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과 산문

임어당<꿈에 대하여>

미송 2009. 4. 7. 17:51

꿈에 대하여/ 임어당

 

 세상 사람들은, 불만이란 신성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어쨌든 불만은 인간의 고유한 것이라는 점만은 나도 시인한다. 동물사 중에서 원숭이는 최초의 불평가이었다. 실로 침팬지 이외의 동물에서 슬픈 얼굴을 나는 일찌기 본 일이 없다. 나는 이러한 동물이야말로 철학자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슬픔과 심려와는 비슷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표정을 보고 있으면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소는 생각이 적어도 철학적 사색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왜 그러냐하면 소는 항상 퍽 만족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기야 코끼리도 무서운 분노쯤은 마음속에 가지고 있겠지만 끊임없이 그의 큰 코를 흔들고 있는 모습은 사색과는 아주 거리가 멀어보이고 잠겨 있는 모든 불평을 털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오직 원숭이만이 완전히 삶에 시달린 얼굴을 하고 있다. 원숭이란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 아마도 철학은 결국 이 권태감에서 시작된 것인지도 모른다.

 

하여간 인간의 특성은 어떤 이상에 대하여 슬퍼하고 걷잡을 수 없이 그리워하며 동경을 품고 있는 것이다. 현실의 세계에 살고 있으면서도 인간은 아직도 다른 세계에 대한 꿈을 꾸는 능력과 경향을 가지고 있다. 아마도 인간과 원숭이와 다른 점은, 원숭이는 단지 권태감을 느끼고 있을 뿐인데 반하여 인간은 권태감 이외에 상상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우리들은 누구나가 다 구습에서 벗어나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누구나 다 더 이상의 무엇이 되어 보기를 기대하며 모두가 꿈을 꾸고 있다. 일등병은 하사의 꿈을 꾸고, 하사는 대위의 꿈을 꾸고, 대위는 소령이나 대령의 꿈을 꾸고 있다. 그러나 대령이 될 만한 기지가 있는 인물이라면 자기가 대령으로 있는 것을 별로 아무렇지 않게 생각한다.

 

좀더 품격 있는 말투로 자기의 현직을 자기의 동료들에게 봉사할 기회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런 정도밖에 안 된다. 존 크로포오드는 세상에서 생각하고 있는 만큼 자신을 과대평가하지 않으며, 자넷 게이너는 세상이 생각하고 있는 만큼 자신의 일을 생각하고 있지 않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위대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당신은 참 훌륭하군요." 하고, 만약 그들이 정말로 위대하다고 시인하면 언제나, "훌륭하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 이렇게 묻는다. 그러니까 세상이란 것은 일류 요릿집과 비슷하다. 사람들은 옆 테이블에서 주문한 요리 쪽이 훨씬 양이 많아 보이고 맛도 더 있어 보인다고 생각한다.

 

현대 중국의 어느 교수는 인간의 이 부러움이라는 문제에 대하여 이러한 명언을 말한 적이 있다. "아내는 남의 아내가 더 나아 보이고 저술은 자기의 저술이 더 나아 보인다." 그러므로 이런 의미에 있어서 완전히 만족하고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사람들은 그 남이라는 것이 자기 자신이 아닌 한 모두가 자기 아닌 남이 되고 싶어한다. 이러한 인간의 특색은 확실히 상상력과 꿈꾸는 능력에서 이루어진다. 상상력이 크면 클수록 언제나 불만족한 생활뿐이다. 언제나 다른 아이보다 상상력이 풍부한 아이를 다루기가 더 곤란한 것은 이 까닭이다.
 

인간은 소처럼 즐겁고 만족하고 있는 것보다 원숭이같이 슬프고 우울한 때가 더 많다. 역시 이혼이라는 것은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들, 다시 말해서 상상력이 부족한 사람들보다 이상주의자-상상력이 풍부한 사람들-사이에 더 많이 있는 일이다. 이상적인 인생의 반려를 바라는 환상은, 상상력이 부족하고 이상주의적 생각이 적은 사람에게는 저항할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인류는 대체로 이상주의의 덕택으로 향상도 하고 사도로 비뚤게 가기도 하지만, 상상력이 없이 인류가 진보할 수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인간에게는 포부가 있다고 말들 한다. 포부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고귀한 것으로 간주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소유한다는 것은 매우 훌륭한 일이다. 사실 그렇지 않은가? 개인으로나 국민으로나 우리들은 모두 꿈을 가지고 있으며, 많든지 적든지 그 꿈에 따라서 행동한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그 꿈의 심도가 깊다. 그것은 어느 가정에나 꿈이 많은 아이와 꿈이 적은 아이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나는 솔직하게 말하자면 실은 남몰래 비밀로 꿈꾸는 아이를 좋아한다. 꿈을 꾸는 사람은 꿈을 꾸지 않는 사람보다는 대체로 슬픔이 많은 사람이다. 그러나 문제될 것은 하나도 없다. 슬픔이 많으면 많을수록 보다 더 큰 기쁨과 감동을 느낄 수 있고 높은 황홀경에 드나들 수도 있다. 왜냐하면 라디오 세트가 공기 중에서 음악을 감수할 수 있게 되어 있는 것처럼 인간의 사상에 대한 수신기와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감수성이 예민한 세트는 다른 세트가 할 수 없는 예민한 단파를 감수한다. 더욱더 먼 곳에서 오는 예리한 음악은 매우 감수가 힘든 것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좋은 음악이 아니라는 까닭은 조금도 없다.

 

유년기의 꿈은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같이 그렇게 비현실적인 것은 아니다. 아무튼 그 꿈은 우리의 인생을 통하여 우리에게 남아 있다. 그러므로 내가 만약 세계의 어느 한 작가가 될 수 있다면 나는 어느 누구보다도 한스 크리스찬 안데르센이 되고 싶다. 인어가 무슨 생각을 할까 하는 것을 생각해 보거나, 좀더 나이가 들면 자기는 물위로 떠올라 보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인어의 이야기를 쓰거나 자기들 자신이 인어가 되어 본다고 하는 것은 흔히 인간에게 가능한 가장 예민하고 가장 아름다운 기쁨의 하나를 감각한 것이 되는 것이다. 골목길에서나 지붕 밑 다락방에서나 헛간에서나 또는 물가를 따라 딩굴면서 아이들은 언제나 꿈을 꾸는 것이다. 그리고 그 꿈은 그대로 실현되는 것이다.

 

토머스 에디슨도 그렇게 꿈을 꾸었다. 월터 스콧 경도 그렇게 꿈을 꾸었다. 세 사람이 모두 다 유년시대에 꿈을 꾼 것이다. 그러한 마술적인 꿈 속에서 인간이 일찌기 본 적이 없는 가장 우아하고 가장 아름다운 피륙이 짜여져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소수의 아이들도 역시 이러한 꿈을 꾼다. 그들의 꿈의 환상과 내용은 다르더라도 그들이 얻는 기쁨의 크기에는 다름이 없다. 모든 아이들에게는 누구나 다 동경심이라는 것이 있다. 그 동경심을 가슴에 안고 잠을 자러 간다. 내일 아침에 잠이 깨어 일어났을 때 그의 꿈이 정말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잠을 자는 것이다. 그는 그 꿈의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꿈은 자기만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꿈은 마음 한구석에서 자라나는 자아의 한 부분인 것이다. 이런 아이들의 꿈 가운데에는 다른 꿈보다도 뚜렷하고 실현력이 강한 것도 있다. 또 한편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그리 뚜렷하지 못한 꿈은 잊혀지고 만다.  그리고 인간은 모두 어린 시절의 그 꿈 이야기를 남에게 하려고 노력하면서 인생을 살아가다가 결국은 이야기할 말도 채 하기 전에 죽어가는 수도 있다.

 

어느나라 사람이고 역시 그러하다. 어느 국민도 모두 그들의 꿈을 가지고 있다. 그 꿈의 기억은 수세대와 수세기까지도 계속된다. 그중에는 고귀한 꿈도 있고 사악한 또는 비천한 꿈도 있다. 정복의 꿈이나 모든 다른 국가보다 강대해지려는 꿈은 악한 꿈이어서 그러한 국가는 보다 더 평화스러운 꿈을 가지고 있는 국가보다도 언제나 많은 고통을 당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러한 꿈과는 아주 다른, 보다 더 좋은 꿈이 있다. 보다 더 훌륭한 세계에로의 꿈, 여러 국민이 서로 평화스럽게 살기를 원하는 꿈, 잔인과 부정과 빈곤과 고통을 적게 하고자 하는 꿈들이 그것이다. 사악한 꿈은 인류의 선한 꿈을 파괴하기 쉬운 것이므로 이 선한 꿈과 악한 꿈 사이에는 불화와 다툼이 있다.

 

사람들은 그들의 지상의 소유물 때문에 싸우는 것과 같이 그 꿈을 위해서도 싸운다. 그러면 꿈은 유휴의 환영 세계로부터 내려와서는 현실 세계로 들어가 인생의 현실이 되는 것이다. 아무리 그 꿈이 모호한 것이라 할지라도 꿈은 그 자신의 모습을 감추는 방법을 알고 있으므로 현실로 바꾸어지기 전에는 인간에게 아무런 평화를 주지 못한다. 그것은 마치 땅 밑의 씨앗이 반드시 햇빛을 찾아서 새싹을 트게 하는 것과 흡사하다. 꿈이란 것은 매우 현실적인 것이다. 혼란된 꿈 또는 현실과 부합되지 않는 꿈을 꾸면 위험한 일이 생기기도 한다. 왜냐하면 꿈은 또한 도피이기도 하므로, 몽상가는 가끔 현실의 세계에서 지향없이 도피하는 꿈을 꾸기 때문이다. 파랑새는 언제나 로맨티스트의 공상을 이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다 현재의 자기와는 다르게 되어 보고 싶다는 욕망이 있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변화만 제공해 주는 것이라면 보통 사람들의 심리에 무서운 매력을 준다.

 

전쟁이란 것은 언제나 매력적이다. 그 까닭은 전쟁을 하면 시청의 서기에게도 군복을 입고 가죽 각반을 두르고 무전 여행을 할 기회가 부여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참호전이 3, 4년 계속되면 언제나 휴전이나 평화가 그리워진다. 왜냐하면 휴전이라는 것은 출정 군인에게 집에 돌아와서 민간의 평복을 입고 빨간 넥타이를 맬 기회를 부여해 주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이렇게 그 어떤 자극이 절대로 필요하다. 그러므로 전쟁을 피하고 싶다면 모든 정부들은 20세부터 40세까지 국민을 징병제도하에 징집하여 매 10년에 한 번씩 유럽여행을 시켜서 박람회나 그 밖의 것을 구경시켜 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 영국 정부는 현재 재군비 계획에 50억 파운드를 소비하고 있는 중인데, 그 50억 파운드란 액수는 전 영국 국민을 리비아에라도 여행시키기에 충분한 금액이다.

 

그러나 물론 전쟁 경비는 필요한 것이나 여행은 사치라고 하는 반대론이 일어날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절대로 동의할 수 없다. 여행이 필요한 것이고 전쟁은 사치가 아닐까? 이 밖에도 꿈은 또 있다. 유토피아의 꿈, 불로불사의 꿈 등. 불로불사의 꿈은 매우 인간적인 맛이 있다. 이 꿈은 매우 보편적이라는 데에 주의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불로불사의 꿈도 유토피아의 꿈처럼 막연한 것이어서, 그것이 그들의 손안에 걸려들어도 이제부터 무엇을 해야 할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결국 불로불사의 욕망은 그것과 정반대인 자살의 심리와 흡사한 점이 매우 많다. 양쪽 모두 현실세계는 인간에게 있어 충분히 좋은 것이 되지는 못한다고 추정되고 있다. 왜 이 현실세계가 우리 인간에게 좋지 않다는 것일까?

 

춘광이 넘실거리는 봄날에 전원으로 산책을 나가면 그러한 대답에 대하여보다도 그 물음 자체에 더욱 의외로 놀라고 말 것이다. 유토피아의 꿈도 역시 이와 마찬가지이다. 이상주의란 어느 다른 세계의 질서를 신봉하는 정신상태에 불과한 것이다. 그 질서가 어떠한 종류의 질서라 할지라도 현실의 그것과 다르기만 하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상주의적인 자유주의자는 자기자신의 나라가 가장 최악의 국가라고 생각하며, 또 자기가 살고 있는 사회가 가장 최악의 사회 형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는 아직도 일류 요릿집에서 옆 테이블에 앉은 사람이 주문한 음식이 자기 자신의 것보다 훌륭하다고 믿는 사람이다. 뉴우요오크 타임즈의 토픽란에서 필자가 말한 것으로서, 이러한 자유주의자의 눈에는 러시아의 드녜프르 댐만이 정말 댐이고 민주주의 국가는 아직 댐이라고는 건설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물론 소련만이 오직 지하철도를 만들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그와 반대로 파시스트 신문은 자기 나라에서만 인민은 지각 있고 올바르며 유능한 정치형태를 발견하였다고 그 국민에게 고하고 있다. 바로 그 속에서 유토피아의 자유주의자이건 파시스트의 선전부 간부이건 모두 다 그 위험에 놓여 있는 것이다. 반드시 필요한 교정제로서는 유우머의 감각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