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과 칼럼

신형철<시뮬라크르를 사랑해>

미송 2011. 12. 9. 18:33

 

 

 

 

 

시뮬라크르를 사랑해

 

신형철

 

 

 

            느낌의 공동체

 

 

느낌은 어떻게 오는가

-이성복, [느낌](그 여름의 끝)

 

 

 

 

나는 너를 사랑한다. 네가 즐겨 마시는 커피의 종류를 알고, 네가 하루에 몇 시간을 자야 개운함을 느끼는지 알고, 네가 좋아하는 가수와 그의 디스코그래피를 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인가? 나는 네가 커피 향을 맡을 때 너를 천천히 물들이는 그 느낌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네가 일곱 시간을 자고 눈을 떴을 때 네 몸을 감싸는 그 느낌이 어떤 것인지를 모르고, 네가 좋아하는 가수의 목소리가 너를 어떤 느낌으로 적시는지를 모른다. 너를 관통하는 그 모든 느낌들을 나는 장악하지 못한다. 일시적이고 희미한, 그러나 어쩌면 너의 일부일지 모를 그 느낌을 내가 모른다면 나는 너의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 것인가. 나는 네가 없는 곳에서 너를 사랑하고, 너는 네가 없는 곳에서 사랑받는다. 그러니까 나는 너를 사랑하지 못한다.

 

느낌이라는 층위에서 나와 너는 타자다. 나는 그저 '나'라는 느낌, 너는 그냥 '너'라는 느낌이다. 그렇다면 사랑이란 무엇인가. 아마도 그것은 느낌의 세계 안에서 드물게 발생하는 사건, 분명히 존재하지만 명확히 표명될 수 없는 느낌들의 기적적인 교류, 어떤 느낌 안에서 두 존재가 만나는 짧은 순간일 것이다. 나는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지금 너를 사로잡고 있는 느낌을 알 수 있고 그 느낌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지금 너에게 필요한 느낌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고 그 느낌을 너에게 제공할 수 있다. 그렇게 느낌의 세계 안에서 우리는 만난다. 서로 사랑하는 이들만이 느낌의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다. 그러니까 사랑은 능력이다. 김행숙의 시를 읽으면서 알게 되었다. 이 시집의 제목은 '이별의 능력'이지만 '사랑의 능력'이었다 해도 좋았을 것이다.

 

이 시인은 '사랑'이라는 말을 극히 아끼는 편이지만 그것은 '사랑'이라는 말에 자주 실망했기 때문이지 사랑을 부정해서가 아닐 것이다. 이 시인에게는 사랑의 능력이 있다. 어떤 특정한 느낌의 세계에 입장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그 느낌의 세계로 독자를 초대할 수 있는 능력은 어여쁘다. 예컨대 그녀가 "나랑 함께 없어져볼래? /음악처럼" <미완성 교향악>, (사춘기) 이라고 말할 때 이것은 매우 특별한 느낌의 세계에서 날아오는 매혹적인 초대장이다. 사랑이 발생하는 순간이 이와 다르지 않다. 초대를 수락하는 순간, 시인과 독자는 같은 세계에 거주하게 된다. 반면 그 느낌의 세계에 입장하지 않는 사람에게 그녀의 시는 열리지 않는다. "당신은 그녀의 시를 좋아하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친구가 될 수 있다." 이런 것이 김행숙의 시다.

 

이곳에서 발이 녹는다

무릎이 없어지고, 나는 이곳에서 영원히 일어나고 싶지

않다

 

괜찮아요, 작은 목소리는 더 작은 목소리가 되어

우리는 함께 희미해진다

 

고마워요, 그 둥근 입술과 함께

작별인사를 위해 무의를 만들었던 몇 가지의 손짓과

안녕, 하고 말하는 순간부터 투명해지는 한쪽 귀와

 

수평선처럼 누워 있는 세계에서

검은 돌고래가 솟구쳐오를 때

무릎은 반짝일 때

우리는 양팔을 벌리고 한없이 다가간다

 

-<다정함의 세계> 전문

 

2부 첫머리에 놓여 있는 시다. 제목 그대로 이 시는 '다정함'이라는 느낌의 세계로 우리를 초대한다. '나'는 다정한 사람들의 다정한 모임에 와 있다. 이 자리를 떠나고 싶지 않다. 그래서 '발이 녹고 무릎이 없어지는' 것 같다. 먼저 일어나서 미안해요, 라고 말했을 것이다. "괜찮아요." 이 "작은 목소리"의 응대는 다정하다. 그 다정함 속에서 "우리는 함께 희미해진다." 그래서 "고마워요"라고 '나'는 대답했을 것이다. "둥근 입술," "몇 가지의 손짓," "투명해지는 한쪽 귀"가 이 세계의 기호들이다. 그리고 결심했다는 듯 일어서야만 하는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수평선처럼 누워 있는 세계에서/ 검은 돌고래가 솟구쳐 오를 때"처럼 말이다. "없어진 무릎'이 다시 반짝이고, 두 사람은 "양팔을 벌리고 한없이 다가간다." '한없이'라고 써야만 할 것 같은 시간, 아쉬운 작별의 포옹을 향해 가는 그 시간은 정말이지 그랬을 것이다. [중략]

 

실로 위의 시를 만들고 있는 것은 '객관적인 환상'들이다. 말로 표현하기 어렵지만 현실적으로 엄연히 존재하는 어떤 느낌이어서 그것은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행동들을 '재현'하겠다는 강박의 산물이 아니기 때문에 환상적이다. "다정한 몸짓은 이렇게 말한다 ; 네 육체를 잠들게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지 청하렴."

<사랑의 단상> 롤랑 바르트의 이 '번역'도 아름답다. [중략]

 

 

 

             

 

               시뮬라크르의 세계

 

 

가장 깊은 것은 피부다.

-폴 발레리 

 

 

이데아의 전제를 전복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한 편의 시가 다루는 세계는 무릇 어떤 본원적인 진리의 흔적을 포함해야 한다는 강박을 떨쳐버리는 일이다. 플라톤은 만상을 두 종류로 나누고, 각각을 이지적인 것 the inteligible과 감각적인 것 the sensible이라고 명명했다. 그렇다면 이데아의 전제를 전복한다는 것은 감각적인 것들의 세계를 충실히 다룬다는 뜻일까? 그것은 소박한 이야기다. 도대체가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이 그렇게 상쾌하게 이분될 리 없는 것이다. 이지적인 것과 감각적인 것은 늘 섞여들게 마련이다. 시가 또한 그러하다. 이지적인 것들은 노래할 때에도 감각적인 것들을 동원하여 실감을 도모하고, 감각적인 것들은 이지적인 것들의 협력으로 나름의 질서를 얻는다. 

 

어떤 이는 우리가 플라톤의 이원론이라 알고 있는 것 이면에는 더 심오하고 비밀스러운 이원론이 있다고 말한다(질 들뢰즈 '의미의 논리' 1장). 그에 따르면 플라톤에게서 '감각적인 것'들은 다시 두 그룹으로 나눠져서 또 다른 이원론을 구성한다. 이데아의 작용을 받아들이는 것과 피해가는 것. 앞의 것은 이데아의 짝퉁copy이고 뒤의 것은 계통 없는 헛것들simulacre이다. 그렇다면 시란 무엇인가? 시는 본래 이데아의 카피(의 카피)이지만 이데아를 향해 깃발을 흔드는 조난자다. 계통 없는 헛것이기를 긍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데아의 전제를 전복하지 못한다. 그러나 카피의 지위조차 포기하고 한낱 시뮬라크르가 되려 하는 시들이 있다. 한없이 사소해지기를 원하는 시, 정말이지 순수한 헛것들에게만 헌신하는 시가 있다. "플라톤주의의 타파는 다음을 의미한다. 시뮬라크르들을 기어 오르게 하라." 이런 시들은 플라톤의 이원론을 무구하게 비껴간다.

 

착한 개 한 마리처럼

나는 네 개의 발을 가진다

 

흰 돌 다음에 언제나 검은 돌을 놓는 사람

검은 돌 다음에 흰 돌을 놓는 사람

그들의 고독한 손가락

 

나는 네 개의 발을 모두 들고 싶다, 헬리콥터처럼

공중에

 

그들이 눈빛 없이 서로에게 목례하고

서서히 일어선다

 

마침내 한 사람과 그리고 한 사람

 

-<착한 개> 전문

 

3부 첫머리에 놓여 있는 시다. 어떤 근원적인 진리의 흔적을 '감각적'으로 재현해 이데아를 향해 '이지적으로' 손을 뻗는 시가 아니다. 바둑을 두는 두 사람이 있고 그들을 지켜보는 '나'가 있다. 그런데 '나'는 그 순간 왜 "착한 개 한 마리"가 되는가. 이 난감한 사태의 뒷면에는 '바둑' 과 '바둑이(개)'의 연상 작용이 숨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다. 바둑판에 흰 돌과 검은 돌을 차례로 놓아가는 일이 '나'에게는 이를테면 고독해 보인다는 것, 그것이 '하강'의 느낌을 산출한다는 것이다, 그 광경을 바라보는 '나'는 그 순간 문득 "헬리콥터처럼/ 공중에" 뜨고 싶다는 느낌을 받았다는 것, 말하자면 '상승'에의 욕망에 사로잡혔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 하강과 상승의 상호 충돌로 빚어지는 묘한 느낌의 전달, 그것이 이 시의 겸허한 목표다. 근원적인 진리에 대한 여하한 욕망도 이 시에는 없다.

 

이런 시들은 우리에게 '깊이'가 없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이와 같은 시적 공간들은 근원적인 진리를 소실점으로 삼아 원근법적으로 구축된 공간, 즉 물리적인 의미에서의 '깊이'를 갖고 있는 공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시들은 평평하다. 근원(아래)도 배후(뒤)도 초월(위)도 없다. 개와 바둑은 그 무엇의 '상징'이 아니며, '착한'과 '고독한'이라는 형용사는 실전적인 뉘앙스를 거느리지 않는다. 어떤 시공간과 그와 결부되어 있는 특정한 느낌이 있을 뿐이고 그것은 온전히 시뮬라크르다. 시뮬라크르로서의 대상을 포착하는 섬세한 감각, 혹은 대상을 시뮬라크르화하는 방법론적 가벼움이 그녀의 시를 특별하게 만든다. 근원을 탐사하지 않고 배후를 캐지 않으며 초월을 도모하지 않는 시는 어디를 보는가. 이렇게 '옆'을 본다.

 

어느 날 아침 내가 침대에서 본 남자는 죽어 있었다. 더

이상 회사에 출근하지 않아도 되니, 그림자가 사라질 때까

지 실컷 자고 오후엔 우리 소풍을 가요, 나는 남자 옆에서

그림자가 사라질 때까지 잤다.

 

해변은 휘어져 있었다. 그런 옆에 대하여, 노을에 대하

여, 화염에 대하여,

 

그네에 대하여, 손을 흔들며 뛰어갔다.

 

-<옆에 대하여 1>전문

 

 

 

이제 말 울음소리는 뚝 그치고, 양호실에 가서 좀 누워

있으렴. 커튼을 치고, 갈기와 바람에 대해 떠들렴. 나도 언

젠가 그런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애.

 

옆에 어떤 아이가 누워 있을까요? 왜 모두들 내게 잠을

권할까요? 내 무릎에 알코올을 발라준 여자도 그랬어요. 그

녀는 날아갈 것처럼 청결해요. 그리고 나는 앞발을 들고 서

있었어요.

 

양호실은 쓰러지기 위해 오는 곳이야. 저 아이처럼.

 

-<옆에 대하여 2> 부분

 

 

옆을 소재로 한 네 편의 연작시 중 두 편이다. 잠에서 깨어 눈을 뜨고 옆을 본다. 한 남자가 죽어 있다. '나'는 하릴없이 계속 잔다. 그때 '옆'이라는 공간은 실로 특별한 의미를 머금게 될 것이다. 이 세상의 무수한 '옆'들 중에서 그 특별한 하나의 옆, 이 시는 바로 "그런 옆에 대하여"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 더불어 "더 이상 회사에 출근하지 않아도 되니, 그림자가 사라질 때까지 실컷 자고 오후에 우리 소풍을 가요" 라는 경쾌한 문장은 이미 죽은 자에게 건네지는 말이기 때문에 미묘한 애틋함과 긴장감을 동시에 연출한다. 한편 두번째 시는 한결 더 친근하다. 누구나 경험한 바 있거니와 양호실에 누워 있을 때 '옆'이라는 공간은 새삼 특별한 뉘앙스를 품게 된다. "옆에 어떤 아이가 누워 있을까요?" 이런 질문을 던지는 화자의 몸을 삐금 스쳐가고 있을 법한 미묘한 호기심과 긴장감, 바로 그런 느낌의 '옆'을 이 시는 복원한다.

 

이 시들이 가까스로 포착하고 있는 '옆'의 위와 아래와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 얼핏 어딘가 비어 있는 듯하지만 그 자체로 완전한 시라고 생각한다. 투명한 순간들, 그 순간들에 충실한 감각의 반응, 그 감각에 대한 무구한 긍정으로 이 시들은 팽팽하다. 여기에는 그 무슨 콤플렉스도 없고 알리바이도 없다. 온갖 시적 곡예가 시를 낯설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투명하고 충실하고 무구한 시, 그러니까 세계라는 사건의 공간을 위와 아래와 뒤의 도움 없이 '있는 그대로' 감각하는 시라서 역설적이게도 이렇게 낯선 것이다. "예술은 있었던 경험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경험을 창조하는 것" (들뢰즈)이라는 언명에 이렇게 충실히 부합하는 시인도 달리 없을 것이다. [하략]  

 

김행숙 시집<이별의 능력> (2007, 문학과 지성사) 해설 부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