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과 산문

박상우 <그곳에서는 바다가 길이 된다>

미송 2012. 1. 5. 15:36

 

 

 

 

그곳에서는 바다가 길이 된다

-양양 조산리 앞바다

 

 

혼자 조산리 앞바다를 내다보고 있으면 바다가 열리는 게 보인다

바다가 열린다는 건 바다가 바다로 보이지 않고 길로 보인다는 뜻이다.

세상에 바다보다 드넓은 길이 어디 있겠는가.

 

 

 

강원도 양양에 있는 낙산사나 낙산해수욕장을 모르는 사람은 드물다. 하지만 양양 조산리 앞바다를 아느냐고 물으면 선뜻 안다고 대답하는 사람도 드물다. 그런데 낙산사와 낙산해수욕장이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조산리 앞바다도 낙산해수욕장과 연결돼 있다. 해수욕장이 끝나는 지점에서 조산리 앞바다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낙산사나 낙산해수욕장에 왔다가도 조산리 앞바다의 독특한 면모를 못 보고 가는 경우가 많다.

 

동해는 서해와 완연히 다른 면모를 지닌 바다이다. 바닷빛이 그렇고, 청정도가 그렇고, 아기자기한 바다의 면모가 또한 그렇다. 대관령을 넘어 동해안으로 접어들면 7번 국도를 따라 거의 이삼 분 간격으로 하나씩 해수욕장이 나타난다.  해수욕장이 있다는 건 곧 작은 어촌이 있다는 뜻이다. 안으로 모두 다르다는 걸 알게 되면 바다와 교감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동해에는 서로 다른 얼굴을 지닌 숱한 바다들이 산다고 생각한다. 조산리 앞바다는 할 수 없는 근원성을 지닌 바다이고 바다를 넘어서는 심오한 이미지를 보여주는 바다이다. 하지만 어느 위치에서 조산리 앞바다를 보느냐에 따라 느낌이 달라진다. 즉 바다 보는  위치를 제대로 정해야 조산리 앞바다의 면모를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것이다.

 

조산리 앞바다를 관망할 때 가장 큰 관건은 숙소의 위치이다. 그게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곳을 지나치면서도 '조산리 앞바다'를 고유명사로 각인할 수 없다. 다행스럽게도 조산리 앞바다를 보기 가장 좋은 위치에 숙박업소가 하나 있다. 그곳의 이름을 알려주는 것보다 양양 낙산사나 낙산해수욕장으로 갈 기회가 되거든 그곳을 직접 찾아나서는 것도 흥미진진한 일이 될 것이다. 낙산해수욕장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계속 걸어 올라가면 시설물이 긑나는 마지막 지점의 해안선에 그곳이 나타난다. 그리고 그곳에 묵게 된다면 반드시 바다 쪽으로 난 방, 그리고 5층이나 6층의 객실을 얻을 일이다. 내가 그곳을 처음 찾았을 때의 감회를 적은 글을 읽어보면 느낌을 좀더 구체적으로 접할 수 있을 것이다.

 

해안선 모텔은 해변이 끝나는 지점에 바다와 인접해 있었다. 내가 그곳을 발견한 것은 오후 3시경, 추암과 정동진을 거쳐 7번 국도를 따라 무작정 북상하고 있을 때였다. 바다를 끼고 달리던 어느 순간, 해송 숲 위로 불쑥 솟아오른 매우 독특한 건물이 시선을 사로잡아 순간적으로 핸들을 꺽었다. 모텔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6층 건물이었더. 전면이 흑유리로 뒤덮인 모던한 외관은 시공이 끝난 상태였지만, 1층 입구에 "노란 선을 따라 3층으로 올라오면 프린트가 있습니다" 라는 표시가 나붙어 있어 나는 무심코 노란 선을 따라 3층으로 올라갔다. 그러자 넓은 중앙홀과 프런트가 나타났다. 나는 프런트에 앉아 있는 여직원에게 물엇다.

"여기 머물 수 있나요?"

 

여직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6층 키를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들고 6층으로 올라가자 시야를 방해하는 구조물들이 단 한 점도 눈에 띄지 않는 온전한 바다, 다시 말해 드넓은 시원의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기막힌 콘도형 객실이 나타났다. 발코니로 나가자 좌우의 해변까지 한눈에 내다보이는 가슴 벅찬 절경이 펼쳐졌다. 일출을 보기 위해 굳이 밖으로 나갈 필요도 없었다. 침대에 누운 채 바다를 한눈에 내다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알고 있는 한, 그곳은 이 지상에서 가장 전망 좋은 방이었다. 그걸 어떻게 말로 설명하나. [중략]

 

그날 정오 무렵 그곳을 떠나기 전에 나는 해변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사랑해' 라는 가로세로 20여 미터 크기의 모래글씨를 가까운 곳에서 한참 동안 내려다보았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저렸다. 그래서 좀더 걸어나가 파도가 들이치는 젖은 해변을 밟고 걷다가 문득 모래글씨가 있는 곳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거대한 글씨 위쪽에다 이렇게 썼다. 아무리 건너도 끝끝내 건너지지 않는 바다 : 사랑해海

 

-작가수첩 '반짝이는 것은 모두 혼자다' 

 

그곳에 방을 얻으면 태곳적의 바다가 보인다. 그래서 나는 그곳을 '시원始原의 바다' 라고 부른다. 동해안의 바다가 모두 개성 강한 모습을 보여주지만 그중에

내가 가장 최고로 꼽는 두 바다가 있으니 조산리 앞바다와 고성통일 전망대에서 내다보는 북쪽바다이다. [중략]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도다

온갖 것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고

모두가 싫어하는 낮은 곳으로도 흐른다

그러므로 물은 길에 가깝다

 

살 때는 물처럼 땅을 이롭게 하고

마음을 쓸 때는 물처럼 깊게 하고

사람을 사귈 때는 물처럼 어질게 하고

말을 할 때는 물처럼 믿음을 주고

정사를 돌볼 때는 물처럼 다스리고

일을 처리할 때는 물처럼 능함을 보이고

움직일 때는 물처럼 시기를 맞추어 좋게 하라

 

한결같이 겨루는 일이 없으니 허물이 없도다

 

-노자, '도덕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