 정지될 수밖에는 없었던 침묵과 여백의 분야까지에도 자신의 능력과 기능을 발휘해 보려는 별도의 의지라고 볼 수 없을까. 사실에 있어서 침묵과 여백은 반언어적인 것이 아닌가. 언어가 반언어적인 분야에까지도 자신을 확대시키려는 것은 언어의 본능이 아닐까. 이와 같은 언어의 본능이 문학을 발전시켜 가는 것은 아닐까.

 

문학에 있어서나 회화에 있어서나 또는 그 밖에 다른 예술에 있어서도 침묵과 여백을 이용하는 방법은 많이 줄어 갔다고 불 수는 없을까. 동양화에도 여백은 그전처럼 많이 활용되고 있지 않다. 연극의 여백인, 또는 침묵의 부분인 막간도 무대 양식의 변화와 극 구성의 변모로 많이 축소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언어가 자신의 기능을 확대해 가도 침묵과 여백의 부분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처럼 모든 회화에 있어서나 모든 연극에 있어서나 여백과 침묵에 해당하는 부분은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은 아닐까. 동서를 막론하고 여백을 전혀 남기지 않은 회화는 아직도 없으며 막간의 형식이나 성질이 전혀 없는 연극도 아직은 없는 것이 아닐까, 언어가 아무리 자신의 기능을 확대해 가도 침묵과 여백의 부분이 남게 된다는 것은 문학이나 그 밖에 모든 예술이 아직도 침묵과 여백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정을 증명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이것은 아직도 '언어의 불신'과 '언어의 궁핍'이 남아 있는 증명이기는 한 것이 아닐까. 또한 이것은 언어의 배후에 언제나 '절망과 고독'이 남아 있다는 증거도 되는 것이 아닐까.

 

카뮈는 "인간은 말하는 것에서보다도 침묵함으로써 한층 더 인간적이 된다."는 말을 했다. 인간의 중요한 특성의 하나가 언어에 있다면 카뮈의 이 말은 대단히 역설적인 것이 된다. 그러나 사람이 침묵하게 되는 동기가 언어로서는 해결될 수 없는 그 배후의 '절망과 고독'에 있다면 이것을 이해하고 이것에 공감하는 것이 한층 더 인간을 공감하고 이해하는 것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카뮈의 전기한 말은 조금도 역설이 아닌 것이 아닐까. 이것이 역설이 아니기 때문에 침묵과 여백은 때에 따라 언어나 웅변 이상의 설득력을 갖는 것일까. 그러나 침묵과 여백이 때에 따라 언어나 웅변 이상의 설득력을 갖는다는 것은 어쨌든 하나의 역설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