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견의 기쁨

궁상각치우 민족의 정단과 이단 노래

미송 2011. 6. 20. 13:30

구한말 조선을 찾아와 복음을 전하던 구미 선교사들에게는 한가지 예기치 않았던 고민거리가 생겼답니다. 구원의 말씀과 함께 그 복음을 받은 기쁨을 표현하기 위한 찬송가도 함께 가르쳐야했건만

왠일인지 이 백의민족 조선인들은 서양음계에 의한 찬송가를 제대로 부르지 못한다는 것을 발견하였고 아무리 애를 쓰고 가르쳐도 정확한 음이 나오지 않아 그들은 크게 상심했고 무척 한심하게 생각했으며 그러한 사실을 본국에도 격한 감정을 담아 전하던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그러고나서 시간이 흐르며 인내로써 기다리던 그들 선교사들이 갑자기 발견한 새로운 사실이 또 있었는데 찬송가 중 일부 곡들은 기가막히게 잘 부른다는 사실이었고 왜 그러한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는 가를 조심스레 연구한 일부 선교사들에 의해 깨달은 바는 이 조선 민족은 도레미 서양음계와 다른 궁상각치우 오음계의 민족이었음을 알았다고 합니다. 이후부터는, 선교사들이 직접 난해한 부분을 오음계로 각색해 고쳐 부르게 했고 조선인들도 미묘한 반음계는 스스로 편한대로 바꾸어가며 찬송가를 부르며 갈등이 해소되었다고 합니다.

 

 

 

이제는 새로 자라나는 세대들이 서양교육을 열심히 받은 결과 동서양의 노래를 마음대로 구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오음계에서 머물고 반음정만 만나면 헤메고 입 안에서 맴도는 부분이 있으니 신학적 사고라는 부분이 그것이고, 새로이 전달된 기독교의 교리 문제에 있어서 특히 그러하답니다. 즉, 정단과 이단이라는 양 극단 사이에서, 이 나라 조선민족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음치를 자랑하고 있고 기독교 신앙과 신학적 사유에 있어 정단임을 너무나도 자랑스러워하는 만큼이나 이단도 무수한 곳이 이 나라이고 인체에 유해한 배기가스를 배출하지 않고는 앞으로 전진하지 못하는 자동차마냥 이 나라의 기독교와 교회는 이제 이단을 자양분으로 하여 더욱 성장이 촉진되는 기이한 메카니즘에 익숙해져 있으며 정단이 되기 위해서는 이단임을 포기해야하고, 한번 이단이면 영원히 정단이 아님을 각오해야 하는 곳이 되었고 더욱 교활한 이들은, 이단에서도 정단과 이단을 가르고 정단에서도 그러한 나홀로 정단 병자가 많은 곳입니다.

 

궁상각치우에 길들여져 그 이상의 음계를 부르지 못하고 반음은 더더욱 생소한 이 민족, 정단이 아니면 이단이고, 이단이면 정단 아니라는 오음계 사고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는 민족 그들에게는 정단도 아니고 이단도 아닌 그러한 경지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고 종교와 신앙의 영역에서는 근본적으로 정단도 없고 이단도 없음은 더더욱 이해하기 힘들 뿐입니다. 그렇다고, 정단도 이전에 이단이었고, 이단도 세월이 가고 잘 하면 정단으로 인정받는다는 통일교식 호교이론이 아니라 애초부터 정단과 이단이라는 길 자체가 없어 들어섬도 선택도 없어야 마땅한 경지를 말하고자 합니다.

 

좋은 의도로 처음 출발하던 것이 아리랑 고래를 스리슬쩍 넘는가하더니만 어느새 요상하게 변하고 변질되는 현상이 흔한 곳이 이 땅임을 이곳에 사는 우리들은 잘 압니다. 기독교 신앙을 함에 있어서도 정단이 되고자 애쓰는 노력은 이단을 멀리하고 경계하는 것과 병행되고 있고 실제로 수많은 이단들은 우리 주변에서 누가 보아도 심할 정도로 극단적인 선택과 주장을 하는 것이 사실이나 그들도 지난날을 따져들어가면 한결같이 좋은 의도와 순수한 신앙적 동기만이 풍성함을 알 수 있어 북망산에 이유없는 무덤없듯이 애처로운 사연없는 이단 또한 하나없는 곳이 조선이라는 땅이랍니다.

 

 

도레미파솔라시도 8음계에다가 반음계의 거듭 반음계로 노래를 부르는 민족과 궁상각치우 5음계로만 노래를 부르는 민족 간에는 현저한 차이가 있게 마련입니다. 저들 서구인들은 신학이론 이전에 주변 학문으로서의 문학과 철학과 수학과 자연과학이 튼튼히 깔려있고 서구 선교사들이 모두 일반 학문을 이수한 다음에서야 교역자로 헌신한 이들이었음도 그것을 드러냅니다. 그에 반해, 우리의 교역자들은 그렇지 못하며 우리들 신앙인들 역시 지적 배경이 다양하거나 넓지 못합니다. 그러한 교역자와 신도들이 만나 쉽게 산출하는 것이란 드높은 정통신앙 찬양과 배타적 구복신앙이겠고 과격한 구원신화와 종말신앙으로 연일 중무장해가는 이단들은 정단이 역으로 투사된 그림자일 뿐입니다.

 

세상을 치유하기 위해 스스로 치유받아야만하는 병든 자의 길을 걸어가신 것이 그리스도요 세상에 편만한 인생 유전병을 고치려던 의원은 스스로 세상 질고의 십자가를 등에 업고 갈보리를 오르셨습니다. 그에게는 건강과 병이 뒤범벅되고 선악이 극렬하게 교차되는 이 세상 전체가 다 구원의 대상이었고 만생이 거듭되고 만물이 중생되는 이 세상 모두와 이 우주 전체가 다 병을 치유하는 거대한 병원이었습니다. 어린 아이 옆에는 위험물을 미리미리 치워야 안전하듯이, 이 민족에게는 정단의 길도 이단의 길도 아예 가르치지 않는 날이 오기를 기원합니다. 어려운 음계를 소화할 것을 기대하기보다 차라리 고쳐 부르는 것이 더 나은 이 민족은 세대를 바꾸어 서양교육이 일반화되면 자연히 해소될 음치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이 민족이 음치여서가 아니라 교육의 차이에서 비롯된 문제임을 백번 감안한다면 이 민족에게 정단이 무엇이고 이단이 무엇이라는 교육 자체가 불필요하고 위험한 일이기도 합니다. 정단이 됨도 거기에 길이 있어 그러했다면, 이단도 나있던 길 따라 무심코 가다보니 생긴 것이니 정단의 길로도 이단의 길로도 가지말고 오직 그리스도가 가신 길 따라 행하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그리스도는 자기의 시대에 정단이었던가 이단이었던가를 물어서도 안되는 것이 그 분에게는 정단도 이단도 없이 오직 길따라 이리저리 헤메는 어린 양만 보이던 목자의 심정만이 있었고

그 분이 만일 오늘이라도 이 땅, 정단과 이단이 풍성한 조선에 오신다면 요상한 이단을 꾸짖는만큼이나 당당한 정단도 꾸짖으실 것이 분명합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는 기독교인이신 적도 기독교의 정단이신적도 없으신 분이시기에 그러하고 자신이 기독교인이신 적 없으신 분이 조선의 잘난 기독교인들을 얼마나 알아보실지와 그들의 머리 속에 있는 그리스도상은 더더욱 이질적으로 보이실 것이 분명하니 그저 고이한 민족의 고이한 기독교가 될까 두렵습니다.

 

궁상각치우의 민족에게는 정단 아니면 이단이라는 양극 논리가 가장 편한 법이고 그 중간도 없고 둘 다 없는 미묘한 경지는 불가능의 음역일 뿐입니다. 어려운 노래를 부르지 못해 절망하는 자는 되돌아가 휴식함이 필요하겠고 부를 수 있는 입과 성대를 가진 자들은 들을 귀 가진 자들의 길을 계속 감이 필요한 지금입니다.

 

[2008.2.21. 콜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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