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가 강정이다, 여기를 걸어라!
평화란 무엇일까? 평화에 대한 어떤 학설도 아는 바가 없지만, 걷는 내내 스스로 자문을 했다. 우리가 걷는 구간은 수도권의 외곽이었는데 끊이지 않는 소음도 이 자문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길을 가는 사람들이 우리가 들고 가는 펼침막을 바라보았지만 그 눈빛에서 답을 찾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제자 염유가 공자의 도를 실천하지 못하는 자신의 타락을 변명하면서 토로했다는 역부족이라는 말이 서늘하게 심장을 스쳤다. 작가들이 평화와 생명에 대한 전문가의 식견과 소양을 접하지 못해서 이 겨울을 나선 것은 아니다. 우리로서는 도리어 그 식견과 소양이 세상의 영혼을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는 어떤 불분명한 직관이 있었다. 걸음은 인도의 숱한 장애물과 신호등 앞에서 움찔거렸다.
그렇게 가다 서다를 반복하면서 나를 관통하는 번갯불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속도에 관한 엉켜있는 상념이었다. 그것은 찻소리가 나지 않는 순간과 동시에 찾아왔다. 우리의 걸음을 움찔거리게 하는 것과 끊이지 않는 소음이 사실은 같은 것이었다는 것! 지금 구럼비 바위를 깨고 강정 마을 주민들을 삶의 터전에서 내몰겠다는 국가 권력이 바로 우리의 걸음을 괴롭히는 것과 동일한 바탕에 서 있다는 것! 삶의 속도를 문명과 제도와 국가의 속도로 개종시키겠다는 협잡이 우리를 이 겨울에 길을 나서게 했다는 것! 길가에 서 있는 은행나무와 잎이 진 철쭉과 꽈리나무와 단풍나무와 떡갈나무와 시누대가 가진 제 삶의 속도를 만나기 위해 우리는 길을 나섰다는 것!
생명의 속도를 문명과 폭력의 속도로 억압하는 순간 거대한 소음은 찾아온다. 도로를 가득 메운 소음의 정체는 질주하는 문명의 속도가 내는 마찰음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의 걸음이 제 속도를 가지지 못하고 자꾸 멈추어야 하는 원인도 바로 이 문명이 삶을 절단시켜 놔서 발생한 것임을 비로소 길을 나서서 알게 되었다. 결국 평화란, 생명이 갖는 제 속도가 이렇게 저렇게 엉켜 있는 것을 말함인가. 구럼비 바위가 결정체란 우리의 인식도 가소로울 뿐이다. 우주의 시간에서 보자면 지금 구럼비 바위도 흐르고 있을 뿐이다. 그걸 우리의 시간관념으로 재단하려니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강정 마을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와 관련지어 말하면, 해군 기지가 설령 평화를 보유할 능력이 있다손 치더라도 바다처럼 흐르는 시간의 차원에서 보자면 한낱 임시 가설물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의왕과 수원의 경계에서 우리에게 약간의 자연이 허락되었다. 자동차들도 조금 뜸해졌지만 그러나 인간의 길은 이미 갈가리 찢겨져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지도에 그려진 길을 다시 확인하는 동시에 새로운 길을 상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평화가 생명의 속도들이 엉켜 있는 아름다운 난장이듯이 우리가 ‘타는 목마름으로’ 찾는 길의 난장이 절실해진 것이다. 이 절실함은 휴식과 웃음, 그리고 잔치를 필요로 한다. 강정마을 사람들과 바다가 해군의 폭력 앞에서 몸부림치며 노래를 부르듯이. 경이롭지 않은가? 생명의 바탕에서는 서로가 서로와 닮아있으며 서로가 서로를 비춰준다는 사실이. 우리는 준비한 차를 나눠 마시며 모락모락 올라오는 김처럼 웃었다. 우리가 살아 있고 강정마을이 살아 있으며 한진중공업 김진숙이 살아 있으니, 아, 숱한 생명들이 살아 있어서 아픔을 공유하고 있어서 우리는 웃었다. 저들은 우리가 웃는 이유를 절대 알 수가 없을 것이다. 그저 딱딱하게 굳은 정보과 형사의 표정으로 우리를 대할 뿐이다. 웃어라, 국가여! 우리는, 강정마을은 국가와 자본가와 이제는 대로가 되어 버린 1번 국도를 웃게 할 것이다.
이 일은 강정마을에서 잠시 떠나 세상에 대해 푸념을 늘어놓으며 우리의 속도를 되찾고 나서 시작되었다. 김진숙이 살아오고, 그러나 재능학습지 교사 노동자들의 겨울바람 같은 절박함을 목도하며 시작되었다. 왜 걷는데? 이렇게 묻는 사람들 앞에서 걷기 전에는 명쾌한 답을 주지 못했다. 언론사에 보낸 보도자료를 보여줄까? 그러나 다시 한 번 더 물어봐 줄래? 왜 걷느냐고. 나는 침묵으로 답할 것이다. 평화는 침묵을 통해서 발견되고 침묵은 생명의 언어이니까. 평화와 생명은 우리가 가야할 길에서 우리의 영혼이 될 테니까. 강정마을에는 해군기지가 절대 들어서지 못할 테니까. 제주도의 웃음은 이 세계의 웃음이 될 테니까. 저 기름진 자본가의 얼굴에도 인간의 웃음이 번지게 될 테니까. 파렴치한 권력자도 음모와 정략 대신 마음이 헤 벌어지는 웃음을 참을 수 없게 될 테니까. 그래서 우리는 걷는다.
여름에 구럼비 바위에서 보았다. 수평선 너머를 별뜻없이 바라보며, 우리는 바로 이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공자가 말했다. 니기미, 이것도 저것도 안 되는구나. 자로야! 이 강을 따라 뗏목을 타고 저 바다로 나가버릴까? 단순한 자로는 기뻤다. 그러나 자로야! 뗏목을 만들 재료를 구할 수가 없구나. 바다 너머에도 이상향은 없다. 거기 또한 생명의 침묵만 넘실거리고 있을 뿐이다. 생명의 침묵은 그러나 온순하지 않다. 문명과 국가는 그것이 두렵다. 그래서 그것을 제압할 게 필요했다. 폭력은 이렇게 탄생했다. 하지만 생명을 느끼는 삶은 그것이 제압할 게 아니라 맞아들여야 할 것임을 안다. 그래서 걷는다. 자로야! 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라. 의미는 묻지 마라. 우리는 역사를 위해 걷는 게 아니라 평화와 생명을 새기려 걸을 뿐이다. 혹 걷는 게 역사가 될지 어떨지는 알 바 아니지만.
출처- 한국작가회의, 저항의 글쓰기.
'좋은 문장'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피노자의 명언 (0) | 2012.01.31 |
---|---|
말의 어미가 된다는 것 (0) | 2012.01.23 |
헤테로토피아 - 세 개의 그물망 (0) | 2012.01.06 |
시인에게 듣다 (0) | 2012.01.06 |
禪詩와 함께 읽는 莊子 (0) | 2011.12.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