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어미가 된다는 것
세상에는 여전히 값을 매길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값을 매길 수 없는 수평선이 있고 노을이 있으며 고독이 있습니다. 값을 논할 수 없는 은하수와 이슬이 있는가 하면 적막이 있고 소음이 있습니다. 눈 위의 발자국, 해질녘 들길의 긴 그림자, 그리고 영원히 발표되지 않는 시 한 편, 거기에 누가 값을 매길 수 있겠습니까. 시는 저녁 어스름처럼 아무런 값이 없습니다. 그래서 시는 천둥번개나 눈사람의 웃음처럼 아무 쓸모 없이도 존재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시인은 말의 어미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비추어보면서도 아무 부끄러움이 없는 말의 어미가 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인 듯합니다. 왜냐하면 말의 어미로서의 시인이라면 시를 낳기 위해 끝없이 무화(無化)시키고 텅 비워야 할 뿐만 아니라 궁극에는 시에 내걸었던 이름마저 잊어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순진하게도 나의 것이라고 믿었던 시는 언젠가 나를 떠날 것입니다. 시를 발표하는 그때가 바로 시가 길을 떠나는 때인지도 모릅니다. 그후에 시는 인연이 닿는 독자를 만나게 되겠지요. 어쩌면 시를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 있는 자는 독자가 아니겠습니까. 결국에는 시에 버림받는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시인이 작품을 낳으려고 애쓸 때, 그것이 한 오백 년 전쯤의 일이라 해도, 어떤 독자는 그 시를 지금 자신의 것으로 음미하고 있을 겁니다. [중략]
시를 썼던 시간에 저는 무능하나마 말의 어미였고, 흰 종이를 더럽힌 것처럼 많은 파지를 냈지만 제 삶을 언어에 집중시키는 텅 빈 백지 앞의 한 주체였습니다. 고요 속에서 무슨 내밀한 사건을 혼자 저지르는 것처럼 주로 밤에 펜을 움직였던 저에게도 수상의 기쁨은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기쁨은 그동안 시를 도운 여러 인연들에게 두루 나눠줘야 마땅한 기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저는 시를 도운 펜에게, 종이를 위해 기꺼이 몸을 내준 나무들에게, 그리고 잉크에게 이 기쁨을 전합니다. 아무리 써도 평생 다 쓰지 못할 충분한 물감처럼 수많은 언어들을 물려준 옛사람들에게, 그리고 표현의 긴장 속으로 나를 이끌면서 영향을 주었던 시인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제47회 현대문학상 수상소감 - 최승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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