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과 산문

송수권<蓮葉(연엽)에게>

미송 2009. 3. 24. 09:47

    蓮葉(연엽)에게 / 송수권


    그녀의 피 순결하던 열 몇 살 때 있었다

    한 이불 속에서 사랑을 속삭이던 때 있었다

    蓮 잎새 같은 발바닥에 간지럼 먹이며

    철없이 놀던 때 있었다

    그녀 발바닥을 핥고 싶어 먼저 간지럼 먹이면

    간지럼 타는 나무처럼 깔깔거려

    끝내 발바닥은 핥지 못하고 간지럼만 타던

    때 있었다

     

    이제 그 짓도 그만두자고 그만두고

    나이 쉰 셋

    정정한 자작나무, 백혈병을 몸에 부리고

    여의도 성모병원 1205호실

    1번 침대에 누워

    그녀는 깊이 잠들었다

    혈소판이 깨지고 면역체계가 무너져 몇 개월 째

    마스크를 쓴 채, 남의 피로 연명하며 살아간다


    나는 어느 날 밤

    그녀의 발이 침상 밖으로 흘러나온 것을 보았다

    그때처럼 놀라 간지럼을 먹였던 것인데

    발바닥은 움쩍도 않는다

    발아 발아 가치마늘 같던 발아!

    蓮 잎새 맑은 이슬에 씻긴 발아

    지금은 진흙밭 삭은 잎새 다 된 발아!

    말굽쇠 같은 발, 무쇠솥 같은 발아

    잠든 네 발바닥을 핥으며 이 밤은

    캄캄한 뻘밭을 내가 헤매며 운다


    그 蓮 잎새 속에서 숨은 민달팽이처럼

    너의 피를 먹고 자란 詩人, 더는 늙어서

    피 한 방울 줄 수 없는 빈 껍데기 언어로

    부질없는 詩를 쓰는구나


    오, 하느님

    이 덧없는 말의 교예

    짐승의 피!

    거두어 가소서.

     

     

     

     

     

'운문과 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연현<침묵과 여백>  (0) 2009.03.25
이규태 <헛기침으로 백 마디 말을 한다>   (0) 2009.03.25
박경리<옛날의 그 집>  (0) 2009.03.24
황지우<자물쇠 속의 긴 낭하>   (0) 2009.03.24
김동리<등신불>  (0) 2009.0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