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와 독백

착한 것이 묻어나다

미송 2011. 11. 25. 12:06

 

                                                        

 

 

오후 출근이 있는 금요일. 모처럼 여유롭게 앉아 이성선 시인의 시편들을 스크랩하였다.

'아름다운 사람'외에 일곱 편을 읽었다. 글자배열과 색깔조절을 하면서 감상을 반복했다.

그런데 마우스 먹히는 시각이 느릿해지더니 별안간 깜박하는가 싶더니 자동로그아웃이 되었다.

결정적인 '아차'는 고 직전 자동저장된 글에 엑스표를 클릭했다는 것. 결론은, 스크랩 내용이 졸지에 사라졌다는 것.

다시 가져오기 하기는 망설여지고. 정말 에휴다. 사랑하는 별 하나, 별의 여인숙, 티벳의 어느 스님을 생각하며, 구름, 가을 편지,

그리고 그리고 또 뭐였지. 방금 전 봤는데 한두 개의 제목을 잊어버렸다. 검색창에서도 눈에 안 잡힌다.

대신 다른 제목 하나가 눈에 들어왔는데  '식물성 사랑'이다. 식물성 사랑 외에 나머진 숙제로 남겨두기로 하고 낙서장으로 이동한다.

사람의(나 처럼 메모하지 않으면 금새 잊기도 잘 하는) 기억력이라는 게 황당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아주 먼 시절 친구가 열여섯 살 때 내가 했던 말을 되살려줄 때 두고두고 더듬거렸던 적이 있다.

뜨악하면서도 경이로운 일이란 기억에 관한 에피소드 뿐이 아닐 것이다.

  어제 오늘 김종삼 시인을 생각하고 인상이 선량해 뵈는

(난, 요즘 들어 이상한 선입견이 생겨서 시를 보기 전에 시인의 관상을 살핀다)

김사인 시인을 생각한다. 김사인 시인의 시에 등장한 이성선 시인의 시를 오늘 오전에는 작심하고 찾는다.

소비자들은 착한 소비를 독자들은 착한 시를 고르는 추세로 가고 있는지, 왜 나는 점점 낯가림이 심해지는지 모르겠다.

김종삼의 '술래잡기'를 감상한 나는 노자와 공자를 비교하듯, 시가 주는 공명과 여백을 생각했다.

노자는 자연과의 합일점에 치중한 형이상학의 사유를 공자는 현실에 바탕을 둔 구체적인 사유를 일러주었다. 

스토리와 서정이 어우러진 김종삼의 술래잡기는 하룻밤 지나고도 머릿속을 감돌다 떠났다.

독자에게 사유할 수 있는 공백을 주는 시. 아쉬워서 말(이야기)을 이어주고 싶은 충동을 마구마구 

소리 소문도 없이 남겨주는 시가 좋은 시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결이 확실하여 카리스마를 세우거나 알게모르게 경계가 그려진 그런 시는 멋진 시.

그러나 울먹한 아쉬움을 남기는 그런 시는 소박한 시. 사람마다의 취향이 다르니 정의도 선호하는 경향도 다르겠지 하면서,

이 성선시인의 시를 읽었다. 아릿하다. 역시 좋은 시는 꾸밈이 없으면서도 시간날 때 다시 뒤적거려 봐야지 하는 숙제를 남겨준다. 

휘리릭 날아간 시의 제목들과 내일이면 또 낯설게 다가설 시들을 열어두고 싶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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