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과 산문

한용운- 군말

미송 2011. 12. 23. 18:59

 

 

님만이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이 다 님이다.

衆生이 석가의 님이라면, 哲學은 칸트의 님이다.

薔薇花의 님이 봄비라면 마시니의 님은 伊太利다.

님은 내가 사랑할 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나니라.

 

 

- 한용운<군말>, 서두 

 

 

'기룬것', 바로 '생명을 머금게 하는 것'은 다 님이라는 것이 위의 진술이다. 중생이 없다면 석가도 없고, 봄비가 없다면 장미화도 피어나지 않는다. 중생이 없다면 석가의 깨달음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태리가 없다면 어떻게 이태리의 독립운동을 한 마시니가 있겠느냐. 내가 사랑하므로 님이 있고, 님이 사랑하므로 내가 있다. 중생과 석가, 장미화와 봄비, 마시니와 이태리 그리고 나와 님은 둘이 아니고 하나이다. 하나를 둘로 나눌 때 분쟁이 생기고 속박이 생긴다. 그러므로 , '사랑의 꿈에서 불멸을 얻겠습니다'고 한 말은 결코 공소한 결의가 아니다.

 

중생과 석가가 하나일 때, 다시 말하면 님과 내가 하나일 때 불멸을 얻을 수 있지만, 불행히도 한용운이 시를 써야 했던 시기는 중생과 석가가 하나가 아니고 님과 내가 하나가 아니었다. 3.1독립운동은 실패로 끝났다. 독립운동의 선봉에 나섰던 사람들이 광휘의 순간에 보았던 시적 비젼은 사라지고, 좌절과 파탄에 직면한다. 한때의 좌절을 이기지 못한 중생들이 헛된 그림자를 뒤쫓아 다니는 시대야말로 '님이 침묵' 하는 시대인 것이다. 그가 혁명가나 선승이 아니라 시인으로서 독자 앞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와 같은 이유에서이다. 

 

나는 해 저문 벌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羊이 기루어서 이 詩를 쓴다.

 

-<군말>, 마지막 행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과 같은 중생을 위해 시를 쓴다고 할 때, 한용운의 목표는 자명한 것이다. 중생으로 하여금 속박을 떨치고 하나의 길로 나아가게 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떠나간 님을 되돌아오게 하는 것이야말로 절대절명의 목표이다. 침묵하는 님을 대신하여 길을 잃고 헤매는 중생들에게 참된 희망의 길을 알리기 위해 한용운은 '님의 침묵'을 써야만 했던 것이다.  <최동호>

 

최동호<하나의 道에 이르는 詩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