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과 칼럼

스타인벡의 『에덴의 동쪽』을 통해서 본 '따돌림' 의 의미

미송 2011. 11. 3. 17:32

 

 

스타인벡의 『에덴의 동쪽』을 통해서 본 '따돌림' 의 의미

 

 

 

존 스타인벡(John Steinbeck, 1902~1968)의 소설 『에덴의 동쪽』은 단 세 편의 영화만을 남기고 24살의 나이에 자동차 사고로 요절한 전설적 배우 제임스 딘(James Dean, 1931~1955)의 영화로 더 널리 알려진 작품입니다. 반항과 우수에 가득 찬 눈동자와 정점에서 맞은 그의 극적인 죽음에 의해 신화가 되어 불멸의 세계로 들어간 제임스 딘의 강렬한 이미지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은 단순히 ‘청소년기의 혼란과 반항’의 문제를 다룬 작품이라는 인상을 갖고 있지요.

그러나 그것은 순전한 오해입니다. 이 작품은 우리의 삶에 관한 적어도 두 가지의 근본적이면서도 중요한 문제들이 다루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 중 하나는 원작자 스타인벡이 소설 『에덴의 동쪽』에서 해결하려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엘리아 카잔이 감독으로서 영화 「에덴의 동쪽」에서 초점을 맞춘 문제입니다. 

스타인벡이 1952년 발표한 이 소설은 한 가족의 3대에 걸친 이야기를 전개해가며 인간의 선과 악 그리고 죄와 구원의 문제를 다룬 4부 55장으로 된 장편이지요. 스타인벡은 이 작품에서 죄인, 즉 동생인 아벨을 죽이고 쫓겨나 에덴의 동쪽에 살아야 했던 카인과 그 후예들에게 과연 구원의 가능성이 있는가, 만일 있다면 그것은 어떻게 올 수 있는가를 폭넓게 다루려 기획했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우리 모두가 죄인, 곧 카인의 후예가 아니던가요? 여기에 이 작품이 우리에게 던지는 심각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엘리아 카잔 감독은 1955년 이 소설 가운데 제 4부만을 각색하여 영화화했는데, 그는 영화의 초점을 오히려 ‘거부당하는 자의 고통’에 맞추었지요. 그런데 알고 보면 실낙원 사건 이후 인간은 모두 신으로부터 거부당한 자이며, 또한 실존주의적으로 보더라도 ‘피투성(被投性)’, 곧 ‘그저 던져진 존재’가 아니던가요? 그렇다면 거부당한 자의 고통이란 알고 보면 인간 실존의 고통, 곧 우리들의 고통이 아니던가요? 여기에 이 작품이 가진 중요성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타인벡이 소설 『에덴의 동쪽』에서 던진 심각한 문제, 곧 ‘죄와 구원의 문제’는 잠시 뒤로 미루고 우선 카잔 감독이 영화 「에덴의 동쪽」에서 제기한 중요한 문제, 곧 ‘거부당하는 자의 고통’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할까 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 문제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특히 청소년들에게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는 소위 ‘왕따’라고 불리는 따돌림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끊을 수 없는 죄들, 이어지는 벌들



“여태까지 내가 쓴 것은 어떤 의미에서 이 작품을 위한 습작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 말은 그의 최대의 걸작으로 꼽히는 『분노의 포도』(1939) 이후 이렇다 할 만한 작품을 내지 못하던 스타인벡이 출판사에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이랍니다. 여기에서 언급된 “이 작품”이 바로 『에덴의 동쪽』이지요. 스타인벡의 외갓집 이야기와도 관련이 있는 이 소설은 비평가들로부터는 그다지 좋은 평판을 받지 못했답니다. 하지만 발표되자마자 곧바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유명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어 전 세계에 알려짐으로써 스타인벡의 이름값을 톡톡히 올렸다지요.

제1부는 캘리포니아 지방이 새로 개척되던 시기(1862~1900)의 이야기입니다. 아일랜드에서 이민 온 샘 해밀턴(Sam Hamilton)은 대장간과 목공소를 차려 큰돈을 벌어 1,700에이커나 되는 땅을 소유하게 됩니다. 이 사람의 넷째 딸인 올리브(Olive)가 스타인벡의 어머니이지요. 그런데 그 부근에 아담 트레스크(Adam Trask)라는 또 하나의 이민 가족이 이주해 와서 삽니다. 아담은 종교적이고 이상을 추구하는 인간이지요. 그런데 아담의 아내가 되는 케티 아메스(Cathy Ames)는 이와는 반대로 세속적이고 탐욕적인 인간으로 어려서부터 많은 남자들을 농락하며 산전수전을 다 겪은 악한 여인입니다.

제2부는 1900년에서 1902년 사이의 이야기로, 아담과 케티, 두 사람이 우여곡절 끝에 결혼을 하여 ‘킹시티’에 땅을 사들이고 여기에 낙원을 이룰 꿈을 키우면서 시작합니다. 이때 샘 해밀턴과도 알게 되지요. 아담의 집에는 리(Lee)라는 중국인 하인이 있습니다. 그는 캘리포니아 대학을 나온 지식인이지만, 인종차별에 실망하여 마음 편한 하인으로 살아가는 일종의 현인(賢人)으로 등장합니다. 스타인벡은 자신의 사상을 주로 리의 입을 통해 전하지요.

그런데 사건은 케티가 쌍둥이 아들을 낳고 일주일 후 도망쳐버리면서 본격적으로 극화됩니다. 아담은 그녀를 붙잡고 말리려다 어깨에 권총상까지 입지요. 하지만 그녀가 낳은 쌍둥이는 사실 샘의 동생인 찰스의 아이였습니다. 가출한 케티는 셀리너스(Salinas) 시내로 나가 어느 사창가에 들어가 살며 그 집 주인마님에게 서서히 독을 먹여 죽이고 이내 그 자리를 차지하지요. 아담은 아내 케티가 가출한 다음 허탈 상태에 빠지고, 아론(Aron)과 칼(Cal)이라는 이름이 주어진 쌍둥이들은 하인인 리가 키웁니다. 한편 샘 해밀턴의 넷째 딸인 올리브는 소원대로 학교 선생이 되고 제분 공장을 하는 청년과 결혼하여 셀리너스에 살며 세 아이의 어머니가 되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존 스타인벡이지요.      

제3부는 그로부터 10년 뒤인 1911부터 1912년 사이의 이야기입니다. 샘 부부는 이제 늙어 셀리너스에 사는 넷째 딸 올리브의 집에 가 함께 살게 되지요. 겨울 장마가 끝난 춘삼월 샘이 죽자, 아담은 그 장례식에 갔다가 케티가 운영하는 술집에 들르게 됩니다. 그리고 아담은 케티에게서 자신의 쌍둥이 아들들이 찰스의 아이라는 말을 듣게 되지요. 하지만 아담의 마음은 오히려 평안해지는데, 이로써 그는 자기가 케티에 대한 증오에서 해방된 것을 알게 됩니다.

쌍둥이 형제 아론과 칼의 성격은 매우 대조적이지요. 아버지 아담을 닮은 아론은 온순하고 내성적이며 모범생입니다. 그러나 어머니 케티를 닮은 칼은 열정적이며 거칠지요. 때문에 아담은 형 아론을 편애합니다. 그럴수록 칼은 더욱 빗나가게 되지요. 그런데 둘 모두 셀리너스에서 이사 온 에브라(Abra)라는 소녀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칼은 어머니 케티에 관한 비밀을 알게 되면서 비극은 시작됩니다.

제4부는 1912년부터 1918년에 이르는 이야기입니다. 아담도 셀리너스로 이사를 하고 새로운 사업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채소 냉동사업에 전 재산을 투입했다가 망해 웃음거리가 되지요. 점점 빗나간 칼은 술과 여자를 찾아다니다가 어머니 케티가 있는 곳을 알게 되어 그곳을 찾아갑니다. 하지만 후에 리에게서 자세한 내막을 들은 칼은 오히려 아버지 아담을 동정하게 되지요. 아담은 어머니의 일을 아론에게는 비밀로 하라고 칼에게 당부합니다.  

아버지를 이해한 칼은 파산한 아버지를 도우려고 마음을 잡고 돈벌이를 시작하지요. 마침 1차 대전이 일어나 미국이 참전하려고 하자, 칼은 리에게서 5000달러를 빌려 콩 농사를 시작합니다. 미국이 참전하고 곡식 값이 뛰어 칼은 큰 이윤을 남기지요. 추수감사절 날 칼은 아버지를 기쁘게 해주려고 그 돈을 아버지 아담에게 선물합니다.

하지만 아담은 전쟁을 이용해 돈벌이를 했다고 오히려 칼을 꾸짖지요. 그 대신 사랑하는 아들인 아론과 에브라의 약혼을 선물로서 기쁘게 받습니다. 이 대목은 「창세기」 4장에서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는 받고 카인의 제사는 받지 않았던 것을 그대로 재현한 거지요. 이에 분개한 칼은 형 아론을 어머니 케티가 운영하는 사창가로 데리고 가 모든 비밀을 폭로합니다.

 

당시 케티는 그녀가 죽인 주인마님의 사인을 캐내려는 창녀 에델의 협박과 그 집 수위 노릇을 하고 있는 탈옥범 조의 공갈을 받고 있었지요. 그러던 중 죽은 줄만 알고 있던 ‘천사 같은 어머니’에 관한 모든 비밀을 알고서 충격을 받아 괴로워하는 아론을 보고 그녀는 모든 재산을 아론에게 넘겨준다는 유언을 써놓고 자살합니다.

이후 아론의 행방을 묻는 아담에게 칼은, 성경에서 아벨의 행방을 묻는 하나님에게 카인이 그랬던 것과 똑같이 모른다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이내 양심의 가책을 느껴 형 아론을 찾아 나서지만, 아론은 이미 군에 자원입대해버린 후였지요. 이후 칼은 에브라와 가까워지는데, 아론의 전사 소식이 날라 오고 아담은 충격으로 쓰러집니다. 리의 권유로 칼은 에브라와 함께 아담의 임종 자리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빌지만 아담은 의식을 잃고 숨을 거두지요.
  

                                                         거부당하는 자의 고통



‘에덴의 동쪽’이란 성서에서 따온 말입니다. 구약성서 「창세기」 4장에 보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의 사이에서 두 아들, 곧 형 카인과 동생 아벨이 태어납니다. 카인은 농사를 짓는 자로서 그가 추수한 곡물을 제물로써 하나님에게 받쳤고, 아벨은 목축을 하는 자로서 새끼 양을 잡아 제물로 바쳤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는 받고 카인의 제사는 받지 않았지요. 성서는 그 이유를 밝히지 않았습니다. 아무튼 이에 분이 난 카인이 그의 동생인 아벨을 죽이지요. 그러자 신은 그 벌로 카인의 이마에 살인자의 낙인을 찍어 에덴동산의 동쪽에 있는 ‘놋’이라는 땅으로 추방하여 그곳에 살게 하지요.

따라서 에덴의 동쪽이란 ‘죄인이 거하는 곳’, ‘신으로부터 추방당한 자가 사는 땅’이라는 뜻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곳은 동시에 우리가 사는 바로 이곳이라는 뜻도 가졌지요. 그 이유는 이렇답니다. 「창세기」 3장을 보면 카인과 아벨의 사건이 있기 전, 보다 원초적인 추방사건, 곧 낙원으로부터 추방되는 사건이 있었지요. 소위 ‘실낙원(失樂園)’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 낙원에서 추방된 사건입니다.

헌데 여기에서 주의해 보아야 할 대목은 신은 본래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3 : 17)라고 약속했는데, 정작 그들이 선악과를 따먹자 그들을 죽이지 않고 단지 낙원에서 추방시킨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들의 자식인 카인도 죄를 지은 뒤 신으로부터 받은 형벌은 ‘죽음’이 아니었고 에덴의 동쪽 놋땅으로의 추방이었으니, 죄인에 대한 신의 징벌을 언제나 ‘추방’, 곧 ‘거부(拒否)’였습니다.

그렇다면 신은 성경의 첫머리에서부터 자기가 한 약속을 스스로 어긴 것이 됩니다. 그런데 신학적으로 보면 전혀 그렇지가 않답니다. 왜냐하면 신이 자신의 이름을 ‘야훼(yhwh)’라고 밝혔기 때문이랍니다.(출애굽기 3 : 15) 무슨 말이냐고요? 조금 어렵지만 그 대답은 이렇습니다.

오늘날 ‘여호와(Jehovah)’라는 라틴어로 더 잘 알려진 ‘야훼’라는 히브리말에 대한 가장 일반적이고도 자연스러운 해석은 ‘그는 있다(He is)’ ‘그는 존재한다(He exists)’ 또는 ‘그는 현존한다(He is present)’이지요. 그래서 고대로부터 신학자들은 신의 속성을 ‘존재(存在)’, 곧 ‘있음 그 자체’라고 하는 겁니다. 따라서 신이 곧 존재인 기독교적 교설에서 보면, 신으로부터의 ‘추방’은 곧 ‘존재의 상실’로서 그 자체가 ‘있음을 잃는 것’ 바로 ‘죽음’을 가리키지요. 물론 이 죽음은 인간의 입장에서는 육체의 죽음이 아니고 영혼의 죽음을 말합니다. 하지만 그 자신이 영(靈)인 신의 입장에서 보면 영혼의 죽음이야 말로 ‘진정한 죽음’인 것이고, 따라서 신은 자신의 약속을 틀림없이 지킨 것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바로 이 최초의 추방사건을 통해 오늘날 우리와 같은 ‘죄인으로서의 인간’, 곧 그의 영혼이 신으로부터 거부당함으로써 죽은 인간, 그 결과 세상을 향한 온갖 탐욕의 노예가 된 인간이 탄생한 것이랍니다. 이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原罪)의 시작이자, 동시에 인간의 근원적인 고통의 시작이라지요. 그래서 카인은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창 4 : 13)라고 그의 고통을 호소하지요.

이 때 카인이 느끼는 고통은 신에게 거부당함에서 오는 인식, 존재를 상실한 존재자의 의식, 곧 구약성서에서 헛것, 바람, 먼지 등으로 묘사된 사망의 느낌, 버림받음의 감정, 자신의 쓸모없음 등에 대한 의식입니다. 실존주의자들은 이러한 의식을 흔히 ‘실존의식’이라고 부르지요. 여기에서 오는 불안과 절망 그리고 고통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인간은 언제나 다시 신에게로 돌아가길, 다시 존재를 회복하길 간절하게 바라지만 다시는 되돌아가지 못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실낙원 사건을 통해 인간에게는 ‘추방’이 곧 ‘죽음’이고, ‘거부당하는 고통’이 곧 ‘죽음에 이르는 고통’이라는 의식이 인간 내면에 자리하게 되었다는 거지요. 그래서 독일 출신의 정신의학자 에리히 프롬(Erich Fromm, 1900~1980)은 그의 저서 『자기를 찾는 인간』에서 이렇게 상대로부터 거부당하는 때에 인간이 느끼는 고통, 곧 죽음에 이르게까지 하는 이 극심한 고통을 ‘카인의 고통’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소설 『에덴의 동쪽』에서 칼이 느끼는 것이 바로 ‘카인의 고통’이지요. 칼은 어떻게든지 아버지 아담에게서 사랑을 받아보려고 애를 씁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단지 아버지의 ‘받아들임’이었는데, 칼에게서 자기를 버린 아내 케티의 모습을 지울 수 없는 아담은 그것을 철저하게 거부하기 때문이지요. 영화에서는 칼이 콩 농사를 지어 번 큰돈을 아담에게 선물로 주려다가 거절당할 때 느끼는 카인의 고통을 제임스 딘이 뛰어난 연기로 보여줍니다. 제임스 딘은 처절하게 울며 아버지에게 다가가 억지로 그를 끌어안아 보지만 아담은 그를 뿌리치며 끝내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엘리아 카잔 감독은 이때 칼이 느끼는 절망과 고통을 발끝까지 늘어지는 버드나무 속에 들어가 제임스 딘이 몸을 숨기고 흐느끼는 장면으로 묘사해 전 세계 팬들의 가슴에 오랫동안 잊지 못할 감동을 던져주었지요.

그런데 말이지요, 여기에서 한번 따져보지요. 도대체 왜 카인은 자기의 제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해서 - 생각에 따라서는 기껏 그만한 일로 - 동생 아벨을 죽였을까요? 달리 말해, 인간은 왜 ‘카인의 고통’, 즉 상대로부터 거부당하는 고통을 그렇게도 두려워하고 참지 못하는 걸까요? 정말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대로 인간 내면에 신으로부터의 추방이라는 실낙원의 기억이 남아 있어서 그럴까요? 아니면 단순히 자신의 사랑이나 관심이 좌절된 데서 오는 절망감 때문일까요? 아니면 시기와 질투 때문일까요? 우리는 이에 대한 보다 설득력 있는 답변을 프롬에게서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왕따, 곧 따돌림의 본질에 대한 이해도 얻을 수 있게 되지요.



카인은 왜 아벨을 죽였나



프롬은 그의 저서 『사랑의 기술』(1956)에서, 바로 이 카인의 고통 문제를 신학적으로가 아니라 정신의학적으로 해석하여 들려줍니다. 그는 우선 한 인간의 탄생을 ‘낙원추방’과 비교하여 설명하지요. 즉, 탄생이란 모태로부터 분리되어 모든 것이 비결정적이고 불확실하며 개방적인 상황으로의 추방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렇듯 모태로부터 추방된 인간의 미래에 확실한 것은 오직 죽음뿐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인간 정신의 밑바닥에는 사망의 느낌, 버림받음의 감정, 자신의 쓸모없음에 대한 인식, 곧 실존적 불안이 이미 깔려있다는 겁니다. 따라서 모든 인간에 있어 심리적으로 가장 절실한 욕구는 오직 이러한 분리 상태로부터 벗어나려는 것이라는 거지요. 그 결과 모든 인간의 내면에는 거의 광적으로 그 누구와 함께 하거나 또는 그 어떤 것과 합일하려고 하는 강렬한 욕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죽을 것만 같은 분리감과 고독감을 극복해 보려 한다는 거지요. 프롬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가장 절실한 욕구는 이러한 분리 상태를 극복해 고독이라는 감옥을 떠나려는 욕구이다. 이 목적의 실현에 절대적으로 실패할 때 광기가 생긴다. 모든 시대, 모든 문화의 인간은 동일한 문제, 곧 어떻게 분리 상태를 극복하는가, 어떻게 결합하는가, 어떻게 자신의 개체적 생명을 초월해서 합일을 찾아내는가 하는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그러나 대답은 여러 가지이다. 이 문제는 동물숭배에 의해, 인간의 희생 또는 군사적 정복에 의해, 사치에의 탐닉에 의해, 금욕적 단념에 의해, 강제 노동에 의해, 신의 사랑에 의해, 인간의 사랑에 의해 대답될 수 있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예로 우선 유아들이 엄마와의 일체감을 통해 분리감을 극복하는 것을 지적하지요. 유아는 어머니와 엄연히 분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육체적 현존, 즉 어머니의 젖가슴과 피부의 접촉을 통해 그 분리감을 달랜다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인류도 그 유아기에는 자연과의 일체감을 통해 분리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했다고 하지요. 원시인들이 동물 가면을 쓴다든지 토템(totem)으로 삼고 있는 동물 또는 동물신을 숭배하는 것 같은 행위들이 이에 속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유아기를 벗어나면서 그리고 인류가 자연과 더욱 분리되면서 이러한 방법의 한계가 드러났다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술이나 마약 또는 신비주의나 주술적 종교 등등에서 얻는 ‘도취현상’에 몰두하기도 한답니다. 이러한 것들은 단순히 쾌락만 주는 것이 아니라 일순간이나마 소외감을 덜고 일체감을 갖게 해주기 때문이지요. 예를 들어, 강력한 도취현상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성행위는 오르가즘을 통해 일종의 마약의 효과와 같은 육체적 쾌락도 주지만 심리적으로도 일체감을 줄 수 있어서 잠시나마 분리감을 극복하게 한다는 겁니다. 따라서 공동체의 혼교와 같은 성적난행(性的亂行) 의식은 많은 원시적 의식의 일부였다는 거지요. 이러한 도취적 경험을 한 다음에 사람들은 소외감에서 더 이상 괴로워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답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으로도 인간은 실존적 분리 현상에서 생긴 불안과 고독감에서 근원적으로 벗어나지 못한다는 거지요. 왜냐하면 모든 도취, 즉 술이나 마약 또는 신비주의나 주술적 종교 심지어는 개인적 또는 공동체적 성행위까지도 한 순간을 제외하고는 인간 사이에 있는 실존적 간격을 좁혀 주지 못하기 때문이랍니다. 도취 뒤에 오는 각성과 함께 더욱 극심한 분리감을 언제나 맛보아야 하기 때문에, 이러한 절망적 노력들의 결과는 오히려 불안과 고독감을 더욱 증대시킬 뿐이라지요. 즉, 일반적으로 충족되지 못한 욕망은 왜곡되고, 왜곡된 욕망은 순환적인 도착에 빠지게 하며 결국은 파멸로 몰아간다는 것이 프롬의 주장입니다.

조금 더 발달한 사회적 형태로서 인간은 집단에 의한 합일, 곧 관습, 관례, 신앙 등에 의한 합일을 추구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사회적 집단을 이루기 시작했는데 예컨대 “나는 로마인이다.”라는 긍지를 갖는 것과 같은 식으로 집단과의 일체감을 가짐으로써 소외감과 분리감을 극복하려 한다는 거지요. 이러한 심리는 사회 구성이라는 긍정적 역할도 하는데, 오늘날에도 사람들이 예컨대 스포츠, 레저, 취미, 등등 각종 동호회의 구성원이 되거나 정당이나 사회단체에 열정적으로 가입하게 한다는 겁니다. 여기에서 생기는 소속감을 통해 원초적 소외감을 극복해 보려고 한다는 것이지요.

또한 이러한 심리가 사람들이 각각 개성을 추구하는 것 같으면서도 항상 모든 종류의 유행 현상에 휩쓸리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답니다. 이는 군중에 소속됨으로써 분리감을 극복하려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라지요. 그리고 같은 심리가 발전하여 전체주의를 비롯한 각종 독재체제의 온상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 프롬의 주장입니다.

현상이야 어떻게 나타나든지 간에 이러한 현상들의 본질은 “만일 내가 남들과 같고 나 자신을 유별나게 하는 사상이나 감정을 갖고 있지 않으며 나의 관습이나 옷이나 생각을 집단의 유형에 일치시킨다면 나는 구제된다. 고독이라는 가공할 경험으로부터 구제되는 것이다.”라는 감정이라는 거지요. 때문에 오늘날 서구 민주주의 사회에서조차 사람들은 획일화되기를 ‘강요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바라고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현대인이 스스로 ‘자유로부터 도피’하는 바로 그 이유이라는 거지요!

또 다른 방법으로는, 인간은 자신이 종사하는 세계와 결합함으로써 실존적 불안과 고독을 극복하려고도 한다는 겁니다. 예컨대, 예술가의 ‘창조적 활동’과 같이 목공은 책상을 만들고, 금세공인은 보석을 가공하고 농부는 곡식을 기르고 화가는 그림을 그리면서 자기 자신이 몰두한 세계와의 일치감을 통해 실존적 소외감을 망각하려는 거지요.

그러나 이것도 역시 참다운 극복이 아니랍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설사 자신의 세계에 침잠해 그 속에서 일체감을 느끼면서 산다 할지라도 언젠가는 그 세계를 떠나 현실 세계로 다시 돌아와야 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이 때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실 세계에서 더욱 극심한 소외감을 느끼게 되어 다시 자신의 세계로 침잠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것이 상당수의 천재적 예술가들이 현실 세계에 잘 적응하지 못하며 종종 정신질환에 시달리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지요.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 인터넷에 의해 이미 구현된 사이버스페이스(cyberspace)나 앞으로 다가올 가상현실(virtual reality)에 몰두함으로써 자신의 실존적 분리감과 소외감을 극복해 보려는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심각한 문제이기도 하다는 겁니다. 즉, 사이버스페이스에 빠진 젊은이들이 인터넷이나 게임에 몰두해 있을 때는 그 속에서 일체감을 느끼면서 자신의 실존적 불안감을 잊어버리지만, 그 세계에서 벗어나 현실 세계로 돌아오면 불안감이 더욱 커져서 점점 현실 세계에 잘 적응하지 못하게 된다는 거지요. 그래서 심하면 정신 질환에 시달리기도 한답니다.


                                                       인간에게 사랑이 절실한 이유


그래서 프롬은 인간의 근원적인 실존적 분리현상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인간과 인간의 결합을 가능케 하는 ‘사랑’에 있다고 간파합니다. 인간 대 인간의 결합, 인간성과 융합, 곧 ‘사랑의 회복’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이고도 강력한 갈망이라는 거지요. 그것은 인간의 실존적 분리현상에 기인하는 가장 기본적인 열정으로서, 가정을, 집단을, 사회를 그리고 인류를 결합시킬 수 있는 힘이라고 그는 강조합니다. 따라서 이 욕구가 만족되지 못하면 인간은 발광하고 타인을 파괴하며 심지어는 자기 자신마저 스스로 파멸시킨다는 거지요. 그래서 프롬은 “사랑이 없으면 인간성은 단 하루도 존재하지 못한다.”라고까지 주장합니다. 

이제 우리는 카인이 왜 아벨을 죽였는지, 칼이 왜 아론과 아담 그리고 자신을 파멸로 이끌어 가는지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사망의 느낌, 버림받음의 감정, 자신의 쓸모없음에 대한 인식, 곧 실존적 불안에서 벗어나려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열정과 갈망을 거부당했기 때문에 발광하여 인간성을 상실하고 타인과 자신 모두를 파괴시킨 거지요. ‘거부당하는 것’, 그것이 바로 죽음이고, ‘거부당하는 고통’, 그것보다 더한 고통이 없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이러한 관점에서 ‘왕따’, 곧 따돌림의 문제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따돌림이 당하는 자에게 그렇게도 큰 고통을 안겨준다면, 그것이 당하는 자에게는 곧바로 죽음을 의미한다면, 그런 일을 할 마음이 내게 진정 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아니, 그럴 권리가 내게 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한번 생각해 보시지요!

 

 

/ 김용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