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인가 계급인가, 아니면 세대가 계급인가
김동춘 /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이번 서울시장 선거를 두고 세대투표의 특징이 두드러졌다고들 말한다. 출구조사에 의하면 20~40대의 압도적 다수가 박원순을 지지하고, 특히 30대의 경우 박원순 지지자가 나경원 지지자의 3배나 된다는 사실이 그 중요한 근거다. 하지만 다른 편에서는 계급투표 현상도 주목할 만하다는 지적이 있다. 소득이 높은 강남 3구의 투표율이 다른 지역에 비해 높고, 그중에서도 압구정동에서는 나후보가 79%를 얻는 등 나후보 지지율 상위 10개동은 대부분은 강남구였으며, 박후보는 대학생 밀집 거주지역을 비롯해 저소득층이 거주하는 구로동, 창신동 등에서 높은 지지를 얻었다는 사실이 그러한 주장을 뒷받침해준다.
물론 이 출구조사가 엄밀한 방법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므로 이 조사만으로 성급한 결론을 내기는 어렵다. 예를 들면 강남구의 경우 인구구성을 확인하여 실제 강남구의 30,40대도 거의가 나후보를 지지했는지 검증해보아야 하고, 거꾸로 30,40대 대부분이 소득이나 재산 여부를 불문하고 박후보를 지지했는지 여부도 살펴보아야 한다. 그러나 50대 이상과 40대 이하의 투표행태가 현격하게 갈린다는 것, 저소득층이 밀집 거주하는 지역의 투표율이 낮다는 것, 아파트가격이 높은 지역의 투표율이 높고 나후보 지지율이 높다는 것을 종합해보면, 이번 선거는 세대투표 경향이 두드러진 가운데 빈곤층과 부유층의 차별적인 투표행태가 그 밑에 깔려 있다는 점을 대략 확인할 수 있다. 자본주의사회에서 하층민의 정치적 무관심이 두드러지고, 상대적으로 부르주아가 자기 집단이익에 더욱 민감하다는 기존의 이론도 이번 선거에서 또 한번 확인되었다.
그런데 과연 언론이나 정치평론가들이 말하는 세대, 계급의 개념이 과연 지금 한국인의 투표성향, 더 나아가 정치의식, 사회의식을 정확히 표현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계급이나 세대는 사회적 응집체 중의 하나다. 그런데 '계급'이 주로 경제질서에서 같은 위치, 관계를 공유하는 집단을 말한다면 세대는 생물학적·사회역사적 시간대에서 특정한 위치를 공유하는 집단, 즉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특정한 정치경제적 사건을 비슷한 나이에 겪은 사람들을 말한다. 만하임(K. Mannheim)은 신선한 접촉의 경험, 즉 젊은 나이에 특정 공간에서 어떤 큰 사건을 같이 겪음으로써 그것이 '자신의 기억'으로 각인될 때 이들은 세대의식을 공유하고 그것은 이후 지속적으로 이들의 의식과 정치행동을 좌우하게 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렇다면 이번 선거를 두고 젊은 '세대'가 박후보를 지지했다고 쉽게 결론을 내려도 좋을까?
앞의 정의에 따르면 486세대, 4․19세대 등 정치적 경험과 뚜렷한 가치지향을 공유한 사람들은 분명히 세대라 말할 수 있지만, 지금의 30대, 40대가 각각 별도의 세대가 되거나, 20대까지 묶어 40대 이하를 하나의 세대로 부를 수 있을지는 회의적이다. 물론 30대 이상의 경우 청년시절에 IMF 경제위기를 겪었다는 점, IT기술과 인터넷 문화에 어릴 때부터 노출되었다는 점, 월드컵 경험 등의 공통점을 들 수는 있다. 그리고 40대 이하가 모두 SNS에 익숙하다는 점을 들 수도 있지만, 이들이 이번 선거 이전에 하나의 공유된 사회역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유사한 가치와 행동을 보였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특히 이번 박후보에게 거의 몰표를 안겨준 30대의 경우 2007년 대선 때는 그 반대의 투표행태를 보였다는 사실도 주목해야 한다. 이렇게 보면 세대현상은 오히려 노년에 더 두드러진다고 말할 수도 있다. 50대 이상, 특히 60대 이상이 압도적으로 나후보를 지지했는데, 한국전쟁과 권위주의, 개발독재를 겪은 60대 이상은 과거에는 물론 10여년간 거의 모든 투표에서 매우 일관된 행동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40대 이하를 묶어주는 고리는 세대의식이 아니라 이들이 온몸으로 겪고 있는 현재의 비정규직화, 실업, 주거 등 경제적 어려움이라고 봐야 하는 것이 아닌가?
'세대'라는 외피로 계급양극화에 대한 불만이 표출된 것
미국의 월스트리트를 점령하고 있는 청년들을 향해 공화당 대통령 후보인 롬니((M. Romney)는 "이것은 계급전쟁이다"라고 공격했다. 월가를 점령하고 있는 청년들이 금융자본주의의 탐욕과 CEO들의 부도덕한 돈잔치에 분노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은 2010년 우익의 티파티(Tea Party)운동이 뜰 때와 유사하게 무정형적이고 계급의식도 약하며 정치엘리뜨 일반에 대해 분노하고 있다. 튀니지, 이집트에서 스페인, 그리스에 이르는 유럽·북아프리카 전지역 청년들의 저항운동도 사실상은 심각한 청년실업과 빈곤에 대한 저항의 측면이 크다. 즉 청년들의 좌절은 전세계적 현상이고, 그것은 미국 주도의 시장자본주의, 1%가 99%를 가져가는 이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의 모순이 표현된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60년대 반전세대의 문화적 저항과는 달리 '세대'라는 외피를 통해 '계급양극화'에 대한 불만이 비정치적으로 표출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미국 일간지 <유에스에이 투데이>(USA TODAY) 최근 칼럼은 지금까지 미국은 후세대가 항상 이전 세대보다 좋았고 계층상승을 이룰 수 있었는데, 앞으로는 그것이 어려워질지 모른다고 말한다. 미국에나 한국에서 정규직 아버지는 비정규직으로 살아갈 아들을 걱정하고, 비정규직 아버지는 아들을 정규직으로 만들 가능성이 거의 없다. 현대자동차 정규직 노조가 자녀의 정규직 채용시 가산점을 요구하는 것처럼 이들은 할 수만 있다면 이러한 계급상황을 개인적으로 풀려고 노력하고 있다.
다시 '가짜 해결사'의 선전에 넘어가지 않으려면
월스트리트를 점령하고 있는 미국의 청년들처럼 한국의 20~40세대도 이 고실업과 비정규직화, 사회적 양극화, 대자본의 거침없는 탐욕, 그것을 정당화·합리화하는 기성 정치권과 언론이 만들어내고 있는 이 세상의 모순을 온몸에 안고 있는 존재이다. 이번 서울시장 선거 역시 이들이 경제위기의 직격탄을 맞고 있기 때문에 초래된 것이므로, 결국 '세대'로 지칭되는 현실의 밑에는 전통적 세대현상이 아닌 잠재적인 계급현상, 더 나아가 경제양극화에 응답하지 못하는 현재의 정치적 대표체제에 대한 불만이 깔려 있다고 봐야 한다. 따라서 이들은 일관된 의식이 없고 무정형의 집단이므로 2007년 '이명박 밀어주기' 때처럼 앞으로 대자본의 편을 들면서 실업, 복지,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해주겠다고 선전하는 가짜 해결사, 즉 우익세력에 또다시 기웃거릴 수도 있다.
결국 이번 서울시장 선거 결과는 세대라는 형식으로 잠재화된 계급집단의 불만이 표현된 것이다. 따라서 이 결과는 내년의 정권교체에 청신호를 주고는 있지만, 이 불만은 정권심판의 구호만으로 결집될 수 없으며, 설사 현재의 야당 중심으로 정권교체를 하더라도, 이들에게 또다시 좌절을 안겨줄 수 있다. 이들을 일관된 의식을 갖는 사회세력으로 결집시킬 수 있는 정치지도력이 그 어느 때보다 시급히 요청된다.
자유롭지도 민주적이지도 않은 역사교과서 개정작업
홍석률 / 성신여대 교수, 한국현대사
교과서 개정 작업을 두고 다시 한국현대사 논쟁이 재연되었다. 이번에는 교과서에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느냐, 아니면 과거 교과서에도 그러하듯이 그냥 '민주주의'로 하느냐가 논란이다. '자유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측에서는 '민주주의'로 하자는 측을 대한민국 정체성을 부정하고 은연중에 '인민민주주의' 같은 것도 수용하는 불온한 사람들로 몰아가는 프레임을 만들어냈다. 이렇게 된다면 앞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민주주의를 이야기할 때 항상 앞에 '자유'라는 두글자를 붙이지 않으면 불온해 보일 수 있다. 이것이 과연 자유롭고 민주적인 사회인지 의문이다.
어떤 단어가 실제 내포하는 의미는 한 사회에서 그 단어가 쓰였던 역사적 맥락과 무관할 수 없다. '자유민주주의'라는 단어는 과거 일부 민주화운동세력도 사용했지만 냉전과 분단의 과정에서 공산주의와 대비되는 반공주의를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또한 반공, 반북을 빌미로 권위주의 정치체제를 옹호하는 말로 사용되기도 했다. 과거 독재정권기 집권세력은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수호한다는 명목으로 민주화운동을 탄압했다. 자유민주주의가 이러한 의미를 여전히 내포하고 있다면 이것이 교과서에 왜 부적합한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
물론 '자유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측은 이것이 현재 민주주의 국가에서 일반화된 '리버럴 데모크라시(liberal democracy)'를 의미하는 것이라 주장할 것이다. 그래도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역사 속의 민주주의는 그 자체가 부단히 변화하며 확장되어온 개념이다. 근대 초기의 민주주의는 재산이 많은 사람, 백인, 남성에게 국한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후 주권자의 범위가 확대되고, 민주주의의 내용도 정치적 권리뿐 아니라 사회경제적 권리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확대되어왔다. 민주주의 앞에 특정 접두사를 붙여 그 의미를 한정하고, 이것을 역사교육에서 배타적으로 강요하면 다양한 차원으로의 민주주의의 확장과 상상은 제약될 수밖에 없다.
역사 속 민주주의는 부단히 확장되어온 개념
물론 '자유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측은 이것이 현재 민주주의 국가에서 일반화된 '리버럴 데모크라시(liberal democracy)'를 의미하는 것이라 주장할 것이다. 그래도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역사 속의 민주주의는 그 자체가 부단히 변화하며 확장되어온 개념이다. 근대 초기의 민주주의는 재산이 많은 사람, 백인, 남성에게 국한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후 주권자의 범위가 확대되고, 민주주의의 내용도 정치적 권리뿐 아니라 사회경제적 권리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확대되어왔다. 민주주의 앞에 특정 접두사를 붙여 그 의미를 한정하고, 이것을 역사교육에서 배타적으로 강요하면 다양한 차원으로의 민주주의의 확장과 상상은 제약될 수밖에 없다.
21세기 새로운 역사적 전환을 모색해야 하는 시점에서 이는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사실상 이러한 논쟁이 발생하게 된 경위를 보면, 불행하게도 21세기 민주주의의 새로운 진보를 모색하기 위한 진통과 갈등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이는 20세기 한국사회에서 피땀 흘려 성취한 민주주의를 그야말로 제대로 보호하고 지키느냐[保守]의 문제에 가깝다.
교과서 개정작업의 경위
올해 2011년 1월 교과부는 2009년 12월 시작된 교육과정 개편작업을 연내에 마무리하고, 한국사교육을 강화하겠다고 발표했다. 교과부는 2011년 2월 역사교육과정 개정방향과 교과서 개발에 대한 검토 및 자문을 위해 관련 교수, 교사, 교과부 직원으로 구성된 '역사교육과정개발추진위원회'(추진위)를 만들었다. 한편 교육과정 개발을 맡은 국사편찬위원회(국편)는 추진위의 방향제시와 검토를 받아 구체적인 역사교육과정안을 작성하는 '역사교육과정개발정책연구위원회'(정책위)도 만들었다.
정책위는 추진위의 방향제시와 검토하에 교육과정안을 만들어 6월 30일 공청회를 거쳐 이를 확정했다. 정책위의 교과과정안은 7월 15일 교과부 산하의 공식적인 최종 심의기구인 '사회과 교육과정심의회'(심의회)에 제출되어 심의되었다. 이때까지는 '민주주의'라는 용어가 큰 논란 없이 사용되었다. 그런데 교과부가 마침내 8월 9일 공식 고시한 사회과 교육과정에는 '민주주의'라는 용어가 모두 '자유민주주의'로 수정되어 있었다. 이같은 수정이 이루어진 데는 한국현대사학회의 문제 제기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국현대사학회는 2011년 5월 창립한 학회이다. 현재까지 주로 역사교과서와 관련된 학술발표 모임을 두번 개최하였다. 주류 보수신문들은 이 학회의 창립과 활동을 이례적으로 대서특필했다. 현대사학회는 7월 4일 국편에 보낸 공문에서 "대한민국의 국가적 정체성이 '자유민주주의'체제라는 사실을 분명히 명시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후로도 국편에 이를 포함해 여러가지 수정을 요구했다. 결국 교육부와 국편이 이들의 요구를 일부 수용함에 따라 확정 고시된 교과과정에 모두 '자유민주주의'라는 표현이 사용된 것이다.
추진위와 정책위 활동과정에서 민주주의 용어 문제는 크게 논란이 되지 않았고, 공식적으로 자유민주주의로 결정된 바도 없었다. 당연히 두 위원회의 많은 위원들이 교과부의 처사에 반발했고, 이 과정에서 대거 사퇴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반면 교과부는 교과과정안의 최종 결정은 자신들이 하는 것이기 때문에 교과과정안 공시는 합법적이라 주장하고 있다.
이것이 민주적이고 자유주의적인 것인가
위와 같은 과정이 합법적일지는 모르겠으나 민주적이라 하기는 어렵다. 그렇게 교육부가 일방적으로 결정할 것이라면 기획위, 정책위는 왜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또한 현대사학회의 의견이 과대 대표되어 교육과정안에 반영되는 상황은 어떻게 이해될 수 있을까? 현대사학회는 창립한 지 수개월밖에 안되는 단체다. 아직 학회지 한번 내지 못했고, 교과서 문제를 제외하고 전문적인 학술활동도 제대로 한 적이 없다. 이들은 자유주의를 강조하는 사람들인데 이런 행태가 과연 거기에 부합되는지 의문이다.
자유주의라 함은 국가의 간섭을 배격하고, 사회 각 부분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현대사학회는 학계에서 학술활동을 통해 자기 주장의 정당성을 확산시키는 방식이 아니라 보수언론의 후원하에 교과부와 국편에 압력을 가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견해를 관철시켰다. 자유주의를 표명하는 사람들이 국가권력에 의존하여 무리하게 자신의 견해를 사회에 확산시키려 하는 것이다. 이러한 행태를 볼 때 이들이 주장하는 '자유민주주의'가 과연 리버럴 데모크라시인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2011.11.9 ⓒ 창비주간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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