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과 산문

임어당<짜라투스트라>

미송 2009. 4. 7. 09:59

짜라투스트라 / 임어당

 

짜라투스트라가 지금 바보의 궁정에 들어와서 국왕과 수상과 대승정과 그리고 왕의 도화사들과 이야기하는 가운데 도화사가 제일 현명하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자만이 왕국에서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을 알고 있었다. 그자만이 인생을 희롱할 줄을 몰랐다. 그의 웃음 속에는 눈물이 있고, 눈물 속에는 웃음이 있었다. 도화사는 '사물을 아는 사나이'인 짜라투스트라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아! 짜라투스트라 경, 사물을 아는 사나이여! 어떻게 이 화려한 바보의 나라를, 현자로서는 말할 수 없는 곳을 찾아오셨나요? 분명히 경에게 말하거니와 나는 이 도시에서 나의 지혜를 가장 잘 쓸 줄 아는 재간을 발견했는데 그것이 바로 편언이라는 것이오. 무슨 일로써 경은 경의 산바람과 동굴을 두고 여기 왔는가? 경은 역시 경의 고독을 참기 어려워 찬 것을 생각코 편언에서 따뜻한 것을 찾으려고 여기 왔는가? 아마도 경은 별과 십자와 가화장을 붙인 넓적한 가슴을 보러 왔을까? 그래서 그들의 딸들에게 구혼하러 온 것인가? 

 

아마도 경은 옛날에 석탄을 완구로한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명예와 위엄을 완구로 하여 놀고, 긴 머리를 기른 아이들에게 경의를 나타내기 위하여 온 것일 게요. 그렇지 않으면 자기 자신의 존대성은 알았으나 자기 자신의 비속함을 알지 못한 고위 고관의 교양없는 꼴을 보러 왔는가? 오, 짜라투스트라! 여기에 지혜가 썩어서 마구 찢겨지고 삶아져 버려서 액체가 될 도시, 지혜 그 자체가 판막에 깨뜨려져서 신문에 당하는 도시가 있다. 짐이 이렇게 말해도 경은 믿지 않을 것이오-여기에 남자다운 정서는 떨어져 고상한 정열은 기가 떨어지는 도시가 있다고. 경은 믿지 않을 것이지만 여기에 <노년>은 더욱 아이같은 차시중을 사랑하고 <엄숙한 청년>은 잡기가 부족하다고 해서 조소를 받는 도시가 있다-거기에서는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노회의 교육인 것이다-거기에는 <청년>과 <천진>함은,  "나의 양심을 여하히 할 것인가? 그리고 나의 염치를 여하히 할 것인가?" 라고 부르짖고, 노년은 여기에 대답한다.
 

"존경받을 만한 것을 배우라!  염치의 최량의 해독제는 유우머 감각인 것이다." 그러면서 <노년>은 등을 돌리고 그의 후궁을 껴안는다. 짐은 짐의 도화사와 사색에의 게으름, 짐은 경의 도래를 기뻐한다. 짐은 저들 가운데 있어서 한기가 들었다고 생각한다면 짐은 몽유병자의 혼-졸고 있는 동안에 상호간의 주머니를 털려고 하는 혼-의 도읍에 있는 것같이 보행한다. 짐은 경의 도래를 기뻐한다. 저들을 위하여 짐은 항상 도화면을 붙이고 오게 되면, 그리고 또 저들을 위하여 짐은 공허한 도화사가 웃으며 grin의 가치를 수련해 오게 되면, 공허한 도화사의 웃음은 짝하여 팔을 걸지 않으면 안 되겠다.

 

  I grin, thou grinnest and he grinneth. We grin, you grin, and they grin.
  이것이 저들의 문법이다.
  I grin today, I grinned yesterday, and I shall grin tomorrow. I had been
  grinning yesterday, I have been grinning now, and I shall have been grinning
  tomorrow.
  이것이 저들의 동사변화인 것이다.

 

그러나 그들 도화사의 웃음은 짐의 도화사적 웃음이 아니다. 저들의 웃음은 짐의 웃음이 아니다. 저들은 짐의 도화사적 웃음을 대개 이해 못하고, 또한 짐의 웃음의 깊이를 거의 측정도 못한다. 왜냐하면 짐의 도화 웃음은 연소하여 파괴하는 불과 같아서 따뜻하게 하고 불꽃을 제거하여 웃게 만드는 불과는 같지 않고, 짐의 웃음은 사르고 태우는 여름 태양과도 같아서 중정의 늙은 노파를 따뜻하게 하는 겨울의 태양과는 다르다. 참으로 짐은 저들의 웃음에 가치 있는 위안을 거의 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짐의 웃음은 홍수인 것이다. 그것은 추겨올리고 그리고 파괴한다. 짐의 웃음은 악마적이자 사교적이어서 승정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대신의 얼굴을 찡그리게 한다. 건설적이 되라. 벗겨진 머리와 나온 배의 승정들은 각기 노래를 부른다-우리들은 지금에야 또한 신을 경배한다고 넓적한 가슴과 찰거머리발의 대신은 각기 읊는다-짐은 저들의 건설적 비판과 저들의 신을 경외하는데 대해서는 대개 관계가 없다. 짐의 도화는 저들이 더욱 흔쾌해 할 듯한 혈색을 가지게 해도 저들의 배까지만 멈춘다. 저들의 뱃속에 이 도화가 소화되고, "해표의 신장에 혼합되어 유제가 되고 강장과 건설을 위하여 사용된다." 저들은 짐의 도화의 보신제와 최면제를 이와 같이 건설의 뜻에 사용한다.

 

저들은 또한 짐으로부터 영양과, 다음으로는 저들의 신경쇠약을 낫게 하는 그 무엇인가를 필요로 한다. 건설적이 되라. 그리고 우리들에게 손쉬운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주라. 점차적으로 짐은 저들의 소화력을 슬프게 한다. 그러나 짐이 웃음을 주는 도화가 오게 되는 것은 이 이유 때문이다. 저들의 사이에 있어서는 진리는 참으로 부끄럼을 타서 가만히 숨었다. 쾌락의 베일을 쓸 수 없다. 이와 같이 사치한 바보 왕국의 도화사는 말했고, 그리고 짜라투스트라는 대답했다-경이 승정들의 소화력을 슬프게 한 이상 짐은 경을 슬프게 하고 이렇게 경 이상으로 참으로 부끄러워하므로 쾌락의 베일의 그늘 밑에 몸을 감출 수 없는<진리>의 슬픔이다. 경은 현인하여 저명한 말을 하지만 경의 어진 고견도 역시 경의 공허한 도화 웃음과 도화차림인 것이다. 경은 머리를 어깨 위에 놓고 있는 것을 배웠다.

 

짐은 경이 더욱 건설적인 것을 배우는 것을 기뻐한다. 경은 진리가 후궁처럼 폐하의 궁정에 팔려 온다고 생각하는가? 그래서도 그녀는 경의 국왕을 위해 포스터를 붙이고 포도 위로 걸어다니는가? 우리들에게 건설적 비판을 주라-좋은 대우를 받아 건강한 왕의 승정들은 그같이 읊는다. 그러나 짐은 경에게 말한다. 파괴하는 자는 즉 그것에 의하여 건설하는 것이며, 그리고 건설하는 자는 우선 파괴하지 않으면 안된다. 따뜻함과 불꽃을 튀게 하여 연소하고 또한 파괴하는 불이라는 것은 없고, 살려고 하는 자에게 생명을 주지 않고 태우고 사르는 태양이라는 것은 없다. 시민들의 깊은 잠을 막기 위해서라도 경의 불꽃을 더욱 소리 높게 올리고 더욱 밝게 불꽃을 퍼뜨리지 않겠는가. 그리고 전시가에 큰불보다도 아름다운 연응은 없고, 곱고 아름다운 비단 같은 도화는 실제 얻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재 속에서 아름다운 도읍이 일어나고, 그리고

 

그 폐허 속에서 <새로운 왕국>이 지상에 살아날 것이니까. 무엇때문에 짐은 갱생을 대망하는 정도에도 <사멸>을 열망하는 것인가. 소매에 따로 들어맞는 짐의 충언을 용납하라. 지금 점점 더욱 <진리>를 덮고 쾌락의 베일이나 상당한 의복을 입히라. 왜그러냐 하면 알몸의 <진리>는 승정들이 볼 수 있는 것이 아닐 터이니! 이와 같이 짜라투스트라는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