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란 문학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인다

미송 2011. 11. 18. 18:42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인다

 

                                                                                                          

오정자

 

 

사람의 기억력으로 하루동안의 일들을 얼만큼이나 저장할 수 있을까. 사실 그 양은 많지 않은 것 같다. 노화증상의 예로 기억력이 과거에서 현재로 거꾸로 좋아진다 고 들었다. 원시안처럼 먼 곳이 잘 보인다는 뜻일까.

 

소국이 한창인 요즘 나는 출근길을 걸어서 다닌다. 흙과 맞닿는 건 아니지만 시멘트 아래서 올라오는 흙기운을 느낀다. 땅을 딛으면 살아있음이 체감된다.  걸을 때와 타이핑을 할 때 그리고 내 안으로 뻗어있는 길을 볼 때 나는, 같은 시공을 한번 더 살고 있는 거야 하는 착각이 든다. 랑데뷰현상이다. 여튼 알 수 없는 꿈틀거림과 타닥 튀어오르는 불꽃을 보는 일은 즐겁다. 

 

새벽비로 촉촉해진 길을 걸을 때 문득 유년의 숨바꼭질 놀이가 떠올랐었다. 코스모스나 갈대숲 수수밭 넙적한 이파리들 작은 몸을 숨겨주던 전봇대까지 유년의 주변에는 숨을 곳이 많았다. 술래는 눈을 가리고 손바닥 틈서리의 빛과 어둠 사이를 유희하였다. 머릿속으로는 동무들의 행방을 따르느라 분주했다. 동무들이 숨을 때까지 눈을 뜨면 안 되었다. 눈을 꼭 감았다 뜬 사이 달라진 풍경에 숨은 아이나 찾는 아이 사이로는 짜릿함마저 감돌았다. 숨바꼭질에는 암묵의 약속도 있었다. 숨어도 영원히 사라지는 건 아니라는 것과 술래는 반드시 숨은 동무들을 찾아내라는 것.  

 

경쟁이나 파기의 조건을 달지 않은 유년의 놀이속에서 아이들은 카타르시스와 약속을 배웠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경험으로 상흔을 얻기도 하였다. 폐쇄공포증이나 외로움증후군이 그것이다 공간에 술래인 나 혼자 남겨져 있었거나 아무도 발각되지 않은 채 해가 저물도록 끝끝내 헤매다 돌아왔다거나, 설상가상 엄마에게 꾸지람까지 듣다 잠이 들었다거나 하면, 아이는 제대로 성숙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람들이 '까꽁 놀이'를 좋아하는 건 기억의 퇴화작용에서 오는 안도감도 있겠지만. 성인이 되기까지 잃어버렸던 숱한 것들 - 친구와 애인 그 갈피에서 연거푸 잃었던 사랑과 우정-을 재연해 보려는 보상심리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길모퉁이 하나를 더 돌면 언제나 까꽁하며 나타나 줄 것만 같은 설렘이 우리를 살게 한다. 빌딩숲과 인터넷 거미줄에 노출되어 숨을 곳마저 변변찮은 우리를 사분히 달래어 줄 사람이 그립다. 키 큰 전봇대에라도 늘어붙어 서 있고 싶다. 

 

어느덧  큰바위얼굴이 되어버린 우리는 같은 크기로 웃자라버렸다. 수줍음마저 상실한 채 숨을 곳을 잃었다. 그래서 신은 스스로 숨어 계시는지.... 

아무튼 꼭꼭 숨었어도 커다랗게 보이는 너의 뒤꼭지를 불순해진 내 손바닥으로는 가릴 수가 없다. 미안하다, 너가 너무 크게 보여서!     

 

2011. 11. 18 (20130119퇴고)

 

                                          

'채란 문학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속절없음  (0) 2011.12.16
그냥 그러하다  (0) 2011.11.24
보르헤스를 기억하다  (0) 2011.11.18
스쳐간 로댕  (0) 2011.11.15
L을 위한 기도   (0) 2011.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