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과 칼럼

성민엽<시선의 시학>

미송 2011. 11. 10. 07:47

시선의 시학

 

성민엽(문학평론가, 서울대 중문과 교수)

 

 

최승호의 신작 시집을 대하니 감회가 깊다. 최승호가 <대설주의보>로 세계문학의 제정 '오늘의 작가상'을 닫으면서 화려하게 등장한 것이 1982년이었고(그가 처음 등단한 것은 1977년이었지만 일약 문단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이때부터였다) 필자가 비평 활동을 시작한 것도 1982년이었으니 우리 두 사람은 말하자면 문단 동기인 셈이다. 등단 이후 어느 틈에 20년이 지난 것인데, 그러고 보니 그 동안 필자가 최승호론을 한 번도 쓴 적이 없다는 사실이 필자 스스로도 상당히 뜻밖이다. 최승호의 시를 낮게 평가해서 그런 것은 물론 아니고 아마도 연이 닿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일 터이다. 1987년에 '오늘의 문제 시인 시선'을 엮으면서 필자는 최승호의 시 4편( 대설주의보, 그리운 시냇가, 마을, 공터)을 싣고 다음과 같이 간략히 논평한 바 있다.

 

"최승호는 첫 시집에서 맑고 깨끗한 감성과 절제의 언어를 보여주었으나, 두 번째 시집에서는 도시화-산업화의 현실 속에서의 소외 현상을 고통의 언어로, 그러나 역시 절제 있게 형상화하고 있다. 이하석의 세계와 같은 자리에 서 있는 것이지만, 이하석의 정서가 쓸쓸함, 막막함이라면 최승호의 그것은 불안 공포와 관계된다. 그 불안 공포가 정치적인 것 사회적인 것 심리적인 것에서부터 존재론적인 것에까지 닿아 있음이 최승호의 소외 의식의 특징이다."

 

필자로서는 아마도 이 짤막한 논평 다음이 이 글인 것 같다. 그 사이에 최승호는 2, 3년 간격으로 꾸준히 시집을 내 놓았고, 그의 시적 성취의 수월성은 많은 비평적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대체로 보아 최승호의 시가 시집 <화저의 밤>(1993)을 분기로 하여 뚜렷한 변화를 보인다는 점, 그리고 분기 이전이 부정의 사유로 특징지워진다며 분기 이후에는 긍정의 사유가 대두된다는 점에 대해 많은 비평가들이 동의해왔다. 물론 이러한 전후의 변화는 확연한 단절의 그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중첩의 그것이고, 이번 신작 시집도 그 '중첩의 변화'의 흐름 속에 들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이 신작 시집 읽기에는 적극적인 '맥락의 독자' 가 요청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바로 이 장면에서 필자는 다소 엉뚱한 생각이 든다. '맥락의 독서'에도 그 나름의 부작용이 있지 않겠는가. 동어반복으로 추락해버리는 것이야 저열한 경우라 치더라도 맥락의 선행이 텍스트 읽기를 미리 주어진 일정한 틀 속에 가둘 염려가 있는 것이다. 더구나 그 맥락이라는 것 자체에도 객관적인 것은 아니고 이미 주관적으로 구성된 것이다. 맥락에 괄호를 치고 텍스트를 그 자체로 읽을 때 오히려 그 읽기가 맥락의 재발견 내지 맥락의 재구성을 가능하게 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짤막한 논평이후 자그마치 16년 만에 쓰게 되는 최승호론이라는 특별한 상황이 필자로 하여금 이런 생각을 하게 하는 모양이다.

 

최승호의 신작 시집에서 특히 필자의 눈길을 끈 것은 '본다'는 것, 그리고 '시선'이 시적 상상의 핵심 역할을 하는 경우가 무척 많다는 점이다. 그 '보기'와 '시선'은 내용상 단일하지 않고 다양한데, 무질서하게 다양하지 않고 몇 가지 패턴을 형성하고 있으며,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많은 점에서 맹정현의 라캉론(라캉과 푸코. 보드리야르 ; 현대적 시선의 모험)의 논지를 연상시킨다. 그 연상을 부분적으로 수락하면서 그 패턴들을 살펴보는 데서 우리의 최승호 읽기를 시작해보자.

 

1)

겨울날의 비둘기들이

벽 틈에 웅크린 하늘거지들처럼 볕을 쬐면서

아무 뜻도 없이 배설물로 그려나간 희멀건 벽화를

봄날의 베란다에서

는 바라본다

- <비둘기의 벽화> 부분

 

 

2)

종교와 인종을 넘어 내려오는

범梵눈송이들을

나는 우랄알타이어족의 말 속에서 보고 있다

말들의 계보系譜너머에서

소란을 삼키는 침묵처럼

어두운 하늘에서 내려오는 눈송이들을

 

-<범눈송이> 부분

 

 

3)

번쩍거리는 유리들의 복도 사이에서

걸림 없는 맑은 시선으로 재를 들여다보며

 

-<태양의 납골묘> 부분

 

위 인용들에 나타나는 '보기' 와 '시선'이 첫 번째 패턴이다. 여기에서 '시선'은 주체의 것이고 보는 행위는 주체적 행위이다. 대상은 주체의 '시선'에 종속된다. 김우창는 최승호의 첫 시집 <대설주의보>를 두고 구체적인 관찰에서 출발하여 실체 있는 인식에 도달하고 있다고 논평한 바 있는데, 이를 가리켜 '관찰과 묘사의 시'라고 한다면 그 관찰과 묘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시선' 이다. 이 '시선'의 성격은 기본적으로 비판적이다. 초기의 '백색의 감옥'으로서의 자연을 바라볼 때에도 그러했고, 두 번째 시집 <고슴도치의 마을>이후 도시의 현실을 바라볼 때에는 더욱 그러했다. 이 '시선'에 의해 대상화된 도시 현실은 부패와 죽음, 그리고 그것들을 내용으로 하는 욕망이었다.

 

위 인용 시 1)이 바로 그런 경우다. 1)의 화자는 베란다(아마도 아파트 베란다일 것이다)에서 건물 벽(아마도 맞은 편 건물 벽일 것이다)에 묻은 비둘기 똥을 바라다보고 있다. 비둘기는 원래 자연물에

속하는 것이지만 여기에서의 비둘기는 이미 도시화되어버린, "시궁쥐가 속한 쥐과 동물에 가깝"고 "이제 숲속으로 돌아가지 않을" 그런 비둘기다. 그런 비둘기들이 똥으로 "무질서하게 /자연스러운 벽화를 만들어낸다." 물론 이 자연스러움은 본래적 의미의 자연스러움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도시적 부패의 한 양상이고 나아가서는 도시적 부패를 상징하기까지 한다. 흥미로운 것은 그것의 물질적 특성이 끈적끈적함이라는 점이다. 비둘기의 똥은 "끈끈하게 흘러내리다 굳어버리는 카오스 같은 것"이다. 그런데 더욱 흥미로운 것은 끈적끈적함이라는 촉감이 여기에서는 촉각이 아니라 시각에 의해 포착된다는 점이다. 시각이, '시선'이 대상을 지배하는 것이다.

 

인용 시 2)에서는 '시선'의 대상이 부정적인 도시 현실에 머무르지 않고 그 너머의 긍정적인 것으로까지 확장된다. 2)의 화자가 보는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이태원 시장에서 유색인과 백인들이 물건을 사고 파는 광경이고, 다른 하나는 내리는 눈이다. 물건을 사고 팔며 떠드는 소리들(주로 한국어와 영어가 뒤섞여 있을)이 눈에 삼켜진다. 눈은 소리를 흡수하는 성질을 갖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의 눈은 도시화되지 않은 자연물로서의 눈이다. (그 눈을 '범눈송이' 라고 부르는 것은 왜일까. '범(梵)' 은 범어(梵語)의 '범'이고 형용사로서는 '더러움이 없는' 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범눈송이'는 '깨끗한 눈송이'라는 뜻이 될 것이다. 혹시 범(汎)의 오자라면, 범(汎)은 영어의 pan에 해당하므로 '범눈송이'는 종교와 인종, 그리고 언어차이를 포괄하는 보편적인 눈송이라는 뜻이 될 것이다). 긍정적인 전망이 포함되어 있다는 차이가 있으나 여기서도 여전히 시각이, '시선'이 대상을 지배한다. 시의 화자는 눈을 맞으며 그 감촉을 느끼는 게 아니라 단지 눈 내리는 것을 바라 보고만 있다(인용 시 2)의 '시선'은 최승화의 유명한 시편 <공터>의 '시선'과 유사하다. 둘 다 부정적인 것 너머에서, 혹은 속에서 긍정적인 것을 보아낸다.

 

인용 시 3)은 이러한 '시선'의 본질적 속성을 잘 드러내준다. 3)의 화자는 납골당의 유골보관함을 투명한 유리항아리로 바꿀 것을 제안하는데 그 이유는 "건조된 재에는 더 이상 불길한 욕망들이 없다는 것을/ 우리가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도록"하기 위해서이다. 최승호에게 욕망은 일차적으로 도시 문명 혹은 자본주의가 인간에게 부과하는, 그러니까 인간에게 본래적인 것이 아니라 조작된 것으로서 부패와 죽음을 그 결과로 가져오는 욕망이지만 때로는 인간의 존재적 한계로서 피할 수 없는 부정적인 것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3)의 '불길한 욕망'은 그 둘 중 어느 쪽이라고 단정짓기가 어렵지만, 여하튼 '죽음'이 그 욕망으로부터의 벗어남을 가능케 해준다는 것, 이때의 '죽음'은 부패에 이어지는, 축축하고 끈적끈적한 죽음이 아니라 '건조한 재'가 되는 죽음이라는 것을 3)은 진술하고 있는데,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그에 대한 인지가 '시선'을 통해 이루어지며 그 '시선'이 "걸림없는 맑은" 시선이라는 점이다. 요컨대 "걸림없는 맑은 시선"에 대한 신뢰가 이 모든 관찰과 묘사의 기본 전제이며 근본 원리라고 할 수 있다. 이 '시선'은 비둘기의 똥, 범눈송이, 건조한 재 등의 바깥 어느 한 지점에 자리잡고 있는, 그것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는 확고한 원근법적 시선이다. 원근법적 시선은 언제나 확고한 것만은 아니고 때로는 탈이 나기도 한다. 탈이 났을 때의 시선이 두 번째 패턴을 이룬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