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견의 기쁨

이중섭(李仲燮)의 삶

미송 2011. 6. 22. 08:06

 

 

 

 

 

"그대에게 가는 길이 멀고도 멀었소"

 

이중섭(李仲燮)

 

그가 살았던 격랑의 시대, 이별로 점철된 예술가의

 

 

대향(大鄕) 이중섭(李仲燮, 1916 - 1956).

 

 

 

이중섭은 1916년 4월 10일, 평남 평원군 조운면 송천리에서 부농 이희주와 안악 이씨 사이의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조부는 집안을 일으켜 세운 강직하고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였으나 부친은 병약한 체질이었던 듯하다. 일설에는 우울증이 심했다고도 하고 또 다른 전하는 말로는 정신 이상 증세가 있었다고도 한다. 이중섭의 정신이상 현상은 그의 부친으로부터 유전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없지 않다.

 

유복자로 태어난 중섭에게는 12살 위인 형 중석과 6살 많은 누님 중숙이 있었다. 중섭은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여 사과를 주면 먹기 전에 그리고 나서 먹었다고 한다. 어릴적엔 마을 서당에 다니다가 1925년 평양의 이문리에 있었던 외가로 가서 종로 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거기서 선국적인 유화가 김찬영의 아들이며 뒤에 화가가 된 김병기와 한 반 친구가 되었다. 그는 친구 김병기의 집에 놀러가서 김찬영 화백의 미술서적과 각종 미술도구를 구경하기도 했다. 이 즈음 그는 운동과 그림 그리기에 몰두하였는데 벽화가 그려진 고구려 유적의 무덤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한다.

 

 

‘투계’

두 마리의 닭이 서로 싸우고자 덤벼드는 설정이다.

푸르고 붉은 빛깔로 그린 닭 부분이 충분히 마른 뒤, 그 위에 덮은 검은 빛깔이 마르기 전에

물감칼로 덮은 물감을 긁어냄으로서 완성하는 과정을 거쳤다. 조응하는 색깔과 태세로 보아

고구려 무덤벽화에 나타나는 색채적, 조형적 특징을 계승한 것이라 보인다.

 

 

그가 지내던 외가의 외조부는 관서 지방에서 기반을 다진 명망있는 경제인으로 알려져 있었다. 보통학교 동기인 김병기의 증언에 의하면 “그의 결코 평탄할 수 없는 생애의 시초는 그러한 가정적 환경에서 비롯되지만, 인격 형성은 보다 국민학교 시절이 절실하지 않았을까. 즉 그는 8세에 슬하를 떠나 평양에 나와 외가에 머무르면서 종로공립보통학교를 다녔는데, 말하자면 부유한 친척의 그늘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기 때문에 정신적인 위축과 격분으로 애타면서 자랐는지도 모른다.”

 

혹시 외가에서 괄시를 받았지 않았나 하는 주변의 시선도 없지 않으며, 내성적 성격의 소유자가 대가족이 모여 사는 외가에서 자칫 외톨이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란 짐작을 갖게 한다. 그림에 대한 재능은 물론 타고난 것일 테지만 이 같은 외부의 환경도 그가 화가로서의 길을 결정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유복자로 태어나 연령차가 많은 형과 누나가 있었다는 집안의 환경과 소년 시절을 외가에서 보냈다는 사실 등이 자기만의 작업에 골몰할 수 있게 했을 것이다.

 

그림에 대한 재능은 이미 보통학교 시절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주변은 말하고 있다. 같은 반에 있었던 김병기는 “4학년 때에 벌써 학교에서는 그림 하면 이 홍안의 미소년을 으레 첫손으로 꼽았다.” 고 증언하고 있다. 김병기는 그가 편협하리 만큼 그림에 열중한 탓으로 중학교 입시에 고배를 마셨다고 증언하고 있다.

 

 

‘황소 (1954)

대표작인 소 그림을 그리던 이 시기에 이중섭은 경남 통영에서 작품 제작에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었다. 조선 땅 특유의 힘찬 황소의 모습을 보고있노라면

그가 그림을 통해 우리 민족의 기상을 불어넣으려 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이 시기는 그의 예술적 기량이 집결되는 때였다. 

 

 

1931년,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이중섭에게 있어서  오산학교로의 진학은 그의 인생관과 예술관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이 주위의 증언이다. 선생들도 민족의식이 투철한 인사로 짜여져 있었다. 이중섭이 일찍이 향토적 소재에 탐닉할수 있었던 것도 전적으로 오산학교 교육의 감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다 그가 미술의 새로운 경향에 일찍이 눈뜰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오산학교에 미술교사로 부임해온 임용련에 의해서다. 당시 대부분의 중학교 미술 교사란 일본에서 온 이들인데 반해 미국 유학에다가 유럽 화단에서 활동하고 돌아온 임용련의 존재는 확실히 이채롭다.

 

 

임용련(任用璉,1901.3.18 -  ? )

 

임용련은 배재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3.1운동에 적극 참여했다가 중국으로 도피한 후, 1922년 임파라는 중국 이름으로 가짜 여권을 만들어 미국으로 갔다. 그곳에서 시카고 미술학교를 졸업한 후 예일대학교 미술대학에 3학년으로 편입하여 드로잉과 유화를 전공하였다. 임용련은 귀국 후인 1930년 우리나라 최초의 <부부전>을 열어 장안의 화제가 되었으며 1931년부터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에서 미술, 영어교사로 재직하면서, 이중섭, 승동표, 문학수 등의 제자를 배출하였다. 그는 이중섭에게 "밑그림을 바닷가의 모래알보다 더 많이 하여라. 그런 다음에 네 예술이 있다"는 말로 드로잉의 중요성을 강조했다고 이중섭이 회고했다.

 

 

이중섭은 임용련 백남순 부부의 집중적인 미술지도를 받았다. 그의 미술 교육이 어떠했는지 소상히 길은 없으나 이중섭으로 하여금 새로운 미의식에 눈뜨게 것을 보면 상당히 진취적 미감각을 소유하고 있었지 않나 생각된다. 자신이 후기 인상파의 영향을 받은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개성 위주의 교육 방법을 지니고 있었지 않았을까 유추케 한다.

 
이즈음 중섭은 식민당국의 우리말 말살정책에 반발해 한글 자모로 된 그림을 그리다 이후에는 한글로 이름 쓰기를 실천했는데 이때부터 소를 즐겨 그리기 시작했다. 2학년 때인가 3학년 때 다쳐서 1년간 학교를 쉬기도 했다.

 

1934년, 중섭은 일본회사의 보험금을 타서 학교를 재건하겠다는 의도로 친구들과 교사에 불을 질렀으며 졸업기념 사진첩에 일제에 항거하는 그림을 그려 물의를 일으켰다.

 

1935년, 졸업 후, 곧 일본 도쿄로 가서 테이고쿠 미술학교에 입학했다가 쉬면서 프랑스어 공부에 몰두했다. 다음해에 자유적이고 개방적인 분카 가쿠엔(문화학원)으로 옮겨 입학했다. 김병기와 오산의 선배 문학수 그리고 유영국이 당시에 상급생으로 있었다. 강사로 나오던 쓰다 세이슈와 친밀하게 지냈으며 기츠조지의 아파트에서 자취생활을 했다.

 

이중섭이 문화학원에 입학한 것은 1936년으로 바야흐로 전위적인 활동이 일본 화단을 풍미할 즈음이기도하다. 그러니까 이중섭은 아카데미즘에 대항한 재야 운동이 가장 왕성하게 분출하던 시기에 일본에 떨어졌고 그러한 전위 미술 운동에 가장 적극적으로 호응하고 있었던 자유분방한 분위기의 문화학원에 적을 두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분위기는 한 사람의 뛰어난 의식을 고취시키기에는 충분한 것이었다.

 

일본 추상미술의 거점이라고 할 수 있는 자유미협이 1937년에 출범하였을 때 이중섭은 몇 차례의 출품을 통해 회우로서 받아들여지게 된다. 이로 미루어보아 이중섭의 예술가로서의 형성은 오산학교의 민족주의적 의식에다가 문화학원의 진취적인 의식이 가미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당시 문화학원에 있었던 쓰다 세이슈란 전위적인 작가가 있어 이중섭은 그에게 많은 영항을 받은 것 같다.

 

 

달밤 (1953)’

구름에 쌓인 달을 발가벗은 한 아이가 누워서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다.

그려진 달과 구름은 전통적인 소재이면서도 그 표현 또한 전통적인 문양의 느낌을 주고 있다.

이중섭 특유의 넉넉한 미소의 아이가 달밤과 너무나 자연스럽게 동화되어 있다.

 

 

문화학원에서는 “루오처럼 시커멓게 데생하는 조선 청년이 나타났다.”고 이중섭의 등장을 알리고 있다. 김병기도 당시 이중섭의 작품 성향을 “피카소와 같은 조형성과 루오의 선감이 함께 어울려 있다. 그래서 그 바탕을 이룬 것은 야수파적인 감성의 세계”라고 회고하고 있다. 피카소와 같은 조형성이란 입체파적인 이지적 조형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중섭의 작품에서 엿볼 수 있는 양식화의 작품이 이같은 피카소의 조형성과 관련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루오의 선감이란 강인하면서도 활달한 선감을 지칭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루오의 수채화에서 엿볼 수 있는 분방한 선감은 이중섭의 1950년대 작품 속에서 볼 수 있는 분방한 선조의 수성에서 두드러지게 발견되고 있다. 야수파적인 감성의 세계란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이중섭의 체질적인 일면이 야수파의 그것과 일치됨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색채를 통한 감성의 해방을 구가하였던 야수파의 자유로운 표현은 동양인의 직관적인 태도와 일치되므로 쉽사리 야수파에 경도될 수 있었을 것이다.

 

 

‘춤추는 가족’

 

 

1910년대 이후부터 1930년대 후반까지 일본의 재야 미술운동 가운데 유독 야수파적인 경향이 크게 추세되었던 요인도 동양인 보편의 직관적인 태도가 야수파의 자유 분방한 직화 태도와 스스럼없이 동화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의 전위 미술 운동 참여자 가운데서 유독 야수파적인 경향이 우세했던 점도 일본의 사정과 유사하다. 그런가 하면 김병기가 지적하고 있듯이 이중섭의 그림은 “색채와 형태를 분방하게 휘젓고 있는 한편 동양화가 갖고 있는 형식적이고 꿈에 잠긴 듯한 특질을 거의

완전 무결하게 곁들이고 있다.”

꿈에 잠긴 듯한 특질은 무엇인가. 아마도 그것은 이중섭의 전 작품을 관류하는 약간 퇴락한 듯한 색조의 은은함을 지칭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한 색조의 은은함의 조성은 어디에서 기인된 것 일가. 김영주는 이 점에 대해 주요한 증언을 하고 있다.

중섭의 미술 세계는 처음에는 피카소와 고갱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 자국은 오래가지 않았다. (중략) 그러나 중섭이는 무엇보다도 고구려 벽화, 특히 강인한 선조와 원근감이 평면에서 처리된 고대 북방 계통의 그림의 방법에서 그의 그림의 본질을 터득했다.

 

 

‘나무와 달과 하얀 새’

 

 

1637 전후는 일본 화단에서 이른바 신감각을 표방한 단체들이 속출했던 시대였다. 이로써 추상계의 자유미술가협회(지유미즈츠가쿄카이, 自由美術家協會) 초현실계의 미술문화협회 그리고 이두 경향을 포괄한 구실회라고 하는 커다란 구도가 이루어졌다.

 

1938년, 이중섭은 일본인 화가들이 창립한 단체 지유미즈츠가쿄카이(自由美術家協會, ‘지유텐’)의 2번째 공모전(이하 지유텐)에 응모하여 첫 출품에 협회상을 받았으며 동시에 평지들의 대호평을 획득하게 되었다.

 

사실 자유미술가협회(지유미즈츠가쿄카이, 自由美術家協會, ‘지유텐’) 순수한 추상미술가들의 모임도, 미술문화협회가 순수한 초현실계만의 결성도 아니었음은 자유미술가협회에 참가한 이중섭 문학수가 추상작가가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구상 계열, 표현파 학풍의 구상이었다는 데서도 판명된다.

 

이즈음에 중섭은 후배인 일본 여성 야마모토 마사코를 알게 되어 사귀기 시작한다.

 

“어느 날 학교 뜰에서 남학생들이 배구를 하고 있었는데, 마음에 드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키가 훤칠하고 잘생긴 청년이었죠. 그땐 그가 조선인인 줄도 몰랐어요. 못하는 운동이 없었죠. 권투도 잘했고 철봉, 뜀박질… 그뿐 아니라 노래도 잘 불렀습니다. 저 말고 다른 여학생들도 그에게 관심이 있는 눈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실기수업이 끝나고 붓을 빨게 되었는데, 옆에서 그도 붓을 빨고 있었죠. 우린 단 둘이었고, 그가 자연스럽게 말을 걸어왔어요. 그 때부터 다방 같은 데서 자주 만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보들레르나 발레리, 릴케, 베들렌느의 시를 암송해서 들려주곤 했죠. 소설보단 시를 좋아했습니다. 어떤 때는 릴케의 시구를 아주 정갈하게 베껴 주었는데, 외우라는 뜻이었는지… 인품이 좋았다고 할까요.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다는 뜻이고, 어떻든 천한 느낌을 주는 데가 하나도 없었어요. 일본학생들이 그의 집을 찾아가 보면 방이 재떨이 속처럼 어지렵혀져 있는데도 그 한가운데 난초가 자라나고 있다더군요.”

 

이중섭의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가 ‘계간미술(1986 여름)’에 남긴 회고다.

 

 

이중섭의 20대 모습. (오른쪽)    

 

 

1940년 그는 졸업하고 도쿄에 머물면서 미술작업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전에 이어서 토오쿄오와 경성에서 열린 4번째 지유텐에 <서있는 >, <망월>, <소의머리>, <산의 풍경> 내어 커다란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화려하게 꽃 피어나던 진취적 미술사조의 난만한 분위기는 조만간 군국주의의 보국 체제 밀려 여지없이 붕괴되고 만다. 1940년 들어가면서 자유전이라는 명칭에서 자유란 말조차 기피할 정도로 경직된 분위기로 전환되어 갔다.

 

 

‘망월 (1940)’

달을 보라고 외치며 잠자는 사람을 깨우려는 새는 무엇을 의미할까? 라는 부제를 가지고 있다.

물가에 한 여인이 염소에 기대에 누워있고, 새 들 중 한 마리가 오른 쪽에 있는 달을 향해

소리를 지르고 있다. 동경 유학시절에 그린 그림으로 1940년 전시회 출품작이다.

 

 

이중섭이 26세가 되던 1941년, 일본에 있던 미술유학생인 김종찬, 김학준, 이쾌대, 진환, 최재덕 그리고 문학수와 더불어 조선신미술가협회를 결성하고 토오쿄오에서 창립전을 가졌다.

 

<연못이 있는 풍경> 출품 하였으며 이어 경성에서 열린 전시에도 출품했다. 한편, 5번째 지유텐에 <망월> <소와 여인> 출품하고 회우로 추대되었다. 이즈음 어머니와 형의 권유로대향(大鄕)’이라는 호를 지었다. 그는 휴가동안 개성박물관에 다니며 스케치에 몰두했다가 도쿄로 돌아갔다.

 

27세이던 1942년, 6번째 지유텐에 회우로서 <소와 아이>, <소묘>, <목동>, <지일(遲日)> 등을 출품했다. 경성에서 식민 당국의 종용으로 신미술가협회로 바뀐 조선신미술가협회전에도 출품했다. 즈음에 시인 오장 , 서정주와 교류한 것으로 보인다.

 

 

‘손(1954)’

왼손과 오른손의 앞뒤를 출렁이듯 휘감은 흰 선들이 등장하는 독특한 그림이다.

진주에서 박생광과 어울리던 시절 그의 친구 청담스님을 만나

느낀 바를 그린 것으로 보이며 불교적인 분위기가 강하다.

 

 

1943년,  7번째 지유텐에 이대향(李大鄕)이라는 이름으로  <소묘1>, <소묘2>, <소묘3>, <소묘 4>, <소묘5>, <망월>, <소와 소녀>, <여인> 출품하여 특별상인 태양상을 수상하고 회원으로 뽑혔다.

 

같은 , 서울에서 3번째로 열린 조선신미술가협회전에 출품하기 위해 조선으로 건너온 중섭은  일본으로 다시 가기를 포기했다. 전쟁터로 끌려가는 징병을 피하기 위해 고아원 등에서 일하기도 했으나, 그림은 거의 그릴수가 없었다.

 

이중섭은 1944년 원산으로 돌아왔다. 원산에 있으면서 연말부터 마사코에게 그림만으로 엽서를 보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쟁 막바지의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도 이들의 사랑은 뜨거웠다.

 

1945년 4월, 마사코가 천신만고 끝에 홀로 현해탄을 건너 이중섭이 있는 원산으로 것이다. 일본 재벌인 미츠이 재단의 한 중역의 딸과 식민지 조선인 유학생과의 열애는 그것 자체가 이미 비극적 씨앗을 배태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중섭은 마사코에게 순한국식 이름을 붙여 주었다. 이렇게 마사코는 이중섭의 아내 ‘이남덕’이 되었다.

 

 

이중섭과 부인 이남덕(야마모토 마사코)씨의 결혼식.

(1945)  

 

이중섭과 마사코의 신혼 시절은  그러나 결코 달콤한 것만은 아니었다. 전쟁말기의 어두운 시대 상황과, 해방과 더불어 찾아온 소련군 진주는 이들의 삶을 결코 순탄하게 그냥 두지 않았다. 소련의 대일 폭격을 피해 이사를 다니며 8. 15 맞이했다.

 

1945 10 이중섭은 서울에서 열린 전람회에 작품을 출품하고, 최재덕과 함께 지금의 서울 미도파백화점 지하에 복숭아나무에 매달린 아이들이 등장하는 벽화를 그렸는데 하루는 명동의 술집에서 친구가 부당하게 여러 사람에게 뭇매질을 당하는 것을 말리다가 순찰중이던 미군정 헌병에게 방망이로 맞아 머리가 터지기도 했다.

 

 

 

‘두 어린이와 복숭아 (1953)’

 

 

그는 벽화 사례금을 받아서 골동품을 사가지고 원산으로 돌아갔다. , 평양  체신회관에서 황염수 등과 6인전을 개최했다.

 

북한 사회는 급속도로 사회주의 체제로 변모되어 갔다. 환멸을 느낀 많은 북한 인민들이 38선을 넘어 월남했다. 그러나 반비례해서 많은 남쪽의 예술가들도 월북했다. 당시 한반도 북쪽은 사회주의 체계이기는 하나 급속도로 빠른 국가 체제 정립과 통제된 사회로 치닫고 있어 나름의 안정 추세를 보여 주고 있었다. 반면 남쪽은 미군정 하에서 무질서가 횡행하고 있었다

 

1946, 원산에서의 이중섭은 원산사범학교의 미술교사가 되었으나 미술작업을 시간이 많지 않자 이내 그만두고 집에서 닭을 키우며 그림을 그리는데 열중하다 이가 옮아 고생을 했다. 아마 어디에도 매이지 않으려는 자유정신이 그를 이토록 순수한 화가로 남게 했을 것이다. 곧 아들이 태어났으나 디프테리아로 아이를 잃는 슬픔을 겪어야 했다. 

 

 

‘닭과 가족(1954년 작)’

 

 

연말에 원산문학가동맹에서 펴낸 공동 시집 응향(凝香)의 표지 그림을 그렸는데, 시 내용과 더불어 표지 그림이 북조선문학가동맹의 규탄을 받아 문초를 받았다. 이후 부인이 일본인 이라고 하여 친일파로 치부되면서 자유롭게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된 이중섭은 자주 술을 마시고 괴로워 하며 더러 주정을 부리기도 했다고 한다. 부인 이남덕의 회고에 의하면 원산 시절 이중섭이 가장 못 견뎌 했던 것은 표현에 대한 억압이었다는 것이다.

 

1947년, 아들 태현이 태어나고 1949년 봄, 아들 태성이 태어났다. 이중섭의 나이는 34세였다. 이미 어엿한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된 어엿한 가장인데도 이들 처자식을 먹여 살릴 능력이 없었다. 부자인 형에게 기식한 것은 아니지만 틈틈이 어머니가 이 막내아들을 돌보았다.

 

이들은 원산 외곽에 있는 송도원으로 이사를 했는데 이중섭이 하루 내내 이웃의 소를 관찰하다 소 주인에게 고발을 당했다. 이즈음 원산에서 가까운 강원도 금성에 살던 화가 박수근과 친하게 되었다.

 

 

‘흰소 (1954)’

이중섭은 청소년 시절부터 줄곧 소를 주의깊게 관찰해왔다.

거친 콧김이라도 뿜는 듯한 소의 콧잔등에서 힘있게 쭉 뻗은 꼬리의 끝까지,

그리고 당당하게 선 네 발과 근육의 표현까지 강하고 율동적인 에너지가 화폭을 가득 채운다.

정말 그는 스스로 말했던 것처럼 조선의 제일가는 소를 그려내었다.

 

 

35세 되던 1950년 6월,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에 가장인 형이 행방불명 되었다. 10월에는  집이 폭격으로 부서져 가까운 친척집으로 가서 머물다가 전세가 바뀜에 따라 남한군이 북진해왔다.

 

12월 초 다시 바뀐 전세에 남한으로 탈출하는 피난민들과 후퇴하는 장병들의 무리를 따라 중섭은 부인과 두 아들, 조카 영진을 데리고 부산으로 피난길에 올랐다. 어머니와 영영 이별이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부산에 도착한 중섭의 가족은 적기에 있는 피난민 수용소에 수용되었다. 중섭은 부두에 나가서 짐 부리는 일을 하면서 피난생활을 시작했다. 이때 껌을 훔친 어린 소년을 붙잡아 마구 때리는 군인을 말려도 듣지 않자 화가 난 중섭이 군인을 때렸다. 매를 맞은 군인이 패를 지어 다시 나타나서 휘두른 총개머리판에 맞아 이중섭은 머리에 큰 상처를 입고 부두 일도 그만 두었다.

 

대부분의 피난민들과 마찬가지로 이중섭은 거렁뱅이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피난 온 화가 동료들과 예술가들을 만났던 것이 위안 이었다. 화가들은 다방에서 개인전도 갖고 그룹전도 가졌다. 일정한 거처가 없으니 누군가가 잘 나가는 다방을 찾을 수 밖에 없었다.

부산에서 몇 달을 머문 후 1951년 초, 이중섭은 가족을 데리고 부산을 떠나 제주도로 떠났다. 아마도 부산의 아우성 속에서 벗어나 안정된 분위기 속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였을 것이다. 아무래도 도시보다는 시골 생활이 여유롭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곁들어 졌을 것이다. 거기다 남쪽, 따스한 남쪽 지방이 아닌가. 

 

 

‘길 떠나는 가족(1954)’

후일, 헤어져 있던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 그림을 그려넣었다.

가족을 소달구지에 태우고 자신은 황소를 끌고

따뜻하고 평화와 행복이 있을 남쪽 나라로 함께 가는 광경이다.

 

 

때묻지 않은 원생의 풍속이 그의 동경을  자극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우선 피난민들의 아우성 속에서, 떠 밀리는 군중 속에서 그림은커녕 제대로 생활도 할 수 없었던 것이 무엇보다 이중섭으로 하여금 현상을 탈출케 한 동기가 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