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과 칼럼

만해, '여성-되기'의 두 가지 스펙트럼

미송 2012. 1. 10. 16:20

 

 

 

운명애 (Amor Fati)

 

만해의 여성 화자는 사랑을 둘러싼 낡는 통념을 전복하면서 생에 대한 긍정으로 나아간다. "생명보다 사랑하는 애인을 사랑하기 위하여는, 죽을 수가 없는 것이다. / 진정한 사랑을 위하여는 괴롭게 사는 것이 죽음보다도 더 큰 희생이다." (<이별>)  그렇다고 이것을 수동적으로 피학적인 여성성의 발현으로 보아서는 곤란하다. 오히려 이 사랑은 이별의 고통, 죽음보다 더 큰 희생 속에서도 결여를 알지 못한다. 그렇기는커녕 이별의 아픔, 복종과 정조 등 '고해(苦海)의 바다' 에 뛰어들수록 더더욱 완성되고 충만한 열정으로 채워진다. 어떤 상황에서도 결여가 훼손을 알지 못하는 충만한 신체인 것. 다시 말해 가장 익숙하고 통속화된 개념들을 전혀다른 배치 속으로 밀어넣음으로써 생의 심연을 탐사하는 탈영토화 운동을 밀고 간다. 그리하여 그것은 마침내 생에 대한 절대적 긍정, 운명애에 도달한다.  

 

사랑의 줄에 묶기운 것이 아프기는 아프지만,

사랑의 줄을 끊으면 죽는 것보다도 더 아픈 줄을 모르는 말입니다.

사랑의 속박은 단단히 얽어매는 것이 풀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해탈은 속박에서 얻는 것입니다.

님이여, 나를 얽은 님의 사랑의 줄이 약할까 봐서, 나의 님을 

사랑하는 줄을 곱들였습니다.

 

-(선사의 설법)

 

 

사랑의 속박이 꿈이라면

출세의 해탈도 꿈입니다.

웃음과 눈물이 꿈이라면

무심(無心)의 광명도 꿈입니다.

일체만법(一切萬法)이 꿈이라면

사랑의 꿈에서 불멸을 얻겠습니다.

 

-(꿈이라면)

 

대해탈은 속박에서 오고, 사랑의 꿈에서 불멸을 얻겠다는 위대한 역설, 그것은 동체대비(同體大悲) 곧, 중생의 고통과 함께하겠다는 대승불교의 요체에 다름 아니다. <님의 침묵>과 같은 시기에 저술한 <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의 한 구절, 즉 "열반성리상유위(涅槃城裡尙猶危 ; 생사에 집착하면 이미 범부다. 열반에 구애되어도 성인이 아니다. 생사가 두렵다 이르지 말라. 열반은 더욱 위태롭다.)" 에서도 그런 사유의 심층을 엿볼 수 있다. 

 

만해 시에 대한 다음과 같은 주석도 같은 맥락에서 음미할 수 있으리라.

 

나의 님은 본시 치성(熾盛)한 불꽃!

욕망의 변이는 자연스럽네, 나에게로 올 때도 나를 떠날 때도!

사랑으로 올 때 이별 이미 잉태하였네. 원한을 품음이 당키나 한가?

나에게로 올 때 다른 이 원한 놓고 왔으리!

구하여도 얻지 못함은 세간의 실상, 생로병사 또한 여여(如如)한 그대 모습 아닌가.

 

생사고해 그 외부가 있다면 어디라도 가겠지만,

그 밖은 어디에도 없다네. 여래의 고향도 그곳이라니.

이제 여래의 고향 생사의 바다로 귀환하며 거침없이 노래하리라!

 

-('고옥 스님의 강의안' 중에서)

 

 

우주적 비의(秘意)

 

그와 더불어 이 여성의 사랑은 점점 비의에 가득 찬다. 그것은 소월 시의 아련함이나 모호함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숨기거나 감싸기는커녕 모든 것을 그대로 투명하게 드러낸다. 그런데도 아무도 그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다. 통상적인 시선과 관념으로는 결코 포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너무도 투명하기 때문에 비밀이 되는 이 기이한 역설.

 

이를테면 "모든 것을 감추지 않고 드러내지만, 그것은 이미 다수적인 척도, 지배적인 관념, 몰적인 구획선을 비껴나고 벗어나 있기에, 그런 척도, 그런 관념을 갖고 있는 사람들로선 이해할 수 없"는 것인 셈이다. 그러므로 "그림자 없는 구름을 거쳐서 존재하는 이 사랑에는 '국경도, 시간도 없'다. 그리하여 마침내 "님의 눈과 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사랑의 존재>) 지각 불가능한 것이 되어버린다.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루한 장마 끝에 서풍에 물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 위의 고요

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 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날을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

은 누구의 시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알 수 없어요)

 

존재의 모든 것에서 님의 흔적을 읽어내는 이 사랑은 에로틱한 열정이 우주적 사랑으로 나아간 극한을 보여준다. 그것은 우주의 모든 현상에 편재하기 때문에 오히려 지각할 수 없는 '무엇'이 되어버렸다. 그러므로 이 사랑에는 완결이 없다.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되는, '절대적 탈영토화의 지대'에서 다시 번뇌의 한복판으로 돌아와 그 불꽃 속을 통과하겠다는 발원, 그 속에서 이 사랑은 마침내 불멸을 얻게 된다.

 

다시 <십현담주해>를 인용하면, "본래무주불명가(本來無住不名家 ; 불법은 내외 중간이 없고 정해진 곳도 없다. 미리 정해진 곳이 없으니 왜 집이라 이름 붙이는가? 처소도 머물 곳도 없고 집도 없으니 고향집에 돌아온다는 것은 틀린 것이다.) 또는 <군말>에서 말한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라는 경지가 이런 것일까.

 

이 지극한 경지를 호명할 수 있는 의미화의 장은 없다. 1920년대는 말할 것도 없고, 지금 또한 그러하다.     

 

 

- 고미숙 <나비와 전사> 278~28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