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과 칼럼

김경주의 『시차의 눈을 달랜다』

미송 2012. 1. 18. 18:49

 

의 시편

―김경주의 『시차의 눈을 달랜다』와 조연호의 『천문』

 

오은

 

   어떤 시집들은 읽을 때 힘이 많이 든다. 아니, 힘이 든다기보다는 의식적으로 힘이 들어간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문장 하나를 읽을 때도 자꾸 멈칫거리게 되고, 단어들은 한동안 입 안에서 맴돌다가 목구멍으로 겨우 삼켜진다. 이상하게도 몇 번을 읽어도 단어들은 내 것이 아닌 것 같고, 문장들 앞에서는 끊임없이 쭈뼛거리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김경주와 조연호의 세 번째 시집을 대하는 태도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들의 시집은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우리를 못내 주저하게 만든다. 거의 다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놓쳐버린 고무풍선처럼 망연히 허공을 쳐다보게 만든다. 그러고 나면, 십중팔구 허공 어디께 뭔가가 있을 것 같은 느낌이 현장을 뒤덮는다. 시적 분위기와 시를 읽는 사람을 압도하는 분위기가 맞부딪히며 거기서 발생한 야릇한 금속성金屬聲이 뇌리를 진동하는 것이다.

  

이처럼 김경주와 조연호의 시편은 우리를 계속해서 궁지에 몰고 가려고 한다. 만만치 않은 스파링 파트너를 만난 복서처럼, 우리는 궁지로 향하면서도 항상 궁지 너머에 시선을 둘 수밖에 없다. 시를 읽는 동안, 시종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급소를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궁지에 드는 빛 한 줄기를 그러쥐지 않으면 어느 순간 펀치에, 그리고 펀치만큼이나 강력한 펀치라인(punchline)에 심신을 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펀치를 피할 수는 있지만 정작 펀치를 날릴 수는 없는 심정으로 시편을 대해야 한다. 그러는 동안 우리의 눈과 귀는 점점 뾰죽해지고, 아주 작은 사물도 볼 수 있는 동시에 아주 작은 소리도 들을 수 있게 된다.

  

김경주는 이번 시집 『시차의 눈을 달랜다』에서 ‘보는 것’과 ‘보이는 것’에 대한 자신의 궤적을 더욱 넓혀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시각’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않는 방랑객의 심정으로 연거푸 묻는다. “추측”과 “판독”(「여독」 中에서)에 대해, “이야기의 중간에 문득 사라진 아이들의 상태”(「작은 소설」 中에서)에 대해, 그리고 “손가락이 물속에서 한없이 길어지는 이 저녁”(「펭귄」 中에서)에 대해. 이것들 대부분은 이미지가 제시되지 않거나 흐릿하지만, 그는 그 흐릿함에 몽롱함을 덧입혀 읽는 이의 시각을 처음부터 끝까지 자극한다. 이 자극은 모종의 의혹을 자꾸 불러일으키고, 이 의혹은 뜻 모를 기시감(deja vu)을 낳는다. ‘이미 보았던 것’이지만 마치 처음 본 것처럼 생경하고 뜨악한 느낌. 이를테면, 눈이 느끼는 이물감. 조금 더 노골적으로 말해, 시차(time lag).

  

김경주가 우리의 시각을 쉴 새 없이 뒤흔들어놓는다면, 조연호는 『천문』에서 우리의 청각을 쥐락펴락한다. 시집을 읽다보면, 어느 순간 별자리가 속삭이는 은밀한 말이나 은하수에 반쯤 잠긴 음악에 귀를 내맡긴 느낌에 휩싸이게 된다. 중간에 삽입되어 있는 짤막한 대화나 잠언들조차 정체가 불분명한 리듬을 타고 시종 귀의 문턱을 두드려댄다. ‘귀’와 같은 명사나 ‘듣다’와 같은 동사가 빈번하게 쓰이지는 않았지만, 그가 적은 문장들은 읽는 순간 이상하게도 청각을 자극한다. 그는 “들은 것을 눈으로 볼 수 있는 능력으로”(「결말의 꽃」 中에서) 현장을 담은 뒤, 그것을 다시 우리로 하여금 ‘들을 수 있도록’ 연주해준다. 그 연주는 비록 친절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바로 등을 돌려 외면하기엔 너무나 처연하고 아름답다. 요컨대 김경주가 시차에 의한 이물감을 우리에게 선사한다면, 조연호는 “암보(暗譜 : 악보를 외워서 기억함)로”(「배교자 총서」 中에서) 연주하는 문장으로 우리의 귀를 사로잡는 것이다.

 

『시차의 눈을 달랜다』에서 가장 도드라지는 점은, 뭐니 뭐니 해도 김경주가 자신이 처한 상황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표제에서도 드러나듯, 그것은 결국 전적으로 눈’의 소관이다. 집중의 대상이자 원동력은 신기루 같은 현상이나 멜랑콜리 같은 감정이고,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어떤 정직한 자세, 구체적으로 말해 시각視角이다. 이 시각은 신체의 수많은 감각 작용들 중 유독 시각視覺에 의해 구성되는 특징을 보인다. 그동안 많은 시인들이 ‘보는 것’과 ‘보이는 것’에 사로잡혀 개인적인 풍경들을 시 속에 담아내곤 했지만, 김경주가 이 시집에서 행한 것은 단순한 관찰을 뛰어넘는다. 그것은 외려 꿰뚫기에 가깝고, 이 꿰뚫기는 읽는 이의 마음을 시종 들었다 놨다 한다. 바라봄에 어떤 진심이나 곡진함이 느껴지는 것이다. 요컨대, 마음이 그득히 담긴 통찰.

  

김경주의 상황은 특정 공간에서 만들어지고, 그것은 다시 시간의 영역에 복속되는 양상을 띤다. 그 공간들을 명확히 파악하는 건 얼핏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거기에는 상상 속에서만 그려볼 수 있는 “도원”과 같은 추상적인 공간도 있고 “복싱 도장”처럼 맘만 먹으면 동네 어귀에서 발견할 수 있을 법한 공간도 있다. 재미있는 점은 그 어떤 공간도 구체성을 가지지 않고, 그 때문에 우리는 공간 자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질감을 거의 느낄 수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질감은 거의 대부분 시간을 위해, 시간대를 지나가는 피조물을 위해, 시간 때문에 쉴 새 없이 오락가락하지 않을 수 없는 피로한 여행객에게 할애된다.

  

“집”도 시 속에 여러 번 등장하지만, 그것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안식처라기보다는 여행객들이 하룻밤 묵고 떠나야 하는 숙소처럼 그려진다. 그가 이따금 휴식을 취하는 곳 역시 어떤 완벽한 주거지의 형태를 가진다기보다는 협소하고 비루한 공간이 많다. 가령, 욕조 같은 곳. 김경주는 두 발을 다 뻗을 수 없을 만큼 욕조가 좁은데도, 오히려 욕조에는 “파도가 없어서 좋”다고 말한다. 또한 그는 그곳에서조차 상상 속으로 여행하는 것을 그만두지 않는다.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을 뿐인데, 그는 어느새 “벨기에 맥주 축제”에 가 있거나 “안데스산맥”으로 떠나 있다. 그곳에서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김경주의 목소리는 더할 나위 없이 “따스海”(이상 「모래의 날들」 中에서)서 우리는 ‘여기’가 어딘지 잠시 잊고야 만다. 이처럼 김경주가 설정한 공간들은 하나같이 굉장히 이질적인 느낌을 가져다준다. 왕가위의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부유하는 공간들이, 김경주 시의 공간을 구성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공간―조각 위에 <동사서독>부터 <화양연화>까지의 감정이 덧입혀져 비로소 하나의 독특한 세계가 구축된다.

  

시를 읽다 보면, 그에게 있어 여행과 유랑은 삶을 살아가다 한두 번쯤 하는 ‘일탈’이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방식’ 그 자체처럼 보인다. 따라서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돈다는 것, 도착한 공간에서 모종의 설움을 느끼다가 자신과 근친인 누군가의 자취를 발견하는 것, 그러다 결국엔 현기(眩氣 ; 눈이 아찔하고 어지러운 기운)를 참지 못하고 또 다른 공간으로 발을 옮기는 것 등은 하나의 ‘여정’이라기보다는 ‘삶을 마주하는 태도’나 ‘천성’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발견들’은 대부분 “비밀의 무렵”(「천 개의 학을 입에 문 날들」 中에서)이나 “나비를 만져 본 날”(「나비의 입술 속으로 들어간 밤」 中에서)처럼 도통 짐작할 수 없는 시간대에 이루어진다. 그때 사방으로 뻗은 모든 감각들을 통솔하는 것은 다름 아닌 시각이다. 무언가를 열심히 본다는 것은 그것을 가장 멀리서 만지는 일이고, 주체할 수 없는 감정과 깨달음을 불러일으키는 일차적 관문에 다름 아니다. 그는 벼리어진 두 눈으로 상황에 파고든 뒤, 시각을 통해 어떻게든 상황을 뚫고 지나오려 한다. 눈은 상황들을 거치면서 잔뜩 피로해지지만, 그는 자신의 눈을 스스로 달래며 그 상황들을 자기 것으로 만든다. 그에게 있어, “눈(目)은 사람이 자신의 폭설에게 보태는 체온 같은 것”(「북극의 연인들 ―여섯 개의 회문」 中에서)이다. 세계를 움직일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이자 모든 가능성.

  

여독이 극에 달하고 체력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을 때조차 김경주는 또 다른 이별을 하기 위해 발걸음을 떼는 것을 그만두지 않는다. 자신을 자꾸만 놓아주려 하는 것이다. 그는 “한 눈이 다른 한쪽 눈을 구출”(「여독」 中에서)할 수 있도록, 시간을 유예시키고 끊임없이 뒤를 돌아보며 혹시라도 놓친 게 없는지 확인하려 한다. 눈을 달래기 위해 눈을 감기보다는 눈을 더욱 날카롭게 벼리는 수를 택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시를 읽다 보면 ‘시차의 눈을 달랜다’는 표제를 자연스레 ‘시차에 눈을 달랜다’로 오독하게 된다. 시차에 눈을 맡기고, 나도 모르게 어디론가 유영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또다시 모든 것을 세세히 관찰하기 시작한다. “나비 한 마리가 사람처럼 일어나 긴 기지개를 펴”는 모습에서부터 “120킬로에서 90킬로로 조는 엄마의 눈꺼풀”(이상 「모래의 날들」 中에서)까지. 그리고 이 문장들을 다 읽었을 때, 우리는 딱 ‘나비의 날개’나 ‘엄마의 눈꺼풀’만큼의 무게로 내려앉는다. 이방異邦에 온 사람처럼 약간은 피로하고 약간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렇다. 그의 말마따나 “시간과 공간의 ‘여’ 그곳의 ‘기내’는 시차다.”(「종이로 만든 시차 ―에드거 앨런 포의 반올림한 산문풍으로」 中에서)

 

한편, 조연호는 『천문』에서 지휘하는 예언자의 역할을 감행하고 있다. 그 과감함은 때때로 형식 실험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혼잣말하듯 이루어지는 선언에서 넌지시 드러나기도 한다. “그림자는 귓속을 흐르는 얇은 발목으로 자기 그림자를 건넜다 그런 날, 너의 가장 굵은 엄마에게 작은 발을 남겨두려고 뱀이 태어났지”(「발 아래」 中에서)와 같은 대목을 읽으면, 그가 어떤 식으로 어휘와 문장, 그리고 그 사이사이의 호흡을 쥐락펴락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있다. 문장을 훑는 눈은 스르르 미끄러지지만, 한 번 읽고 나면 다시 문장의 처음께 눈이 갈 수밖에 없다. 낯선 표현에 갸우뚱하다가 잡힐락말락하는 맥락 때문에 이내 난처해지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어휘를 운용하는 방식이 남다르다는 데서 기인한다. 가령, “가장 굵은 엄마”라는 표현은 얼핏 생경하게 느껴지지만, “얇은 발목”과 “작은 발”과 대응하며 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그 힘으로 우리는 ‘뱀의 탄생’에 가닿을 수 있고 시를 계속해서 읽어나가는 추진력을 얻게 된다. 그리고 조연호는 어느새 ‘지휘하는 예언자’에서 ‘예언하는 지휘자’가 되어 우리의 독서를 이끈다.

  

이 지휘자가 이끄는 연주는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지니고 있지만, 그 연주를 내 것으로 만드는 데는 상당한 인내가 요구된다. 연주 스케일이 시시각각 변화하는 것은 물론, 소품에서부터 장송곡까지 다양한 형태의 음악들을 그가 하나의 연주회에서 모두 들려주기 때문이다. “긴 머리카락 같은 강의 목소리로”(「지저귀는 발」 中에서) 들려주는 음악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강은 세계 어디까지든 뻗어나갈 것만 같고, 이 기나긴 강의 기저에 있는 수많은 자갈들은 우리의 항해를 끊임없이 방해한다. 보통, 낯선 한자어들이 자갈의 역할을 대신하곤 하는데, 이 한자어들은 독자들이 시를 읽다가 덜커덕 걸려 넘어지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그때 기다렸다는 듯, 변박變拍이 이루어진다. 잠깐 숨을 멈추고 한자어를 해독하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이를테면 통회痛悔나 하침下沈, 음사音寫 그리고 청종聽從과 같은 단어가 그러한데, 이런 단어가 등장하면 으레 연이 바뀌거나 국면이 전환되어 마치 또 다른 악장樂章이 시작되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게 된다.

  

「발 아래」나 「저녁 수집벽」 등의 시편에서 파악할 수 있듯, 시 속에서 연주의 중심이 되는 화자가 바뀌는 일은 비일비재하며, 문장의 어미가 변화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러나 이 연결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것은 각 연의 메지가 분명하게 나기 때문이다. 「검은 밤 뒤의 흰 밤」 같은 시에서 전면적으로 드러나듯, 우리는 연주회 내내 올림표와 내림표, 제자리표 사이에서 시소를 타는 기분으로 귀를 열어두어야 한다. 이 시에서는 네 개의 발 혹은 네 개의 다리가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되는데, “피아노”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침대”로, “침대”에서 “무죄한 소년”으로, 다시 “무죄한 소년”에서 “양수책상과 편수책상”으로 이어지는 연쇄 이미지들은 시를 읽는 내내 야릇하고 묘한 느낌을 선사한다. 이 이미지들은 “저녁의 불운”이 “메아리로 돌아오는 내 고백”을 이끌어내고 그것이 결국 “까마귀와 창밖이 밤새 되새긴 새로운 절망”을 낳는, 시 속에 펼쳐진 일련의 시퀀스를 더욱 단단하고 미덥게 만들어준다.

  

조연호의 연주는 결국 우리에게 하나의 교훈을 남기며 막을 내린다. 그것은 시를 배신할 것. 더 정확히 말해, 시를 읽는 기존의 방식을 무너뜨릴 것. 의도적인 이중 수식(double restriction)이 난무하고 문장과 화법이 수시로 변주되는 그의 시들이 읽기에 만만치 않은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가 “저편이 이편처럼 푸르게 보일까봐 눈을 감”(「배교」 中에서)았듯, 우리 역시 배교背敎하듯 시를 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은 그동안 공고히 구축되어 왔던 독법 체계를 무너뜨리는 시도나 마찬가지다. 따라서 우리는 “히브리어를 배우는 시간”을 가지고 “배교자 총서”를 읽는 수고를 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하나의 단어가, 하나의 어절이, 나아가 하나의 문장이나 문단이 음악으로 변이되는 과정을 몸소 체험하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이 체험이 끝나면, 우리는 “물 밖에서 자기의 이해되지 않은 몸을 바라보았던 흔적“을 더듬을 수 있고 천문학자의 관악기는 가장 먼 곳의 음계를 짚는다”(「배교자 총서」 中에서)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을 수 있다. 그리고 그때, 우리의 감각은 깨달음으로 인해 점점 더 풍부하고 예민해진다. 풍부하게 예민해진다.

 

김경주와 조연호의 각各 시편은 우리를 각角으로 내몬다. 우리는 그 궁지에서 각角을 세우고 그들이 하는 말에 찬찬히 귀를 기울여야 한다. 정남쪽에서 각角이라 불리는 별들이 빛나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므로, 때로는 예각처럼 첨예하게, 때로는 둔각처럼 관용을 담아 눈과 귀를 열어야 한다. 한 각刻이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벌어진 일들을 일일이 각刻하듯, 혹은 일일이 각脚 뜨듯, 집중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보고 듣는 행위가 어떤 각覺에 이를 때까지, 눈을 홉뜨고 귀를 치켜세운 채, 각殼을 벗기고 또 벗겨내야 한다. 그것이 각覺의 시편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다. 무방비 상태에서 펀치를 맞고도 피를 흘리지 않고 다음 장으로 넘어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시와사상≫ 2010년 여름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