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견의 기쁨

클린트 이스트우드

미송 2011. 6. 23. 18:02

 

[클린트 이스트우드 A to Z①] 황야의 무명씨의 파란만장한 성공기

 


Anchor l 정신적 지주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만약 세르지오 레오네를 만나지 못했다면, 우리는 지금의 그를 만날 수 있었을까? 그의 찌푸린 얼굴에서 영화적 영감을 발견한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은 클린트 이스트우드에게도, 우리에게도 은인이다. 그간의 엄숙한 서부극과 달리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마카로니 웨스턴’은 생존과 작은 이익 앞에선 적도 친구도 없는 무법의 세계를 비웃는다. 판초를 두르고 시가를 씹어 피우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무표정은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에 의해 서부의 새로운 얼굴로 자리매김했다. 레오네 감독과 함께한 서부 3연작 <황야의 무법자> <석양의 건맨> <석양의 건맨 2>(라는 무미건조한 한국 제목으로 개봉한 )는 이스트우드의 거친 매력의 진수다.

 

Birth l 출생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탄신일’은 1930년 5월 31일로 올해 연세가 81세!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출생 당시 몸무게가 5킬로그램이 넘는 초우량아였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일자리를 따라 여기저기 이사를 다니기 바빴던 그는 10대 중반 오리건 주에 정착했다. 소년 이스트우드는 학교에서 뮤지컬 연기와 음악, 운동에 재능을 보였지만,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예술 분야로 진로를 결정하진 못했다.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벌던 그는 1948년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독립해 시애틀로 떠난다. 하지만 열여덟 살의 소년에게 세상이 녹록할 리 없을 터. 경비원 생활을 하며 생계를 꾸리던 그는 1950년 군에 입대한다. 제대 후 LA로 거처를 옮긴 이스트우드는 본격적으로 배우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Changeling l 체인질링

1928년 뒤바뀐 아들을 찾기 위해 정부와 길고 긴 싸움을 벌여야 했던 어머니의 실화를 영화로 옮긴 작품으로,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이 처음으로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이기도 하다. 그간 강렬한 여전사 이미지를 굳혀 온 안젤리나 졸리가 아들을 잃어버린 어머니 크리스틴을 연기하며 가슴 절절한 모성애를 선보인다. 하지만 <체인질링>(2008)이 집중하는 것은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신파가 아니다. 이스트우드 감독은 오히려 냉철하게 사건의 핵심을 파고든다. 문제는 아이를 잃은 어머니의 슬픔이 아니라,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진실을 은폐하는 권력의 폭력. <체인질링>에서 크리스틴은 결국 아이를 찾지 못하지만, 무능한 정부를 무릎 꿇게 만든다. 사회의 폭력을 묵과해선 안 된다는 감독의 강한 신념이 읽히는 대목이다. <체인질링>으로 처음 이스트우드 감독과 함께한 안젤리나 졸리는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신사를 만났다”는 말로 그를 칭송했다.

 

Dirty Harry l 더티 해리

이스트우드에게 첫 번째 은인이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이라면, 두 번째 은인은 <더티 해리> 시리즈의 돈 시겔 감독이다. <더티 해리>에서 이스트우드는 다혈질의 터프 가이 해리 칼라한을 연기한다. 그는 사투 끝에 연쇄살인범을 체포하지만 부패한 상부에 의해 범인이 풀려나고, 자신은 과잉 수사로 징계를 받는다. 분노한 칼라한은 개인적으로 범인을 추격하고, 자신의 매그넘으로 범인을 단죄한다. 당시 평단은 “끔찍한 파시스트의 폭력”이라며 맹비난을 퍼부었지만, 명대사 “덤벼보시지!”(Make My Day!)를 유행시킨 <더티 해리>의 인기는 17년간 다섯 번의 속편으로 이어졌다. <더티 해리>의 칼라한은 이후 ‘망나니 형사’의 롤 모델이 되었다.

 

Emotion Acting l 감정 연기

초기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연기는 “빳빳한 나무 막대기 같다”는 혹평을 들어야 했다. 특히 그를 ‘영화배우’로 알린 <황야의 무법자> 시리즈에 대해 평단은 “그는 얼굴을 찌푸리고 서 있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른다”고 비난을 퍼부을 정도였다. 이스트우드와 함께 1960년대를 호령했던 말론 브랜도가 펄펄 끓는 감정을 드러내며 스크린을 후끈 달아오르게 만든 것에 비하면, 침묵과 무표정으로 일관하는 이스트우드의 연기가 “감정이라곤 도무지 읽을 수 없다”는 평가를 받은 것도 이해는 된다. 하지만 이스트우드는 감정을 폭발시키는 연기만이 좋은 연기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는 “연기는 고함치고, 울부짖고, 땅 위를 데굴데굴 구르며 감정을 쥐어짜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확실히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스크린 위에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자르르한 전율을 일으키는 배우다. 그리고 관객은 어려움 없이 그의 무표정 아래 일렁이는 용암 같은 감정을 읽어낸다. 결국 그가 옳았다.

 

Freak l 핑크 캐딜락

태어날 때부터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었을 듯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코미디’가 보고 싶다면? 방법은 <핑크 캐딜락>이 유일하다. 그는 이 영화에서 현상금 사냥꾼 토미를 맡아 생애 최초로 ‘어벙한 표정’을 선보인다. 토미는 어느 날 보석금을 갚지 않고 도망친 여자 루앤(버나뎃 피터스)을 잡아달라는 제안을 받는다. 한편 갱단도 루앤의 뒤를 쫓는다. 그녀가 타고 달아난 ‘핑크색 캐딜락’에는 조직의 비자금 25만 달러가 숨겨져 있었던 것. 추격전이 벌어지고, 토미와 루앤이 사랑에 빠진다. 이야기는 허술하고, 액션은 유치하고, 영상은 촌스럽지만, 얼빠진 표정의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보는 신기함이 쏠쏠하다. 그가 다신 코미디 연기를 하지 않은 건 현명한 선택인 듯.

 

Gran torinol 그랜 토리노

젊은 시절을 총질로 흘려보낸 노인의 후회를 구태여 설명할 필요도 없다. 백발이 성성한, 하지만 젊은이들도 위압감을 느낄 만큼 기골이 장대한 노년의 이스트우드가 화난 짐승처럼 낮게 으르렁대며 라이플을 드는 것만으로, 모든 설명이 끝난다. 그야말로 최적의, 최고의 캐스팅이다. 더불어 최고의 회고록이다. <그랜 토리노>(2008)는 그간 감독 이스트우드가 집중해 온 주제, 우정과 성장, 폭력과 희생, 죽음과 구원에 대한 모든 것을 함축한다. 월트 코왈스키가 적진 앞에 라이플을 들고 섰을 때, 그의 얼굴에 미소가 잠시 스친다. 늙은 마초의 마지막 승리를 알고 있다는 듯. 이스트우드는 “이 작품이 나의 마지막 출연작이 될지도 모른다”고 말했지만, 제발 그런 일은 없기만을 바랄 뿐이다.

 

Home, Tough Home l 험난한 가정사

2000년 그의 가정사를 폭로(?)한 전기 <클린트: 삶과 전설>이 할리우드를 발칵 뒤집었다. 저자 패트릭 맥길리건은 이 책에서 “이스트우드가 첫 아내 매기 존슨을 기절할 때까지 폭행한 적이 있으며, 결혼 생활 중에 다른 여성들과 외도를 벌였다”고 주장했다. 이스트우드는 당장 명예훼손으로 1,000만 달러의 소송을 제기했다. 승자는 이스트우드! 2년간의 법정싸움 끝에 법원은 “왜곡된 사실을 포함한 전기를 발행한 출판사와 작가에게 명예훼손 발언을 모두 삭제할 것”을 명령했다.

 

In the Line of Firel 사선에서

과거의 그림자에서 자유롭지 못한 늙은 영웅. 1990년대부터 시작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퇴락한 영웅’ 이미지가 가장 매력적으로 드러난 작품은 <사선에서>(1993)이다. 케네디 대통령의 경호원이었던 프랭크는 대통령 암살 사건을 겪고 자책을 이기지 못해 은퇴한다. 시간이 흘러 노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죄의식을 떨치지 못하던 그는 우연히 대통령 암살 계획을 알게 된다. 이를 막기 위해 프랭크는 대통령 경호실로 돌아가 범인과 마지막 대결을 준비한다. <사선에서>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대통령을 근접 경호하며 차와 함께 뛰던 프랭크가 차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멈춰 서는 장면이다. 점점 멀어져가는 차를 보며 무릎을 짚고 선 프랭크의 얼굴에 스치는 회한이 이스트우드의 깊은 주름 사이로 굽이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A to Z③]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모든 것

 

Romanticist l 로맨티시스트


세상의 무거운 짐을 지고, 긴 그림자를 드리우며 홀로 떠나는 남자의 뒷모습. 고독은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을 따라다니는 익숙한 이름 중 하나다. 언제나 혼자일 것 같은 그의 필모그래피 속에도 멜로는 있다. 그의 출연작 중 거의 유일한 정통 멜로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1995).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메릴 스트립, 연기의 신들이 만나 잊을 수 없는 이별의 순간을 남긴 영화다. 이 영화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전에 보여주지 않았던, 격정적인 로맨티시스트의 몸짓을 선보인다. 프란체스카(메릴 스트립)와의 첫 만남부터 그녀를 향해 뜨거운 눈길을 전하던 로버트(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모습은 신선하기까지 하다. 빗속에서 프란체스카가 탄 자동차가 떠나는 모습을 한없이 좇던 로버트의 마지막 눈길은 로맨티시스트 이스트우드의 진가를 확인시킨다.

Space Cowboy l 스페이스 카우보이
퇴역 카우보이를 향한 애정은 그의 첫 SF 영화 <스페이스 카우보이>(2000)로 이어진다. 1958년 세계 최초의 ‘우주인’이 되기 위해 맹훈련을 받던 미 공군 최정예 부대 멤버들은 “첫 우주선의 탑승자는 침팬지”라는 발표에 경악한다. 이후 40년이 흐르고, 2000년 왕년의 에이스들은 국방부의 긴급 호출을 받는다. 구 소련의 통신위성이 고장을 일으켜 자칫 지구와 충돌할 위험에 처했다는 것. 하지만 이 구닥다리 통신위성을 고칠 수 있는 사람은 설계자인 프랭크(클린트 이스트우드)뿐이다. 그는 이젠 노인이 되어버린 옛 동료들을 모아 우주로 간다. 이스트우드를 비롯해 토미 리 존스, 도널드 서덜랜드 등 노련한 배우들의 연기는 명불허전. 청년의 심장을 가진 노인의 얼굴을 건져올리는 건, 이스트우드 감독을 따를 자가 없다.

Trademark l 트레이드마크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영화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다들 가슴속에 잊지 못할 상처 하나씩을 묻고 있다. 반드시 한 번은 주인공의 그림자만이 길게 화면을 채운다. 대부분의 영화는 주인공의 죽음으로 시작하거나 끝을 맺고, 살아남는다고 해도 언제나 혼자다.

Unforgiven l 용서받지 못한 자
첫 오스카를 받은 작품. 과거 악명을 날리던 무법자 윌리엄(클린트 이스트우드)은 이제 시골에서 가족과 함께 돼지 농장을 하는 촌부 신세. 하지만 전염병이 돌면서 돼지들이 죽자 윌리엄은 생계를 위해 ‘왕년의 무법자’ 생활을 재개한다. 그는 은퇴한 흑인 총잡이 네드(모건 프리먼)와 함께 현상금 사냥에 나서지만, 늙고 힘없는 카우보이가 누빌 황야는 없다. 1960년대 최고의 ‘황야의 무법자’가 30년 뒤 늙은 육신을 화면에 드러내며 “영웅 따위는 없다!”고 외치는 <용서받지 못한 자>는 감독이 자신의 ‘서부 시절’을 반추하는 작품이다.

Victory of War? l 전쟁의 승리?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은 2006년 두 편의 전쟁 영화를 잇달아 내놓는다. <아버지의 깃발>과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는 1945년 이오지마 전투를 소재로 한 전쟁 영화로, 전작은 미국인의 시점에서, 후작은 일본인의 시점에서 전쟁을 바라본 영화다. 1950년 직접 군 생활을 겪은 그에게 ‘전쟁’은 피상적인 기억이 아닌 생생한 현실이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간략하고 분명하다. 전쟁에는 승리도, 영웅도 없다는 것.

Western Hero l 웨스턴 히어로
애니메이션 영화 <랭고>에는 ‘서부의 영혼’이라는 캐릭터가 등장한다. 이 캐릭터가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향한 오마주라는 건, 자명하다. 1960년대 그는 서부의 얼굴이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이름 없는 무명씨’로 등장하는 <황야의 무법자> 3부작에서 그는 ‘착한 놈’과 ‘나쁜 놈’ 중 굳이 한 편을 고르라면, ‘나쁜 놈’에 가까워 보이는 무법자다. 하지만 관객들은 쉽게 영웅이라 부를 수 없는, 이 삐딱한 사내에게 열광했다. 선악을 구분하고, 내 편과 네 편을 가르는 세상을 비웃듯 유유자적 활보하는 아나키스트적 매력 때문이다.

Xtreme Long Shot l 사색하는 롱 샷
이스트우드 감독 영화는 종종 인상적인 롱 샷으로 기억된다. 카메라가 뒤로 물러나면 공간 속에 묻어 있는 인물들의 감정이 휘몰아치는 것이 특징. 가장 최근작 <히어애프터>에서도 이스트우드 감독의 사색하는 롱 샷이 빛을 발한다. 죽음을 경험한 여자와 죽음을 나눈 소년, 죽음 너머를 바라보는 남자의 이야기가 스치듯 흐르다가 결국 하나의 물줄기를 이루는 <히어애프터>는 그들을 지긋이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이 롱 샷으로 이어지며 잔잔한 여운을 남긴다.

Youth l 청년 시절
청년 시절의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한마디로 ‘비전 없는 배우’ 였다. 키는 껑충하게 크지만, 전형적인 미남이라고 하기엔 너무 날카로운 얼굴의 남자 배우는 멜로가 대세인 1950년대 할리우드에서 환영받기 어려웠다. 단역 오디션을 전전하던 끝에 이스트우드가 만난 영화는 1955년 작 B급 괴수 영화 <타란툴라>. 비록 크레딧에 이름도 올리지 못한 단역이었지만, 그는 실망하지 않고 차곡차곡 필모를 쌓아간다.

Zealous Step l 열정적인 행보
최근 이스트우드 감독의 행보는 어느 청년 감독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을 만큼 열정적이다. 2004년 <밀리언 달러 베이비>를 시작으로 매해 한 편에서, 많게는 두 편씩 영화를 내놓고 있다. 만드는 족족 ‘걸작’ 소리를 듣는 상황에서 창작의 에너지까지 넘치니 관객들은 즐거운 환호를 지를 일만 남았다. 현재 차기작은 FBI의 창립자인 에드거 후버의 전기 영화와 왕년의 인기 스타와 신인 여배우의 순애보를 그린 <스타 탄생>. 전기 영화에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스타 탄생>에는 비욘세 놀즈가 출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