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입의 즐거움/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참다운 삶을 바라는 사람은 주저 말고 나서라.
싫으면 그뿐이지만, 그럼 묘자리나 보러 다니든가.
-오든
오든의 시는 이 책의 핵심을 정확히 짚어내고 있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많지 않다. 지금 이 순간과, 언젠가 불가피하게 맞이할 임종의 순간 사이에서, 살아가는 길을 택하든가 죽어가는 길을 택하든가 둘 중의 하나일 뿐이다. 몸에 필요한 영양소가 제대로 공급되는 한 삶은 끊어지지 않지만, 여기서 오든이 말하는 삶은 노력 없이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런 삶을 방해하는 힘은 사방에 널려 있다. 자칫 마음을 놓았다가는 거기에 놀아나기 십상이다. 생물은 몸에 박힌 유전 물질을 본능적으로 어떻게 해서든 퍼뜨리려고 애쓴다. 문화는 인간이라는 생명체를 통해 자신의 가치관과 제도를 널리 전파하려고 한다. 타인들은 자꾸 나를 누르고 주도권을 쥐려고 한다. 나야 어떻게 되건 말건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누군가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버려야 한다. 삶의 길은 스스로 발견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삶'이란 무엇일까? 분명히 한낱 생물체로서의 생존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아까운 시간과 재능을 허비하지 않고 나만의 개성을 한껏 발휘하면서 복잡다단한 이 세상과 살을 맞대고 살아가는 충만한 생활을 뜻하는 말이리라. 나는 이 책에서 현대 심리학이 알아낸 성과와 내가 연구한 내용에 바탕을 두면서도, 선인들이 후세에 남긴 뜻 깊은 지혜를 고루 동원하여 바람직한 삶의 길을 찾아나설 작정이다.
"바람직한 삶은 어떤 것인가?" 나는 다시 한 번 겸허하게 묻고 싶다. 그러나 예언자나 신비주의자처럼 말할 생각은 없다.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우리가 맞닥뜨리는 평범한 사건들, 즉 일상 생활에 초점을 맞추면서 구체적으로 피부에 와닿는 예를 들기 위해 애쓰고 싶다.
바람직한 삶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면 구체적인 데서 출발하는 게 좋을 듯하다. 여러 해 전에 나는 학생들을 데리고 기관차 공장을 견학했다. 격납고처럼 거대한 중앙 공장은 어찌나 먼지가 많고 시끄럽던지 고래고래 악을 써야 겨우 말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그곳에서 일하는 용접공들의 대다수는 자기가 하는 일에 애정이 없었고 시계만 보면서 빨리 퇴근 시간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일단 공장 문을 나서면 근처 술집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좀더 적극적인 행동파들은 아예 자동차를 몰고 드라이브에 나섰다.
그런데 안 그런 사람이 한 명 있었다. 그는 조라는 이름의 60대 초반 남자였는데, 크레인이면 크레인, 컴퓨터 모니터면 모니터, 그 공장 안에 있는 기계 설비의 구조를 모조리 독학으로 꿰뚫은 사람이었다. 그는 못 고치는 기계가 없었다. 고장난 기계를 붙들고 말썽의 원인을 밝혀내어 기어이 수리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집에서도 가만히 있는 법이 없었다. 집 부근에 있는 자투리땅에다 부인과 함께 멋진 분수를 만들었다. 분수에서 뿜어나오는 뽀얀 물보라는 밤마다 장관을 연출했다. 같은 공장에서 일하는 용접공들은 희한한 양반이라고 혀를 차면서도 모두들 조를 존경했다. 문제가 생기면 누구나 조에게 먼저 달려갔다. 직원들은 그가 없으면 공장 문을 닫아야 할 판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나는 그동안 대기업 총수, 유력 정치인, 노벨상 수상자처럼 자기 분야에서 한가락한다는 인물을 수없이 만났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은 적다. 무엇이 평범한 한 사람의 인생을 이토록 값지게 만드는 것일까? 나는 그 답을 알아내고 싶었다. 이 책에는 중요한 전제가 세 가지 깔려 있다. 첫째, 중요한 진리는 이미 오래 전에 뛰어난 예언자, 시인, 철학자가 말했고 그것은 지금도 우리네 인생의 지침으로서 요긴하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선각자들이 깨달은 진리는 옛날 식으로 표현되었으므로 후대의 시각으로 그 안에 깃든 의미를 늘 재음미하고 재해석해야 생명력이 사라지지 않는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불교, 힌두교의 성전에는 선인들이 중요하게 여겼던 사유의 결실이 풍부하게 담겨 있으므로, 이를 무시하는 것은 어리석기 그지없는 일이다. 그러나 과거의 글은 절대 불변의 영원한 진리를 담고 있다고 맹신하는 자세에도 문제는 있다.
이 책에 깔린 또 하나의 전제는 지금 인류에게 가장 중요한 정보가 주로 과학에서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과학에서 통용되는 진리는 어차피 당대의 세계관이 반영된 언어로 표현되기 마련이어서 세월이 흐르면 그 뜻이 달라지고 결국은 폐기되는 일도 적지 않다. 고대의 신화처럼 현대의 과학에도 숱한 오해와 미신이 스며들어 있지만, 그것을 간파하기에는 우리는 현대의 과학과 너무 가까운 거리에 있다. 우리를 진리의 세계로 인도하는 건 복잡한 이론이나 실험이 아니라 초능력이나 심령술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름길은 위험하다. 우리가 도달한 지식의 높이를 과장한 나머지 착각에 빠져서는 곤란하다. 좋은 싫든 간에 현재로서는 과학이 현실을 담아내는 가장 신뢰할 만한 거울이다. 과학을 무시하려는 발상은 위험천만하다.
마지막 전제는 '삶'의 뜻을 진정으로 이해하려면 선인들의 지혜에 귀기울이는 한편 그 지혜를 과학이 꾸준히 축적해 온 앎과 접맥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루소의 부르짖음은 훗날 프로이트가 주장하는 내용과 일맥상통하지만, 이런 구호는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 없이는 공염불에 불과하다. 희망은 과거에서 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현재에서 솟아오르는 것도 아니다. 또 가상의 미래로 뛰어본들 우리의 처지는 달라지지 않는다. 과거의 사실과 미래의 가능성을 현재의 시점에서 이해하려고 꾸준히 노력할 때 비로소 우리는 삶의 길을 깨달을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 말하는 '삶'은 아침부터 밤까지,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운이 좋으면 칠십 년, 아주 행운아라면 그보다 더 긴 세월 동안 우리가 경험하는 모두를 뜻한다. 우리에게 낯익은 신화와 종교의 장대한 구도와 비교할 때 이것은 옹색한 발상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파스칼의 유명한 잠언대로, 의심스러울 때,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전략은 칠십 평생이 우리가 우주를 경험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기회라고 가정하고, 그 시간을 최대한으로 활용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지 않고 허송세월만 할 경우 우리는 모든 것을 잃게 된다. 반대로 우리의 예상이 빗나가 죽음 너머에 또다른 삶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로서는 전혀 잃을 것이 없다.
모름지기 삶이란 우리 몸 안에서 벌어지는 화학 작용, 신체 기관 사이의 상호 작용, 뇌의 신경세포 사이를 오가는 미세한 전류, 문화가 우리의 정신에 부과하는 정보 체계에 의해 주로 규정된다. 그러나 삶의 구체적 질감, 즉 우리가 어떤 일을 하고 그 일에 대하여 어떤 느낌을 갖게 되느냐는 우리의 생각과 감정에 따라서, 화학적, 생물학적, 사회적 과정을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따라서 크게 달라진다. 철학의 한 갈래인 현상학은 마음을 가로지르는 의식의 흐름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삶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 그리고 이것보다 한층 절박하게 다가오는 질문, 다시 말해서 어떻게 하면 한 사람 한 사람이 훌륭한 삶을 살 수 있을까 하는 의문에 답하기 위하여, 나는 지난 삼십 년 동안 주로 심리학, 사회학 같은 사회과학을 수단으로 삼아 체계적 현상학을 발전시키는 데 아낌없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데 이런 물음에 답하기 전에 선결되어야 하는 과제는 우리의 경험에 틀을 부여하는 힘이 과연 무엇인지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모두 일정한 한계 안에서만 행동하고 느낄 수 있다. 이 한계선을 무시하는 사람은 결국 좌초하고 만다. 남부끄럽지 않은 삶을 이루어가기 위해서는 아무리 부담스럽고 암울해 보일지라도 먼저 일상의 현실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고대 신화를 보라. 행복, 사랑, 영생의 길을 갈망하는 사람은 먼저 저승 세계를 여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단테는 지옥의 소름 끼치는 세계를 구석구석 거치면서 인간이 천당의 문으로 왜 못 들어가는지를 절절히 깨달은 연후에야 비로소 천국의 휘황찬란한 세계를 누릴 수 있었다. 우리가 지금부터 다루려는 세속적인 물음에도 같은 이치가 적용된다.
아프리카 평원에서 사는 개코원숭이는 일생의 삼 분의 일을 잠자는 데 쏟아붓는다. 깨어 있는 시간은 돌아다니기, 먹이를 구하고 먹기, 자유롭게 놀기로 삼등분된다. 놀이라고 해야 장난을 치거나 털을 고르거나 서로 이를 잡아주면서 시간을 때우는 것이다. 우리가 보기엔 참으로 무미건조한 생활이지만 인간이 공통의 유인원 조상으로부터 진화해 온 수백만 년 동안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우리가 삶을 꾸려가는 데 필요한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시간을 투자하는 방식도 아프리카의 개코원숭이와 별로 다르지 않다. 사람에 따라서는 두어 시간 정도의 차이야 있겠지만, 우리는 하루의 삼 분의 일을 잠자는 데 쓰고 개코원숭이처럼 나머지 시간을 쪼개서 일하고 돌아다니고 쉰다. 역사가 르 로이 라뒤리의 보고에 따르면 13세기에 당시로선 가장 앞선 축에 들어갔다는 프랑스 마을에서도 가장 흔한 소일거리는 마을 사람들이 한데 모여 앉아 서로의 머리카락에서 이를 잡
아주는 일이었다. 지금의 우리에게는 물론 텔레비전이 있지만 말이다.
휴식, 생산, 소비, 교제의 순환처럼 우리네 삶의 경험 세계를 이루는 또 하나의 영역이 있다. 그것은 보기, 듣기 같은 감각의 장이다. 사람의 신경계는 한 순간에 아주 적은 양의 정보만을 처리할 수 있으므로 우리는 외부의 사건을 하나씩 순차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부자도 바지를 벗을 때는 한 다리씩 빼는 법"이라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우리는 한 번에 한 입을 베어먹고, 한 번에 한 노래를 듣고, 한 번에 한 신문을 읽고, 한 번에 한 사람하고만 대화를 나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을 접할 때 쏟아부을 수 있는 정력의 포화점, 곧 주의 집중의 절대적 상한선 안에서만 우리의 인생은 전개된다. 시대가 다르고 문화가 달라도 사람들이 시간을 어디에 얼마나 쓰는지는 놀라우리만큼 비슷하다.
앞에서 모든 삶은 몇 가지 중요한 점에서 비슷하다고 말했지만 명백한 차이점이 있다는 사실 또한 간과할 수 없다. 뉴욕의 주식중개인, 중국의 농부, 아프리카 칼라하리 사막의 원주민이 살아가는 방식은 언뜻 보면 공통점이 전혀 없는 듯하다. 역사가 나탈리 즈몽 다비와 아를렌트 파주는 16세기에서 18세기 사이의 유럽사를 서술하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하루하루의 생활이 영속적인 성적, 사회적 위계 질서의 틀 안에서 전개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사회 집단에도 이 말은 들어맞는다.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는가는 대체로 성, 연령, 신분에 좌우된다.
우연한 출생으로 사람은 일평생 겪을 수 있는 경험이 제각각 다른 구멍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지금으로부터 이백 년 전, 영국의 공장 지대에 있는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예닐곱 살 먹은 소년은 아침 다섯시면 일어나 공장으로 달려가서 해질녘까지 일주일에 꼬박 엿새를 철커덕거리는 직조기 앞에 붙어 있어야 할 확률이 높았다. 그런 아이는 사춘기로 접어들기도 전에 과로로 사망하는 일이 많았다. 비슷한 시기에 프랑스의 견직공장 지대에서 살던 열두 살바기 소녀는 온종일 커다란 물통을 앞에 두고 실을 엉기게 하는 끈적끈적한 물질을 녹이기 위하여 뜨거운 물에다 누에고치를 담는 중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꼭두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물에 흥건히 젖은 옷을 입고 지내다 보면 호흡기 질환에 걸리기 일쑤였고, 손가락 끝을 하도 뜨거운 물에 넣었다 뺐다 하는 바람에 나중에는 감각을 잃어버리기 십상이었다. 그 시각에 귀족 자녀는 무도회에서 사교춤을 배우고 외국어를 공부했다.
인생에서 부여받은 기회의 차이는 아직도 엄연히 존재한다. 미국의 대도시 빈민가에서 태어난 아이가 평생 살아가면서 과연 어떤 경험을 하리라고 기대할 수 있을까? 미국 교외의 넉넉한 가정이나 스웨덴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가 기대할 수 있는 삶의 질과 빈민가에서 태어난 아이가 기대할 수 있는 삶의 질은 얼마나 다를까? 불행하게도 인생은 공평하지 않다. 어떤 사람은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가정에서 설상가상으로 선천성 장애를 안고 태어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어마어마한 재산을 가진 집에서 준수한 외모에 건강한 신체를 가지고 태어난다.
엇비슷한 제한 요소들이 만인의 삶을 규정하는 것도 사실이고, 누구나 쉬고 먹고 어울리며 최소한의 노동을 해야 한다는 공통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경험의 내용을 판이하게 만드는 사회적 범주로 인간이 구분된다는 것도 부인 못할 사실이다. 문제가 더욱 복잡해지는 것은 사람마다 개성이 있기 때문이다. 겨울에 창 밖을 바라보면 흩날리는 눈송이가 모두 똑같아 보인다. 하지만 돋보기로 하나하나 자세히 뜯어보면 눈송이가 저마다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다. 하나의 눈송이는 어떤 눈송이와도 모양이 같지 않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한 사람이 인간이라는 사실만으로도 그가 어떤 경험을 하게 될 지 대충은 예상할 수 있다. 만일 그가 미국 어느 지역의 어떤 부모 밑에서 태어났는지 알면 우리가 그 사람에 대해서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은 더 많아진다. 하지만 모든 정보를 알고 있고 모든 외적 변수를 파악했다 하더라도 한 개인의 삶이 어떻게 흘러갈지 정확히 예측하기는 어렵다. 우연히 터진 사건이 한 사람의 진로를 엉뚱한 방향으로 바꾸어놓는 경우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은 모처럼 굴러 들어온 복을 걷어차는 결정을 내릴 수도 있고 반대로 불우한 환경을 극복할 수도 있는데, 바로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마음이고 그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다는 사실이다.
이 책에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인간의 의식에 유연성이 있기 때문이다. 만사가 인간 공통의 조건, 사회적, 문화적 범주라든가 우연성에 의해 결정된다면 삶을 개선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를 성찰한다는 것은 부질없는 노릇이리라. 다행히도 개인이 주도적으로 선택하여 현실을 바꾸어놓을 수 있는 여지는 얼마든지 있다. 운명의 굴레를 박차고 나설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람은 바로 이런 믿음을 가진 이들이다.
삶은 행동하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 다시 말해서 경험이다. 그런데 경험은 시간 속에서 이루어지므로 시간은 아주 귀중한 자산이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 삶의 질을 결정하는 것은 경험의 내용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시간을 어떻게 할당하고 투자할 것인가를 지혜롭게 결정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중요하다. 물론 시간 투자는 우리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우리는 인류의 일원이다. 다시 말해서 특정한 문화나 사회의 성원이기에 반드시 따르지 않으면 안 될 엄격한 제약 조건이 있다. 그러나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공간은 어느 정도 열려 있고 그 속에서 시간을 분배할 수 있다. 역사가 E. P. 톰슨이 지적한 대로, 산업혁명의 폭압성이 극에 달하여 노동자들이 일주일에 여든 시간을 광산이나 공장에서 노예처럼 죽도록 일해야 했던 시대에도, 어떤 노동자들은 동료들처럼 선술집으로 몰려가지 않고 금싸라기 같은 휴식 시간을 문학 작품을 읽거나 정치 활동을 하는 데 썼다.
우리가 시간을 묘사할 때 쓰는 예산, 투자, 할당, 지출 같은 용어는 재무 분야에서 빌려온 것이다. 혹자는 그래서 시간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는 편협한 자본주의의 색채가 짙게 배어 있다고 주장한다. "시간은 돈"이라고 즐겨 말한 사람이 자본주의의 위대한 변호가였던 벤저민 프랭클린이긴 하지만, 돈과 시간을 같게 보는 관점은 그보다 훨씬 오래되었다. 그것은 자본주의 문화만이 아니라 인류 공동의 경험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래서 돈이 시간의 가치를 낳는 것인 아니라 시간이 돈의 가치를 낳는다는 말이 인구에 회자되지 않는가. 무엇을 하거나 만드는 데 들어가는 시간을 측정하는 잣대 노릇을 하는 것이 바로 돈이다. 우리가 돈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활동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로운 시간을 주어 삶의 제약에서 우리를 어느 정도 해방시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고 있을까? <표 1>은 우리가 눈을 뜨고 깨어 있는 동안 하루 열여섯 시간 안팎의 시간을 어떻게 쓰고 있는지 그 대강의 윤곽을 보여준다. 여기에 인용된 수치는 근사치일 수밖에 없다. 그 사람이 청년인가 노인인가, 남자인가 여자인가, 부자인가 가난한가에 따라 시간을 쓰는 방식이 크게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표에 나오는 숫자는 우리 사회에서 우리 사회에서 평범한 개인이 보내는 하루의 일상을 보여주는 밑그림 역할을 웬만큼은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선진 공업국에서 나온 시간 배분에 대한 통계 수치 역시 <표 1>의 결과와 여러 가지 점에서 아주 유사하다.
하루에 우리가 보통 하는 일은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다. 가장 중요하고 비중이 큰 일은 생존과 안전에 필요한 에너지를 만들기 위하여 하는 활동이다. 오늘날 이것은 '돈벌이'와 거의 같은 의미를 지니는데, 그것은 돈이 웬만한 물건은 모두 구입할 수 있는 교환의 매개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직 학교에 다니는 연령층에게는 공부가 성인의 취업 활동에 해당한다. 공부는 취업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직업의 종류에 따라서 다르고 전일제 근무인가 시간제 근무인가에 따라서 차이는 있지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정력의 사분의 일에서 절반 남짓은 이런 생산 활동에 투입된다. 전일제 근무를 하는 직장인은 보통 일주일에 마흔 시간을 일한다. 이것은 일주일 동안 깨어 있는 112시간 중에서 35퍼센트에 해당하지만, 이 수치는 현실을 정확하게 반영하지는 못한다. 마흔 시간 중에서 직장인이 실제로 일하는 시간은 서른 시간 가량이면 나머지는 담소, 몽상, 그리고 직무와 관계없는 자질구레한 활동에 소모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적다고 보아야 할까 많다고 보아야 할까? 그것은 비교의 대상을 무엇으로 삼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인류학자들의 보고에 따르면, 브라질의 밀림이나 아프리카의 사막에 거주하는 부족처럼 기술적으로 아주 낙후한 사회에서는 생계를 위하여 성인 한 사람이 투자하는 시간이 하루에 불과 네 시간을 넘지 않는다. 남은 시간에는 쉬거나 잡담을 나누고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춘다. 반면에 서구에서 산업화가 진행되던 백 년 동안 아직 노조가 노동 시간을 규제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노동자가 하루 열두 시간 이상 일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따라서 현재의 하루 여덟 시간 노동은 양극단의 중간점이라고 할 수 있다.
생산 활동으로 새로운 에너지를 만들어야 하지만, 육체와 육체의 부속물을 잘 간수하는 데도 우리는 엄청난 시간을 쏟아부어야 한다. 하루의 사 분의 일이라는 시간을 우리는 이런 저런 유지 활동에 투입한다. 식사, 휴식, 세면으로 몸을 돌보고 청소, 요리, 장보기와 각종 집안일로 생활의 여건을 유지한다. 전통적으로 유지 작업의 부담은 여성이 져야 했고 남성은 생산자 역할을 맡았다. 이런 구별 의식은 지금도 미국에 강하게 남아 있다. 식사에 들어가는 시간은 남녀가 엇비슷하지만(약 5퍼센트), 그 밖의 유지 활동에는 여자가 남자보다 두 배 이상의 시간을 투자한다.
가사노동의 남녀 차별은 다른 나라에서는 더 심하다. 남녀 평등을 이념적 구호로 내걸었던 옛 소련에서조차 결혼한 여의사와 여성 엔지니어가 직장에서 일하고 돌아와 집에서 가사노동을 전담하였다. 웬만한 나라에서는 집에서 밥상 차리고 설거지하는 남자를 우습게 보고 남자 자신들도 그걸 부끄럽게 여긴다. 남녀간의 노동 분담은 인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현상인 듯하다. 옛날 여자들은 집안 살림을 꾸리느라 고된 노동에 시달렸다. 한 역사가는 사백 년 전 유럽의 실상을 이렇게 묘사한다.
여자들은 물이 귀한 가파른 산비탈의 다락밭으로 물을 길어 날랐다. 풀을 베어 말리고 장작을 팼으며, 해초를 거두고 길가 잡초를 뜯어 먹였다. 여자들은 소젖과 염소젖을 짜고 채소를 가꾸며, 밤을 줍고 약초를 캤다. 영국과 아일랜드 일부 지역과 네덜란드에서 가장 중요한 난방 연료는 동물의 똥이었다. 여자들은 그것을 손으로 주워다가 말려서 화덕에 넣었다. 기술의 발달로 생산 현장의 노동량이 크게 줄어든 것처럼 상수도 시설과 가전 제품의 보급으로 가사노동의 부담도 현격하게 줄어들었다. 그러나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 다시 말해 전세계의 대부분 지역에서는 아직도 여자들이 가정의 물질적, 정서적 뼈대를 간신히 유지하는 데 가용 시간을 모조리 쏟아붓다시피 한다.
생산과 유지 활동에 들어가고 남은 시간이 자유 시간, 곧 여가 시간인데, 사람들은 여기에 전체 시간의 사 분의 일을 쏟는다. 사람은 아무 할 일이 없을 때 비로소 자신의 잠재력을 깨달을 수 있다고 고대의 사상가들은 주장하였다. 그리스 철학자들에 따르면 학문, 예술, 정치 같은 자기 개발 활동에 시간을 투여할 수 있을 때만 우리는 진정한 인간이 된다. 실제로 학교를 뜻하는 영어 단어 'school'은 여가를 뜻하는 그리스어 'scholea'에서 나온 것이다. 여가를 가장 잘 활용하는 것이 곧 학문하는 길임을 알 수 있다.
불행하게도 이러한 인상은 좀처럼 실현되기 어렵다. 현대 사회에서 개인의 자유 시간은 세 가지 주요 활동에 의해 점령당하고 있는데, 이것들은 그리스 학자들이 염두에 둔 이상과는 하나같이 거리가 멀다. 첫째는 대중 매체다. 대부분은 TV 시청이고 극히 일부가 신문과 잡지 읽기다. 둘째는 담소이며, 셋째는 자유 시간을 능동적으로 활용하는 것이어서 고대인의 이상에 그나마 근접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바로 음악, 운동, 외식, 영화 감상 같은 취미 활동이다. 이 세 가지 주요 여가 활동에 들어가는 시간이 일주일에 적게는 네 시간, 많게는 열두 시간이다.
모든 여가 활동 중에서 사람의 정력을 가장 많이 흡수하는 TV시청은 인류가 경험한 가장 새로운 활동 형태이기도 하다. 인간이 수백만 년 동안 진화하면서 만들어낸 발명품 가운데 TV처럼 중독성이 강하고 흡인력 있는 물건도 없다. 넋을 잃고 허공을 바라보거나 꾸벅꾸벅 졸거나 발리 사람들처럼 무아경에 빠지는 경우를 계산에 넣지 않는다면 말이다. TV라는 매체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TV야말로 온갖 흥미로운 정보를 제공해 준다고 주장한다. 그 말도 옳긴 하지만 시청자를 성숙시키는 프로보다는 자극시키는 프로가 많으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청하는 프로는 자아 개발에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다.
생산, 유지, 여가라는 세 가지 주요 기능이 우리의 정력을 빨아들인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우리의 정신을 휘젓고 돌아다니는 정보도 이런 것들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삶의 성격은 우리가 직업적으로 하는 일에,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이 허물어지지 않도록 애쓰는 노력에, 그리고 남는 시간에 벌이는 활동에 좌우된다고 보아도 무리는 아니다. 삶은 이러한 기본 좌표 안에서 펼쳐지며, 우리가 보낸 하루하루를 모두 더하였을 때 그것이 형체 없는 안개로 사라지느냐 아니면 예술 작품에 버금가는 모습으로 형상화되느냐는 바로 우리가 어떤 일을 선택하고 그 일을 어떤 방식으로 하는가에 달려 있다.
나날의 삶은 우리가 어떤 일을 하느냐뿐 아니라 우리가 어떤 사람과 함께 있느냐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우리의 행위와 감정은 당사자가 그 자리에 있건 없건 언제나 타인의 영향을 받는다. 사람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를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누구나 공감하는 사실이다. 육체적, 심리적으로 우리는 남과 함께 있는 데 길들여져 있다. 개인이 타인에게 영향을 받는 정도와 혼자 있을 때 내면화한 타인의 견해에 영향받는 정도는 문화에 따라 다르다. 가령 전통 힌두교 사회에서는 사람을 뚜렷이 구분되는 개체로서가 아니라 확장된 사회적 연결망의 교점으로서 이해하였다. 한 사람의 정체성은 그 사람만이 가진 생각이나 행위가 아니라 그가 누구의 자식이고 누구의 아내이며, 누구의 사촌이고 누구의 부모인가로 결정되었다. 아시아계 학생은 혼자 있을 때도 부모의 기대나 의견을 의식하는 정도가 백인 학생에 비하여 훨씬 높다. 정신분석학적 용어로 말하자면 아시아계 학생의 초자아가 더 강하다고 할 수 있으리라. 문화가 아무리 개인주의 방향으로 흐른다 하더라도 개인이 누리는 삶의 질은 타인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
사람들은 대체로 세 가지 유형의 사회적 활동 영역에 시간을 엇비슷하게 투입한다. 첫째 영역은 안면이 없는 사람, 동료, 급우로 채워진다. 이 '공적' 영역에서는 한 사람의 행위가 남들의 평가를 받게 되고, 또한 한정된 자원을 놓고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든가 아니면 협조적 공생 관계가 맺어지기도 한다. 한 사람의 잠재력을 개발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 이 공적 행위 영역이라고 사람들은 흔히 강조한다. 위험 부담도 크지만 성장할 수 있는 기회도 많이 주어진다는 뜻이다.
둘째 영역은 가족이다. 아이에게는 부모와 형제이며 어른에게는 배우자와 자식이다. 요즘 들어서는 뚜렷한 사회적 단위로서의 '가족'이라는 개념 자체도 혹독한 비판을 받고 있고 사실 가족의 정의를 시간과 공간을 관통하는 단 하나의 구성 형태로 못박기도 어려운 노릇이지만, 사람에게는 유달리 끈끈한 정을 느끼고 같이 있으면 편안하며 다른 사람들보다도 더 강한 책임감을 느끼게 되는 집단이 있다는 것 또한 부인 못할 사실이다.
셋째는 타인의 부재로 정의할 수 있는 공간, 다시 말하면 고독의 공간이다. 산업기술 사회에서 사람은 하루의 삼 분의 일을 혼자서 보내는데, 이것은 대부분의 부족 사회와 비교하면 아주 높은 비율이다. 부족 사회에서는 고독을 매우 위험스럽게 여긴다. 그 점은 현대인도 마찬가지여서 고독을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받아들인다.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고독에서 벗어나려고 애쓴다. 고독을 향유하는 법을 터득한 사람도 있지만, 그런 재주를 가진 사람은 아주 드물다. 우리는 크고 작은 사회적 책무 때문에 좋든 싫든 혼자 지내야 할 때가 많다. 아이는 혼자서 공부하거나 연습해야 하고, 주부는 혼자서 집안 살림을 꾸려야 한다. 적어도 하루에 몇 시간은 혼자서 일해야 하는 직업도 상당수에 이른다. 그러므로 고독을 향유하는 수준은 못 되더라도 고독을 견디는 법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는 살아가면서 어려움을 겪는다.
이 장과 다음 장에서 나는 사람들이 어떻게 시간을 사용하는지, 혼자서 보내는 시간과 여럿이서 보내는 시간이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자기가 하는 일에 어떤 느낌을 갖는지에 대해서 말하려고 한다. 내가 어떤 증거를 가지고 그러한 주장을 펼쳐나갈지 궁금히 여길 분들이 있을 것이다. 사람이 시간을 어떻게 쓰는지를 알고 싶을 때 연구자들은 보통 설문조사를 한다. 잠들기 전이나 주말에 일정한 양식의 응답지를 채우도록 요구하는 이 방법은 간편하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 회상에 의존하다 보니 정확도가 떨어진다. 경험추출법(Experience Sampling Method), 줄여서 ESM이라고 부르는 방법도 있는데, 이것은 칠십 연대 초반에 내가 시카고 대학에서 개발한 것이다. ESM은 호출기나 프로그램이 입력된 시계를 이용하여 사람들에게 미리 배부한 소책자에 해당 사항을 적어넣도록 요구하는 방법이다. 하루를 두 시간 단위의 토막으로 쪼갠 다음, 아침 일찍부터 밤 열한시 넘어까지, 신호를 한 토막 안에서 예고없이 불시에 보낸다. 신호를 받은 사람은 자기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으며 누구와 함께 있는지를 기입하고, 그 순간 자기의 심리 상태를 점수로 평가한다. 가령 내가 얼마나 행복한지, 얼마나 집중하고 있는지, 어떤 충동을 느끼고 있는지, 얼마나 자신감을 갖고 있는지 따위를 스스로 평가하는 것이다.
주말이 되면 한 사람이 기입한 소책자의 분량이 56쪽까지 채워지는데, 여기에는 그 사람이 하루하루 무슨 일을 했고 어떤 경험을 했는지가 마치 영화 필름처럼 생생히 수록되어 있다. 우리는 그것을 보면서 어떤 사람이 아침부터 밤까지 매일 어떤 활동을 했는지 추적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이 하는 일에 대해서 혹은 같이 있는 사람에 대해서 그가 느꼈던 감정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 여러 해 동안 시카고대학연구소는 2,300명 가량의 사람으로부터 칠만 장이 넘는 응답지를 받았다. 다른 대학들이 모아놓은 자료까지 합치면 그 양은 세 배가 넘는다. 응답지는 많을수록 좋다. 사람들이 보내는 일상의 무늬와 결을 아주 자세하고 정확하게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예컨대 사람들이 얼마나 식사를 자주 하는지, 식사를 하면서 어떤 느낌을 갖는지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나아가 청소년, 성인, 노인이 식사를 하면서 가지는 느낌이 비슷한지 다른지, 혼자 식사할 때와 여럿이 식사할 때 어떤 차이가 나는지도 알 수 있다. 또 이 방법을 쓰면 미국인, 유럽인, 아시아인 등을 문화적으로 비교하는 작업도 가능하다. 다음에 이어지는 장들에서 나는 ESM으로 확보한 자료와 여타 설문조사에서 얻은 자료를 두루 활용할 것이다. 자료 출처는 책 말미에 밝혀놓았다.
경험의 내용
앞에서 보았듯이, 사람은 자신의 정력을 대부분 생산, 유지, 여가 활동에 쏟는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일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일이라면 질색을 한다. 또 어떤 사람은 노는 걸 좋아하지만 어떤 사람은 일이 없으면 좀이 쑤셔서 견디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가느냐는 우리가 하는 일과도 관계가 있지만, 그보다는 자기가 하는 일을 스스로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경험의 내용과 더 관계가 깊다.
사랑, 부끄러움, 고마움, 행복을 정말로 느끼는지 판가름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 자신뿐이라는 점에서 감정은 의식의 주관적 요소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감정은 의식을 가장 객관적으로 담아내기도 한다. 사랑에 빠질 때, 수치심을 느낄 때, 겁을 먹을 때, 행복에 겨울 때 우리를 강타하는 '실감'은, 우리가 외부세계에서 관찰하는 그 어떤 것보다도, 혹은 우리가 과학이나 논리학으로 깨우치는 그 어떤 지식보다도 생생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타인을 바라볼 때는 그 사람이 하는 말은 한 귀로 흘려듣고 오직 그의 행동에만 무게를 두면서 행동주의 심리학처럼 구는 반면, 스스로를 돌아볼 때는 겉으로 드러난 사건이나 행동보다는 자신의 속마음을 더 중시하면서 마치 현상학자처럼 구는 모순된 자세를 종종 보이곤 한다.
심리학자들은 아주 판이하게 다른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얼굴 표정을 바탕으로 하여 아홉 개의 기본적 감정을 추려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입으로 말할 수 있고 눈으로 사물을 볼 수 있는 것처럼 감정 상태도 일정한 공분모를 추릴 수 있을 것이다. 상황을 아주 단순하게 이해하자면 모든 감정은 근본적으로 이원론의 바탕 위에 서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어떤 감정은 긍정적이어서 호감을 주든가 부정적이어서 반감을 낳든가 둘 중의 하나다. 무엇이 우리에게 좋은지를 판단할 때 우리가 감정의 도움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이런 기본적 특성 덕분이다. 아기는 사람의 얼굴에 이끌리며 엄마의 얼굴을 보면 환하게 웃는다. 웃으면서 아기와 보호자의 유대도 강화되기 마련이다. 우리는 식사를 하거나 이성과 같이 있을 때 즐거움을 느끼는데, 만일 우리가 음식과 성에 초연하다면 인간이라는 종은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다. 뱀, 벌레, 악취, 암흑에 우리가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가지는 이유는 진화 과정에서 이것들이 인간의 생존에 심각한 위협을 초래하였기 때문이리라.
인간은 유전적으로 마련된 기본 감정말고도 더 미묘하고 섬세하며 때로는 저열하기까지 한 감정도 허다하게 만들어냈다. 자기를 반성하는 의식이 발전하면서 인간은 감정을 가지고 '장난'을 칠 수 있게 되었다. 감정을 날조하고 조작하는 능력을 가진 동물은 인간뿐이다. 우리 조상들은 노래, 무용, 가면 등을 이용해 공포, 경이, 희열, 도취의 감정을 유발하였다. 요즘은 공포영화, 마약, 음악이 그런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 조상이 외부 세계를 가리키는 하나의 신호로서 감정을 받아들였다면, 요즘 사람은 현실에서 분리되어 떨어져 나온 감정 그 자체에 빠져든다는 점이 다르다.
긍정적 감정의 전형이 있다면 그것은 행복이다. 우리가 일을 하는 궁극적 목표는 행복을 체험하기 위해서라고 강조한 사상가는 아리스토텔레스 이후로도 한두 명이 아니다. 우리가 재산, 건강, 명예를 바라는 것은 그 자체가 좋아서라기보다 이러 것들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리라는 기대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행복은 우리에게 뭔가를 가져다주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자체가 좋은 것이라고 여겨지기에 우리의 추구 대상이 된다. 하지만 인생의 노른자위라고 일컫는 이 행복에 대해서 우리는 과연 얼마나 알고 있을까?
금세기 중엽까지도 심리학자들은 행복을 심리학의 연구 대상이 아니라고 보았다. 당시 사회과학을 지배한 행동주의 패러다임은 행복과 같은 주관적 감정은 너무 가변적이므로 과학의 연구 대상이 되기 어렵다고 규정하였다. 그러나 학계를 휩쓸었던 '경험주의 회오리바람'이 몇십 년에 걸쳐 서서히 걷히고 난 뒤 주관적 경험의 중요성이 다시금 강조되었고 행복에 대한 연구도 자연히 활기를 띠게 되었다.
그동안 축적된 연구는 일견 수긍이 가면서도 놀라운 내용을 담고 있다. 그것은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온갖 문제와 비극에 부딪히면서도 자신의 삶을 불행하다기보다는 행복한 것으로 묘사하는 성향이 강하다는 점이다. 미국의 경우를 보더라도 응답자 가운데 삼 분의 일이 "아주 행복하다"고 했고, 열 명 가운데 한 명만이 "불행한 편"이라고 응답하였다. 대다수 응답자는 자신의 행복지수를 중간 이상으로 평가하였다. 다른 몇십 개국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보고되었다. 아득한 옛날부터 지금까지 인생의 유한성과 고통을 강조하면서 이 세상은 눈물의 골짜기요 인생은 고라고 설파한 철학자가 한둘이 아닌데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올 수 있을까? 예언자와 철학자는 대체로 완벽주의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어서 삶의 불완전서이 이들의 눈에는 못마땅해 보였고, 이것이 그런 불일치를 낳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은 아무리 불완전할지언정 살아 있음을 기쁘게 여긴다.
물론 비관주의자의 시각으로 이러한 현상을 설명할 수도 있다.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들은 설문조사를 하는 연구자를 속이거나 허세를 부리는 것이라고 보는 시각이다. 어떤 공장 노동자가 행복에 겨워할 수도 있지만 객관적으로 볼 때 그는 자신의 노동을 착취하는 체제로부터 소외당하고 있으므로 그런 주관적 행복감은 자기 기만이라고 못박은 마르크스의 해석은 우리의 사고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장 폴 사르트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허위 의식', 즉 자기가 살고 있는 세상이 가장 좋은 세상이라는 의식 속에서 살아간다고 꼬집었다. 좀더 최근에 와서는 미셸 푸코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사람들이 하는 말은 실제 사건을 반영하지 않으며 이야기 자체만을 겨누는 말하기의 한 방식이라고 주장하였다. 자기 기만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우리가 깨달아야 할 중요한 문제를 드러내고 있지만, 대중이 피부로 겪는 경험보다는 자기 류의 현실 해석이 우월하다고 보는 학자들 특유의 오만으로부터 역시 자유롭지 못하다. 마르크스, 사르트르, 푸코는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못하지만, 나는 어떤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할 때 어느 누구도 그의 말을 무시하거나 정반대의 뜻으로 해석할 권리가 없다고 본다.
수긍이 가면서도 놀라운 연구 결과가 또 하나 있다. 그것은 물질적 풍요와 행복의 상관 관계다. 물질적으로 여유가 있고 정치적으로 안정된 나라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 행복해한다는 것(가령 스위스인과 노르웨이인은 그리스인과 포르투갈인보다 행복체감도가 높다)은 어느 정도 예상한 결과지만 예외도 있다(가령 그리 넉넉하지 못한 아일랜드인이 넉넉한 일본인보다 만족해한다). 놀라운 것은 한 나라 안에서 개인의 경제력과 삶에서 느끼는 만족감 사이에는 아주 미미한 상관 관계밖에 없다고 하는 사실이다. 미국의 억만장자는 평균 소득을 가진 사람보다 아주 조금 더 행복할 뿐이다. 또 1960년부터 1990년대까지 미국인의 실질 소득은 두 배 이상으로 늘었지만 자신이 무척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의 비율은 여전히 30퍼센트 수준에 머물러 있다. 여기서 한가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빈곤의 문턱을 일단 넘어서면 재산이 늘어난다 하더라도 그것이 행복으로 직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사람마다 각기 다른 특성도 개인의 행복 체감도에 적잖은 영향을 미친다. 건강하고 자신감이 넘치며 안정된 결혼 생활을 하고 있고 신앙을 가진 외향적 인물은, 만성 질환을 앓고 있고 자신감이 부족하면 이혼을 한 내성적 무신론자보다 행복하다고 말할 가능성이 훨씬 높다. 특성을 이렇게 묶어서 보면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비판적 회의주의에도 일견 수긍할 만한 점이 있다. 가령 건강하고 신앙심이 깊은 사람은 실제 체험한 것과는 상관없이 건강하지 않고 신앙심이 없는 사람보다 '더 행복한' 담론을 만들어낸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해석이라는 필터를 통할지언정 '가공되지 않은' 체험 자료와 늘상 만나므로 자신의 느낌에 대한 이야기는 자기 감정의 중요한 일부분이다. 아이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직장을 두 군데나 다니지만 그래도 행복하다고 말하는 여자가 한 직장도 지겨워하면서 다니는 여자보다 실제로 더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행복이 우리가 따져볼 만한 가치가 있는 감정의 전부는 아니다. 하루하루 삶의 질을 끌어올리고 싶다고 마음먹은 사람에게 행복은 출발점으로서는 오히려 바람직하지 못하다. 행복의 느낌은 다른 감정처럼 사람마다 편차가 크지 않은 편이다. 아무리 공허하게 살아가는 사람도 자기가 불행하다는 사실을 여간해서는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게다가 행복을 얼마나 느끼느냐는 주어진 상황보다는 개인의 성향에 좌우된다. 시간이 흐르면서 어떤 사람은 외부 여건과는 상관없이 행복하다고 여기는 반면 어떤 사람은 아무리 즐거운 일이 생겨도 자꾸만 불행하다는 의식에 젖어든다는 뜻이다. 행복의 느낌은 자신이 어떤 일을 하고 누구와 같이 있고 어떤 장소에 있는가에 크게 영향받지 않는다. 다른 감정은 상황이 달라지면 쉽게 바뀐다. 그러나 그런 감정도 행복의 느낌에 이어져 있으므로 결국은 우리가 느끼는 행복감을 끌어올릴 수 있다.
이를테면 자신이 얼마나 능동적이고 강인하며 민첩하다고 스스로 생각하는지는 어떤 일을 하는가에 따라 그 도가 크게 달라진다. 어려운 일을 할 때는 그런 감정도 강해지며, 일을 하다가 실패를 맛보거나 아예 아무 일도 하지 않을 때는 그런 감정 또한 약해진다. 이러한 감정은 우리가 어떤 일을 하기로 마음먹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자신이 능동적이고 강인하다는 느낌이 들면 그만큼 거기서 맛보는 행복감도 커지기 마련이어서, 시간이 흐르면 우리가 선택한 일이 행복감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같은 이치로 보통 사람은 혼자 있을 때보다 남과 같이 있을 때 자기가 명랑하고 사교적인 사람이라는 느낌을 쉽게 가진다. 대체로 외향적인 사람이 내성적인 사람보다 행복하다는 생각을 더 많이 하는 이유도 명랑성과 사교성이 이처럼 행복감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삶의 질을 좌우하는 것은 행복감만은 아니다. 행복해지기 위해 그 사람이 어떤 일을 하는가도 삶의 질을 좌우한다. 자신의 존재에 의미를 주는 목표를 개발하지 못하거나 자신의 정력을 충분히 써먹지 못할 경우, 우리는 좋은 감정의 극히 일부만을 맛보게 된다. 볼테르의 소설 <캉디드>의 주인공처럼 "나만의 정원을 가꾸겠노라."면서 세상으로부터 물러나는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은 훌륭한 삶을 산다고 말하기 어렵다. 꿈이 없고 위험이 따르지 않는 삶은 옹색하기 짝이 없다.
감정은 의식 안의 상태를 말한다. 슬픔, 두려움, 떨림, 지루함 같은 바람직하지 못한 감정은 마음속에 '심리적 엔트로피'를 조성한다. 무질서도를 뜻하는 엔트로피 상태에 빠지면 우리는 바깥일에 집중을 하지 못한다. 내부의 질서를 다시 세우는 데 온통 신경을 쏟아야 하기 때문이다. 행복, 과단성, 민첩성 같은 바람직한 감정은 '심리적 반엔트로피'의 상태다. 이때 우리는 스스로를 되돌아보거나 추스르는 데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없으므로 아무 걸림돌 없이 정력을 우리가 선택한 과제로 온전히 투입할 수 있다.
우리는 주어진 과제에 관심을 쏟는 것을 지향점 또는 목표를 설정했다고 표현한다. 목표를 얼마나 끈질기고 일관되게 추구하느냐는 동기 부여가 얼마나 잘 되어 있느냐에 달려 있다. 의도, 목표, 동기 부여는 심리적 반엔트로피를 조성한다. 정신력을 한곳에 집중시키고 작업의 우선 순위를 조정하면서 의식 안에 질서를 세우는 것이다. 질서가 없으면 정신적 과정은 두서가 없어지고 감정의 질은 급격히 저하된다.
우리가 말하는 목표 중에는 길모퉁이 가게에 가서 아이스크림을 사오는 사소한 일도 있지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중차대한 사명도 있다. 우리는 하루의 삼 분의 일은 좋아서 하는 일을 하고 삼 분의 일은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일을 하며 나머지 삼분의 일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일을 한다. 연령, 남녀, 활동량에 따라서 이 비율은 조금씩 달라진다. 가령 아이는 어른보다, 남자는 여자보다 자신의 선택 폭이 크다고 생각한다. 집에서 하는 일은 직장에서 하는 일보다 자발서이 큰 것으로 이해된다.
사람들은 자기가 하는 일이 자발적일 때 가장 만족스러워하지만 의무감 때문에 하는 일 역시 크게 불만스러워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가 많이 있다. 심리적 엔트로피는 딱히 할 일이 없을 때 하는 일에서 가장 높이 나타났다. 결국 내적 동기 부여(이것을 하고 싶다)든 외적 동기 부여(이것을 해야 한다)든 목표를 가지고 있는 것이 집중을 해야 할 어떤 목표도 갖지 못하고 마지못해 일을 하는 상태보다는 삶의 질을 끌어올려 준다. 동기 부여의 필요성을 절감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삶을 개선할 수 있는 여지가 우리에게 그만큼 많다는 뜻이다.
의도의 경우는 정력이 단기간에 투입되는 반면, 목표는 좀더 장기적으로 투입된다. 우리가 도달하려는 자아의 모습을 결정짓는 것이 바로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다. 테레사 수녀와 마돈나라는 가수의 삶이 판이하게 다른 것은 두 사람이 평생토록 자신의 주의를 투입하는 목표점이 달랐기 때문이다. 일관된 목표의 추구 없이 일관된 자아를 만들어 나가기는 어렵다. 뚜렷한 목표의식을 가지고 정력을 제대로 투입해야 한 사람의 경험에 질서가 생긴다. 예측이 가능한 행동, 감정, 선택에서 드러나는 이 질서는 시간이 흐르면 개성 있는 '자아'로서 우리 눈앞에 나타난다.
한 사람이 세우는 목표는 그의 자부심에도 영향을 미친다. 백여 년 전에 이미 윌리엄 제임스가 지적한 대로 자부심은 기대와 성공의 비율에 좌우된다. 어떤 사람이 자부심이 낮다면, 그것은 그가 목표를 너무 높이 두었거나 성공한 경험이 몇 번 안 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따라서 가장 많이 성공한 사람이 반드시 가장 높은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리란 법은 없다. 일반인의 예상과는 달리, 미국 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아시아계 학생의 자부심은 그보다 못한 성적을 거둔 다른 소수 민족계 학생보다 낮다. 아시아계 학생은 웬만한 성공으로는 만족하기 어려운 높은 목표를 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직장에 다니는 어머니는 그렇지 않은 어머니보다 스스로를 평가하는 점수가 높지 않다. 자신의 능력을 훌쩍 뛰어넘는 높은 기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에게 자부심을 키워줄수록 좋다고 세상 사람들은 말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진리가 아닐 수도 있음을 여기서 알 수 있다. 기대치를 낮추는 데서 얻는 자부심은 자랑할 것이 못 된다.
의도와 목표를 두고 사람들이 흔히 품는 오해가 있다. 가령 힌두교나 불교처럼 갈래가 다양한 동양의 종교들은 행복에 이르려면 욕망을 버리라고 가르치는데 이것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다. 즉 모든 욕망을 포기하여 더 이상 목표가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 도달해야만 불행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 방식에 영향을 받은 적잖은 수의 유럽과 미국 청년들이 철저히 자동적이며 우연히 이루어지는 행위만이 삶의 깨달음으로 이어진다는 믿음 아래 일체의 목표를 거부하기에 이르렀다.
내가 보기로는 동양 종교를 이런 식으로 파악하는 것은 너무 피상적이다. 따지고 보면 욕망을 뿌리뽑겠다는 것 자체가 엄청나게 달성하기 어려운 목표이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 유전적, 문화적 욕망이 철저히 뿌리내리고 있으므로 이것들을 잠재우려면 거의 초인적인 의지가 있어야 한다. 마음가는 대로 살면 목표를 정해야 하는 굴레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저 본능과 교육이 자신들에게 던진 목표를 맹목적으로 좇는 것에 불과하다. 그들은 훌륭한 스님도 넌더리를 낼 만큼 저속하고 비뚤어진 생각을 가진 사람이 되고 만다.
내가 보기에 동양의 종교가 가르치는 내용은 목표를 덮어놓고 부정하리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 마음속에 저절로 생겨나는 의도는 신뢰할 수 없는 것임을 말하고자 할 따름이다. 궁핍하고 위험한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다 보니 우리의 유전자는 부득불 탐욕스러워지고 남들 위에 군림할 수 있는 힘을 갈망하게 되었다. 마찬가지 이유로 우리가 속한 사회 집단도 같은 언어와 종교를 가진 사람들밖에는 신뢰할 수 없다고 우리에게 가르친다. 관성은 무시 못하는 것이어서 우리가 가진 목표의 대부분은 유전과 문화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불교가 우리에게 억눌러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은 바로 그런 목표다. 하지만 그러려면 어마어마한 의지가 필요하다. 타성에 젖은 목표를 근절한다는 역설적 목표는 한 사람이 자신의 정신력을 이십사 시간 쏟아붓는다 하더라도 이루기 벅찬 과업이다. 요가 수행자나 승려는 타성에 젖은 목표가 의식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것을 막느라 전력 투구하는 사람들이므로 다른 일을 할 수 있을 만한 여력이 거의 없다. 동양 종교에서 말하는 수행은 서구인이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내용과는 정반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신의 목표를 다스리는 요령을 터득하는 것은 성숙한 삶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첫걸음이다. 그것은 자연발생적 욕망에 몸을 맡기는 것과도 다르고 욕망을 무조건 억압하는 것과도 다르다. 최선의 방안은 자기 욕망의 뿌리를 이해하고 그 안에 숨어 있는 편견을 인식하면서, 사회적, 물질적 여건을 지나치게 흩뜨리지 않는 한도 내에서 자신의 의식에 질서를 가져올 수 있는 목표를 겸허하게 선택하는 것이다. 이보다 덜한 목표를 세우는 것은 자신의 잠재력을 개발할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는 것이며, 이보다 과도한 목표를 세우는 것은 좌절을 자초하는 셈이다.
의식의 내용으로 감정, 목표에 버금가게 중요한 것은 사고의 인지적 과정이다. 사고는 과정이 매우 복잡하므로 짧은 지면에서 체계적으로 다루기는 불가능하다. 여기서는 주제를 단순화하여 일상 생활에 초점을 맞추어 논의하는 게 좋겠다. 우리가 사고라고 부르는 것은 정신력에 질서가 갖추어지는 과정이기도 하다. 감정은 유기체를 접근이나 회피의 태세로 움직여서 주의를 집중시키며, 목표는 욕망하는 대상의 모습을 제시하여 주의를 집중시킨다. 사고는 의미 있는 방식으로 서로 연관되어 있는 이미지의 연쇄를 낳아 유기체의 주의를 집중시킨다.
가장 기본적인 정신 작용은 원인과 결과를 잇는 것이다. 손을 움직여 침대에 걸린 방울을 딸랑딸랑 울릴 수 있다는 것을 어린아이가 처음 깨달은 때가 바로 한 사람의 인생에서 원인과 결과가 처음으로 이어지는 순간이다. 훗날 우리가 하게 되는 사고의 대부분은 이런 단순한 연합에 토대를 둔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 원인에서 결과로 이어지는 단계들은 점점 추상화되러 구체적 현실로부터 떨어져 나온다. 전기기사, 작곡가, 주식 중개인은 와트와 옴, 음과 박자, 주식의 매입과 매도 등 자기 머리에서 운용되는 상징들 사이에서 있을 수 있는 수많은 연합의 가능성을 동시에 고려하면서 작업한다.
감정, 목표, 사고가 따로 떨어진 경험의 가닥들로 의식을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늘 교섭하면서 서로 변화시킨다는 점이 이제는 어느 정도 분명해졌으리라고 본다. 한 여자와 사랑에 빠진 청년은 사랑이라는 말에 담겨 있는 모든 감정을 겪는다. 청년은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애쓰면서 어떻게 하면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까 고민한다. 새 차를 사면 여자의 관심을 끌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이제 새 차를 사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한다는 목표가 구애라는 목표 안으로 끼여든다. 그러나 일을 더 하면 좋아하는 낚시도 못 가게 될 거라는 실망의 감정을 느낀다. 이것은 다시 새로운 생각을 낳고, 청년은 자신의 감정과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목표를 조정한다. 이처럼 경험의 흐름은 수많은 정보를 끊임없이 실어나른다.
정신의 작용을 깊이 있게 파고들려면 집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집중하지 못하면 의식은 혼돈에 빠진다. 마음은 평상시에는 정보의 무질서 상태에 놓여 있다. 생각은 논리적 인과 관계에 따라서 가지런히 배열되는 것이 아니라 두서 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얽혀 있다. 집중하는 요령을 터득하지 못하면, 다시 말해서 노력을 한곳으로 모으지 못하면 사고는 아무런 결론에 이르지 못하고 지리멸렬해진다. 공상은 마음에 드는 이미지들을 따붙여 마음의 내부에서 일종의 영화를 만드는 것인데, 이런 공상에 빠지는 데도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집중하는 법을 배우지 못해서 공상에도 제대로 못 빠지는 아이들이 요즘 한둘이 아니다.
감정의 흐름을 거슬러야 할 경우엔 집중하기가 쉽지 않다. 수학을 싫어하는 학생은 한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교과서에 실린 정보를 흡수하기가 여간 고역이 아니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강한 자극(시험에 붙어야 한다든가 하는)이 필요하다. 정신적 과업이 어려울수록 집중하기도 그만큼 어려워진다. 그러나 자기가 하는 일을 좋아하고 그 일을 하겠다는 각오가 되어 있을 때는 객관적 어려움이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별다른 갈등 없이 마음을 집중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사고라고 하면 사람들은 대뜸 지능부터 떠올린다. "내 IQ가 얼마더라?", "그애는 수학의 천재야."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사람들은 사고력의 개인차에 관심이 깊다. 지능은 이를테면 수를 머리로 얼마나 능숙하게 그려내고 처리할 수 있는가, 단어에 담긴 정보에 얼마나 예민하게 반응할 수 있는가처럼 정신 과정의 다양한 측면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하워드 가드너가 보여주듯이 우리는 지능의 개념을 확장하여 그 안에 근육 감각, 소리, 느낌, 모습 같은 갖가지 종류의 정보를 구분하고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얼마든지 포함시킬 수 있다. 어떤 아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소리에 대한 감수성이 남달리 뛰어나다. 음정을 잘 구분하며 화음도 또래보다 잘 넣는다. 태어날 때의 미세한 차이가 시간이 흐를수록 시각, 운동, 수학 능력에서 엄청난 차이를 낳는다.
그러나 아무리 타고난 재능이 있어도 집중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면 성숙한 지능으로 발전하지 못한다. 재능의 개발에는 집중력이 필요하다. 정신력을 모을 수 있어야만 음악적 재능을 가진 아이는 음악가가 될 수 있고 수학적 재능을 가진 아이는 공학자나 물리학자가 될 수 있다. 성인이 되었을 때 전문가로서 당연히 갖추어야 할 실력과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모차르트는 신동이었지만 만약 그의 아버지가 아들이 기저귀를 떼자마자 강제로 음악 연습을 시키지 않았더라면 그의 재능이 꽃을 피웠을지 나로서는 의심스럽다. 집중력이야말로 모든 사고의 원동력이라 할 수 있다.
경험의 내용이 서로 다르면 일상 생활에서 조화를 이루기가 어렵다. 내가 근무를 하면서 집중하는 것은 고용주가 나에게 집중적으로 사고해야 하는 일을 맡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딱히 원해서 그 일을 하는 것이 아니므로 동기 부여는 그다지 높다고 볼 수 없다. 한편으로는 나는 사춘기를 맞이한 아들 녀석의 비뚤어진 행동 때문에 자꾸만 마음이 불안해진다. 그래서 책상 앞에 앉아는 있지만 완전히 일에 몰두하지는 못한다. 내 마음이 극심한 혼돈을 겪고 있어서라기보다는 의식의 엔트로피가 높아서 그렇다. 감정, 목표, 사고가 초점에 들어왔다 사라지며, 상반된 충동을 낳으면서 나의 관심을 여러 방향으로 흩뜨려놓는다. 또 하나의 예를 들자면, 나는 퇴근 후에 친구와 만나 즐겁게 술을 마시면서도 가족에게 곧바로 가지 않은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시간과 돈을 낭비하는 자신의 모습에 화가 나기도 한다.
이러한 시나리오는 별로 생소하지가 않다. 하루하루의 삶이 그런 모순으로 차 있다. 가슴, 의지, 정신이 일치할 때의 뿌듯함을 우리는 좀처럼 맛보기 어렵다. 감정, 목표, 사고가 일치하지 않고 의식 안에서 격투를 벌이며, 우리는 그것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다른 길은 없는지 생각해 보자. 가련 스키를 타고 산비탈을 질주할 때 우리는 몸의 움직임, 스키의 위치, 얼굴을 스치며 지나가는 공기, 눈 덮인 나무에 주의를 집중한다. 갈등이나 모순을 의식할 짬이 없다. 조금이라고 마음을 놓았다간 눈 속에 고꾸라진다. 그러니 누가 딴 생각을 하겠는가? 활강이 너무도 완벽하여 우리는 그것이 한없이 계속되기를 바라고 순간의 경험에 완전히 몰입한다.
당신에게 스키가 별볼일없는 것이라면 그 장면에 당신이 좋아하는 활동을 넣어보라. 그것은 성가대에서 부르는 합창일 수도 있고, 컴퓨터 프로그램을 짜는 일일 수도 있고, 춤이나 카드 놀이, 독서일 수도 있다. 혹은 세상의 많은 사람들처럼 당신도 일을 좋아한다면 까다로운 외과 수술이나 피가 마르는 상담에 몰입하는 순간일 수도 있다. 또는 좋아하는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거나 엄마가 아기와 놀 때처럼 사람과 사람이 어울리는 순간에 완전히 빠져드는 경험을 할 수도 있다. 이러한 순간의 공통점은 의식이 경험으로 꽉 차 있다는 것이다. 이때 각각의 경험은 서로 조화를 이룬다. 일상 생활에서는 좀처럼 그런 경험을 맛보기가 어렵지만 그 순간에는 느끼는 것, 바라는 것, 생각하는 것이 하나로 어우러진다.
예외적으로 나타나는 이 순간을 나는 '몰입 경험'이라고 부르고 싶다. '몰입'은 삶이 고조되는 순간에 물 흐르듯 행동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느낌을 표현하는 말이다. 그것은 운동선수가 말하는 '몰아 일체의 상태', 신비주의자가 말하는 '무아경', 화가와 음악가가 말하는 미적 황홀경에 다름아니다. 운동선수, 신비주의자, 예술가는 각각 다른 활동을 하면서 몰입 상태에 도달하지만, 그들이 그 순간의 경험을 묘사하는 방식은 놀라우리만큼 우리와 비슷하다.
우리는 적절한 대응을 요구하는 일련의 명확한 목표가 앞에 있을 때 몰입할 가능성이 높다. 체스, 테니스, 포커 같은 게임을 할 때 몰입하기 쉬운 이유는 목표와 규칙이 명확히 설정되어 있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하지 않고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임이 진행되는 동안 선수는 모든 것이 흑백으로 선명하게 표현된 소우주 안에 있다. 종교 의식에 참여하거나 음악을 연주하거나 뜨개질을 하거나 컴퓨터 프로그램을 짜거나 산을 오르거나 수술을 할 때도 명확한 목표가 주어진다. 몰입을 유발하는 활동을 '몰입 활동'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일상 생활과는 달리 몰입 활동은 명확하고 모순되지 않은 목표에 초점을 맞출 수 있게 해준다.
몰입 활동의 또 하나 특징은 되먹임, 곧 피드백의 효과가 빨리 나타난다는 것이다. 몰입 활동은 작업이 얼마나 순조롭게 이루어지는지를 말해 준다. 우리는 체스를 두면서 말 하나를 움직일 때마다 형세가 유리해졌는지 불리해졌는지를 안다. 등반가는 걸음을 한 보 내디딜 때마다 그만큼 높이 올라섰다는 것을 안다. 성악가는 노래의 한 소절이 끝날 때마다 자기가 부른 노래가 악보와 맞았는지 틀렸는지를 알 수 있다. 뜨개질하는 사람은 한 땀 한 땀이 자기가 의도하는 무늬와 맞아떨어지는지를 곧바로 알 수 있다. 외과의는 칼이 동맥을 잘 피했는지 아니면 갑자기 출혈이 시작되었는지를 한 눈에 알 수 있다. 직장에서나 집에서나 우리는 단서가 주어지지 않으면 지금 하는 일이 잘 되는지 못되는지 한참을 모르고 지낼 때가 많지만 몰입 상태에서는 대체로 그걸 알 수 있다.
몰입은, 쉽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버겁지도 않은 과제를 극복하는 데 한 사람이 자신의 실력을 온통 쏟아부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행동력과 기회 사이에 조화가 이루어질 때 우리는 바람직한 경험을 하게 된다(<그림 1>). 과제가 너무 힘겨우면 사람은 불안과 두려움에 젖다가 제풀에 포기하고 만다. 과제와 실력의 수준이 둘 다 낮으면 아무리 경험을 해도 미적지근할 뿐이다. 그러나 힘겨운 과제가 수준 높은 실력과 결합하면 일상 생활에서는 맛보기 어려운 심도 있는 참여와 몰입이 이루어진다. 등반가라면 산에 오르기 위해 젖먹던 힘까지 짜내야 할 때, 성악가라면 높고 낮은 성부를 자유자재로 넘나들어야 하는 까다로운 노래를 불러야 할 때, 뜨개질하는 사람이라면 자수의 무늬가 이제까지 시도했던 그 어떤 무늬보다 복잡할 때, 외과의라면 순발력 있는 대응을 요구하는 수술이나 새로운 기법을 도입한 수술을 할 때, 바로 그런 경험을 한다. 보통 사람은 하루가 불안과 권태로 가득하지만 몰입 경험은 이 단조로운 일상에서 벗어나는 강렬한 삶을 선사한다.
목표가 명확하고 활동 결과가 바로 나타나며 과제와 실력이 균형을 이루면 사람은 정신을 체계적으로 집중할 수 있다. 몰입은 정신력을 모조리 요구하므로 몰입 상태에 빠진 사람은 완전히 몰두한다. 잡념이나 불필요한 감정이 끼여들 여지는 티끌만큼도 없다. 자의식은 사라지지만 자신감은 평소보다 커진다. 시간 감각에도 변화가 온다. 한 시간이 일분처럼 금방 흘러간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여한 없이 쓸 때 사람은 어떤 일을 하고 있건 일 자체에서 가치를 발견한다. 삶은 스스로를 정당화하게 된다. 체력과 정신력이 조화롭게 집중될 때 삶은 마침내 제 스스로 힘을 얻는다.
삶은 훌륭하게 가꾸어주는 것은 행복감이 아니라 깊이 빠져드는 몰입이다. 몰입해 있을 때 우리는 행복하지 않다. 행복을 느끼려면 내면의 상태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고, 그러다 보면 정작 눈앞의 일을 소홀히 다루기 때문이다. 암벽을 타는 산악인이 고난도의 동작을 하면서 짬을 내어 행복감에 젖는다면 추락할지도 모른다. 까다로운 수술을 하는 외과의나 고난도의 작품을 연주하는 음악가는 행복을 느낄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다. 일이 마무리된 다음에야 비로소 지난 일을 돌아볼 만한 여유를 가지면서 자신이 한 체험이 얼마나 값지고 소중했는가를 다시 한 번 실감하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되돌아보면서 행복을 느낀다. 물론 몰입하지 않고도 행복을 맛볼 수는 있다. 고단한 몸을 눕혔을 때의 편안함과 따사로운 햇살은 행복을 불러일으킨다. 모두 소중한 감정임에는 틀림없지만 이런 유형의 행복감은 형편이 안 좋아지면 눈 녹듯 사라지기에 외부 상황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몰입에 뒤이어 오는 행복감은 스스로의 힘으로 만든 것이어서 우리의 의식을 그만큼 고양시키고 성숙시킨다.
<그림1>에서 우리는 왜 몰입이 개인을 성숙시키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그림에서 '각성' 상태에 있다고 가정하자. 각성은 별로 나쁜 상태는 아니다. 각성 상태에 놓인 사람은 정신을 상당히 집중하고 능동적이며 대상에 밀착되어 있다. 문제는 그 정도가 높지 않아 몰입에서 맛볼 수 있는 즐거움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좀더 신바람 나는 몰입의 상태로 넘어갈 수 있을까? 답은 자명하다. 실력 연마에 좀더 힘을 쏟아야 한다. 이번에는 '자신감'이라는 범주로 넘어가 보자. 이것 역시 행복감, 만족감을 웬만큼 가질 수 있는 바람직한 경험의 상태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는 아직 집중도, 밀착도가 떨어지며 자신이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의식 또한 강하지 않다. 그럼 여기서 어떻게 해야 몰입으로 넘어갈 수 있을까? 이 경우에는 과제의 수준을 높여야 한다. 이렇듯 각성과 자신감은 배움을 얻을 수 있는 중요한 상태다. 그 밖의 상태에서 몰입으로 넘어가기는 이보다 어렵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불안이나 걱정에 휩싸여 있을 때는 몰입 상태가 너무나 요원해 보이기 마련이다. 그래서 지금의 상황을 극복하기보다는 지금보다 덜 부담스러운 상황으로 물러나려는 성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그러므로 몰입 경험은 배움으로 이끄는 힘이다. 새로운 수준의 과제와 실력으로 올라가게 만드는 힘이다. 이상적으로 보면 사람은 자기가 하는 일을 즐기면서도 꾸준한 성장의 길을 걸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몰입의 단계로 넘어가기에는 권태와 무력감이 너무 강하여 비디오처럼 이미 나와있는 규격화된 자극으로 우리의 정신을 채우거나, 필요한 실력을 닦기도 전에 지레 겁부터 집어먹고 마약이나 술 같은 인위적 이완제가 가져다 주는 몽롱한 상태로 가라앉는다. 최적의 경험을 하려면 힘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에게는 첫발을 내디딜 기운조차 없는 경우가 흔하다.
사람들은 얼마나 자주 몰입을 경험할까? 가령 평범한 미국인에게 "일을 하다가 거기에 푹 빠져들어 시간 감각조차 잃어버리는 경험을 한 적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더니 다섯 명 중에 대략 한 명꼴로 그런 경험을 자주 한다고 대답하였다. 어떤 사람은 하루에도 여러 번 그런 경험을 하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반면 15퍼센트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국가별로도 이 비율을 크게 차이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가령 최근에 6,469명의 독일인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더니 다음과 같은 결과가 나왔다. 그런 경험을 자주 한다가 23퍼센트, 가끔 한다가 40퍼센트, 거의 못한다가 25퍼센트, 전혀 못한다가 12퍼센트였다. 물론 가장 강렬했던 몰입의 경험만 들도록 요구하면 긍정적 응답의 비율은 크게 떨어질 것이다.
사람들은 화초 가꾸기건, 음악 감상이건, 볼링이건, 요리건, 대체로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할 때 몰입을 경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운전을 할 때나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혹은 일을 할 때도 의외로 자주 나타난다. 텔레비전을 보거나 휴식을 취할 때처럼 수동적으로 임하는 여가 활동에서는 좀처럼 그런 체험이 보고되지 않는다. 명확한 목표가 주어져 있고, 활동의 효과를 곧바로 확인할 수 있으며, 과제의 난이도와 실력이 알맞게 균형을 이루고 있다면 사람은 어떤 활동에서도 몰입을 맛보면서 삶의 질을 끌어올릴 수 있다.
3.일과 감정
삶의 질은 칠십여 년 동안 우리가 어떤 일을 하고 그 일을 하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에 달려 있다. 사람이 저마다 하는 행동은 경험의 질에 영향을 미친다. 우울한 일만 하면서 평생을 보낸 사람이 인생을 행복하게 살았을 리 만무하다. 하나의 행동에는 바람직한 특성과 바람직하지 못한 특성을 함께 가지고 있다. 가령 식사를 할 때 우리는 보통 때보다 바람직한 감정을 쉽게 느낀다. 하루 동안에 사람이 느끼는 행복지수를 그래프로 나타내면 가운데가 불룩 솟아오르는데, 그때가 바로 점심 시간이다. 하지만 식사 중에는 정신의 집중도가 떨어지는 편이므로 몰입하기가 쉽지 않다.
행동이 마음에 미치는 효과는 단선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행동 하나하나가 다른 모든 활동과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음식을 먹으면 기분이 좋아지지만 하루 종일 먹기만 한다고 행복해지지는 않는다. 식사는 행복감을 높이지만 깨어있는 시간 중에서 5퍼센트만을 거기에 투입할 때만 그렇다. 일과를 몽땅 식사에만 투자한다면 음식이 오히려 우리에게 고역으로 다가올 것이다. 우리가 좋아하는 다른 활동도 이와 같다. 섹스, 휴식, TV 시청은 정도가 심하지 않을 때는 일상 생활의 질을 끌어올리지만 그 효과가 누적되지는 않는다. 수익체감의 원리는 여기서도 적용된다.
여러 가지 활동을 하는 동안 사람이 어떤 느낌을 받는지 <표 2>에 간단히 소개하였다. 구체적으로 따져보면, 성인의 경우 일을 할 때(어린이는 공부를 할 때) 행복의 체감 수준은 평균치보다 떨어지며 의욕의 수준 또한 평균치를 크게 밑돈다. 그러나 집중도는 비교적 높은 편이어서 다른 활동을 할 때보다 정신 작용이 활발히 이루어지는 듯하다. 놀라운 것은 일을 하면서 자주 몰입 경험을 한다는 사실이다. 일은 과제의 난이도와 요구되는 실력의 수준이 비교적 높을 뿐 아니라 목표 또한 명확하고 효과도 즉시 나타나기 때문인 듯하다.
물론 '일'의 범주는 아주 넓어서 일의 개념을 정교하게 일반화하기란 불가능한지도 모른다.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일에서 얻는 경험의 질이 일의 종류에 좌우된다는 점이다. 항공관계사에게 요구되는 집중도는 야간경비원보다 훨씬 높다. 자영업자의 성취 의욕은 관공서에서 근무하는 공무원보다 훨씬 높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일이 가지는 공통성은 분명히 있다. 예컨대 사무직 사원이 직장에서 하는 경험은 그가 집에 있을 때 하는 경험보다 생산직 사원이 근무 중에 갖는 경험과 더 비슷하다.
일을 지나치게 일반화할때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같은 일이라도 상황에 따라 다르게 체험되는 다양성이 있기 때문이다. 사무직 사원은 회의실에 앉아 있는 것보다는 기획서를 놓고 씨름하는 것을 더 좋아할 수 있고, 생산직 사원은 재고품을 조사하는 것보다는 기계를 돌리는 일에 더 애정을 가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일을 통해 얻는 경험은 다른 보통의 활동 범주와 명확히 구별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하는 일이 몰입 활동에 가까울수록 우리는 그 일에 깊숙이 빠져들고 우리의 경험은 더욱 긍정적으로 변한다. 만약 어떤 일이 명확한 목표, 뚜렷한 결과, 자신감, 힘에 부치지 않은 난이도, 정돈된 분위기를 줄 수 있다면, 그 일을 하면서 느끼는 감정은 운동을 하거나 예술 작품을 감상할 때 맛보는 희열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유지 활동은 경험의 질이 아주 다양하게 나타난다. 가사노동을 즐기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체로 부정적 반응이나 이도저도 아닌 어중간한 반응을 보인다. 그러나 좀더 자세히 파고들면 같은 가사노동이라도 집안 청소보다는 요리를 선호하는 경향이 엿보인다. 세수나 옷입기 같은 개개인의 몸단장은 긍정적 반응을 낳지도 부정적 반응을 낳지도 않는다. 앞서 보았듯이 식사는 영향력이나 의욕에서 하루 중 가장 긍정적 반응을 낳는 행위지만, 거기에 요구되는 인지 활동의 수준이 낮아서 몰입으로 이어질 가능성은 높지 않다.
운전도 유지 활동이라는 범주에서 만만찮은 비중을 차지하며, 놀라울 정도로 긍정적 반응을 낳는다. 운전은 행복지수나 동기 유발 차원에서는 중간 수준에 머물지만 기술과 집중력을 요구하므로 유독 운전을 할 때만 몰입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하루 중에서 비교적 긍정적 경험이 많이 나타나는 쪽은 여가 시간이다. 여가 시간에 우리는 강한 의욕을 가지고 하고픈 일을 마음대로 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여기서도 뜻밖의 사실이 눈길을 끈다. 신문을 읽거나 텔레비전을 보거나 그냥 쉬면서 보내는 수동적 여가는 그런 대로 즐거움을 주기는 하지만 정신 집중이 요구되지 않는 활동이라서 몰입으로 이어지기 어렵다. 이렇다 할 목적 없이 사람들과 만나서 노닥거리고 어울리는 행위는 특별히 정신 집중이 필요하지는 않지만 대체로 아주 긍정적인 반응을 낳는다. 연애나 섹스에서 가장 황홀한 경험을 맛본다는 건 부인 못할 사실이지만 보통 사람에게는 기회가 자주 찾아오지 않는다. 연애와 섹스는 정서적, 지적 보상이 동시에 주어지는 안정된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삶의 질 전체에서 뚜렷한 변화를 가져오기 어렵다.
능동적 여가도 아주 긍정적인 경험을 낳는다. 운동을 하거나 악기를 연주하거나 외식을 하거나 영화를 보러 갈 때처럼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 사람들은 더 행복해하고 의욕이 넘치며 집중력이 높아져서 그 어느 때보다도 몰입 경험을 할 가능성이 높다. 바로 이 순간에 경험의 다양한 차원이 가장 밀도 있게 집약되면서 조화를 이룬다. 그러나 한 사람이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시간 중에서 능동적 여가 활동이 차지하는 비중은 불과 사 분의 일에서 오 분의 일이라는 데 유념할 필요가 있다. 나머지 시간을 사람들은 텔레비전 시청 같은 수동적 여가 활동으로 보낸다.
<표 2>를 이해하는 또 하나의 방식이 있다. 어떤 활동이 가장 행복한가, 어떤 활동이 사람을 가장 의욕적으로 만드는가 하고 물어보라. 답은 대체로 이렇게 나온다. 사람들은 먹을 때, 여가를 능동적으로 즐길 때, 남들과 대화를 나눌 때 가장 큰 행복을 맛보며 직장에서 일을 하거나 집안일을 할 때는 별로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 의욕도 비슷한 양상을 띤다. 한 가지 다르다면 사람들은 수동적 여가에서 별로 행복을 느끼지 못하면서도 그것을 원한다는 것이다. 집중력은 근무를 할 때, 운전을 할 때, 능동적으로 여가 활동에 임할 때 가장 높게 나타난다.
그러므로 삶의 질을 끌어올리려면 먼저 가장 보람찬 경험을 할 수 있도록 하루의 활동을 설계해야 한다. 말은 쉽다. 그러나 습관과 사회적 관성의 압력이 워낙 크게 작용하므로 우리는 어떤 일이 나에게 즐거움을 주고 스트레스를 주는지, 어떤 일이 나를 우울하게 만드는지 잘 알아차리지 못한다. 밤에 일기를 적거나 하루의 일과를 반성하는 버릇을 들이면 내 기분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 과연 무엇인지를 차분히 추려낼 수 있다. 여기서 가장 높은 점수를 얻은 활동이 명확히 드러나면, 바람직한 활동은 빈도를 늘리고 그렇지 못한 활동은 빈도를 줄이는 새로운 실험에 나설 수 있을 것이다.
네덜란드에서 아주 규모가 큰 지역정신건강센터의 책임자로 있는 정신의학자 마르텐 데브리스는 그러한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하는 사례를 보고하였다. 병원 당국은 ESM을 통하여 환자들이 하루 종일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느낌을 받는지를 알아냈다. 십 년이 넘게 그 병원에 입원해 있는 한 여인은 정신분열증을 심하게 앓고 있었다. 심각한 정신 질환을 앓는 사람들이 보통 그런 것처럼 그 여자도 머리가 아주 산만하고 감정도 무디기 이를 데 없었다. ESM 조사를 받은 두 주일 동안에 그 여자가 아주 만족스러운 느낌을 보고한 것은 딱 두 번이었다. 두 번 다 손톱을 다듬고 있을 동안이었다.
의료진은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그 여자가 아예 손톱 다듬기를 화장 전문가에게 제대로 배울 수 있도록 주선하였다. 환자는 강의를 열심히 듣더니 얼마 안 가서 병원 환자들의 손톱을 도맡아서 다듬었다. 그 여자는 새 사람이 되어 전문가의 관찰을 받으며 다시 사회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나중에는 개업을 하였고 일 년도 못 되어 생활의 기반을 잡았다. 왜 이 여자가 손톱 다듬기에 매료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런 사례를 정신분석학으로 그럴 듯하게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해석의 내용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여자가 인생의 어느 단계에서 손톱 다듬은 일을 하면서부터 어렴풋하게나마 몰입을 경험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탈리아 밀라노대학에서 파우스트 마시미니 교수가 이끄는 연구진은 ESM을 변형하여 괜찮은 진단 수단으로 만들었다. 그들은 개개인의 특성에 맞추어 개입을 시도했다. 그런 개입으로 활동의 틀을 바꾸면 환자가 더 행복해지리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어떤 환자가 늘 외톨이로 지내면 연구자들은 일이나 자원 봉사 활동에 그 사람을 자꾸만 끌어들여 남들과 어울릴 수 있게 했다. 대인공포증에 걸려 있는 사람이면 번잡한 도심을 함께 거닐거나 시끌벅적한 춤판이 벌어지는 곳으로 데려갔다. 환자는 안전한 병원과는 달리 불안한 상황에서도 의사가 옆에 있으면 다소 마음을 놓았고, 자기 삶을 개선시킬 수 있는 활동에 조금이나마 뛰어들 수 있었다.
창조의 재능이 있는 사람들은 어떤 일을 언제 누구와 같이 해야 최선의 결과를 얻을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으며 또 거기에 맞추어 자신의 삶을 엮어나가는 데 남달리 뛰어나다. 자연스러움과 무질서가 필요하다면 그들은 망설임 없이 그것을 받아들인다. 소설가 리처드 스턴이 묘사하는 하루 일과의 '리듬'은 그래서 귀기울일 만하다.
어디까지나 짐작이지만 다른 사람도 나와 리듬은 비슷하지 않나 싶다. 일을 하는 사람 이라면 누구나 틀이 있어서 혼자 있는 시간과 남들과 머리를 맞대는 시간을 정해 놓는다. 말하자면 일종의 스케줄을 짜는 셈인데, 이것은 단순히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만을 뜻하지 는 않는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오히려 생리 기능과 호르몬 기능을 가진 유기체인 자아가 외부 세계와 맺는 관련의 문제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다. 조간 신문을 예로 들자. 나는 아주 오래 전부터 아침에 신문을 읽는 버릇이 있었는데 몇 년 전부터 오전에 신문을 읽지 않기로 했다. 몇 해를 그렇게 하니까 하루의 리듬이 바뀌었다. 왜, 저녁이 되어 혈당이 떨 어지면 와인 한잔 생각이 간절해지지 않는가. 일에도 당연히 그런 리듬이 있는 법이다.
하루의 리듬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고독으로 들어가기와 고독에서 빠져나오기다. 사람은 혼자 있으면 우울하다가도 여럿이 모인 곳에 가면 다시 생기가 감돈다는 건 수많은 연구에서 확인된 결과다. 고립되어 지내는 사람이 행복을 느끼는 경우는 드물다. 의욕이 떨어지고 집중력도 저하되며 무기력해진다. 수동성, 외로움, 고립감, 열등감처럼 좋지 않은 감정의 상태가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많이 배우지 못한 사람, 가난한 사람, 결혼을 하지 않았거나 이혼한 사람같이 기댈 만한 언덕이 별로 없는 사람일수록 혼자 있으면 약해진다. 남들과 같이 있으면 크게 드러나지 않는 병리 증세도 혼자 있으면 불거진다. 심각한 우울증이나 식욕 장애가 있다는 진단을 받은 사람이 만일 남들과 같이 지내고 집중력을 요구하는 일을 한다면 건강인의 심리 상태와 구별하기 어렵다. 하지만 아무 할 일이 없을 때 그 사람의 마음은 우울한 상념에 점령당하기 시작하고, 의식 또한 혼돈스러워진다. 정도는 덜하지만 이것은 누구에게나 관찰되는 현상이다.
그 원인은 무엇일까? 아무리 낯선 사람이라도 남과 어울릴 때 우리의 주의력은 외부의 요구에 의해 구조화된다. 타인인 눈앞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목표를 제공하고 행동의 결과를 곧바로 알려주는 효과를 낳는다. 남에게 시간을 물어보는 아주 간단한 교섭도 어느 정도의 사교술이 동원되어야 하는 결코 만만찮은 행위다. 거리에서 처음 보는 사람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느냐 못 남기느냐는 목소리, 웃음, 몸짓에 크게 좌우된다. 친밀한 사이일수록 우리가 느끼는 어려움은 더욱 커질 수 있고 더 많은 정성이 필요할 수 있다. 이렇게 타인과의 교제에는 집중이 필요하다. 반면에 아무것도 하는 일 없이 혼자 있을 때는 정신력을 집중할 필요가 없어서 마음이 서서히 무너지고 무언가 걱정거리를 찾게된다.
보통 친구들과 같이 있을 때 가장 긍정적인 경험을 한다. 이럴 때 사람들은 자신이 행복하고, 빠릿빠릿하고, 붙임성 있고, 명랑하며 의욕적이라는 느낌이 든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10대에서 특히 그런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70대나 80대의 은퇴한 노인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우정의 중요성은 백번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자기의 고민에 귀기울여 주고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사람이 단 한 사람만 있어도 삶의 질은 이만저만 달라지지 않는다. 어떤 여론조사에 따르면 중요한 문제를 상의할 수 있는 친구가 다섯 명 이상 된다고 말하는 사람이 "아주 행복하다"고 말할 확률은 60퍼센트를 넘는다고 한다.
가족과 함께 지내는 경우 경험의 질은 중간 정도다. 친구들과 있을 때처럼 즐겁지는 않지만 혼자 있을 때처럼 죽을 맛도 아니다. 결과적으론 중간값이 나왔지만 여기에도 적지 않은 편차가 있다. 집에 처박혀 있는 것이 고역처럼 여겨지는 순간이 있는가 하면 내가 언제 그랬느냐 싶게 가정이 천국처럼 여겨질 때도 있다. 성인은 일을 할 때 다른 때보다 더 집중을 하고 머리를 쓰지만 집에 있을 때처럼 의욕을 느끼거나 행복감을 맛보지는 못한다. 아이들도 비슷하다. 학교에 있을 때와 집에 있을 때의 마음가짐이 어른처럼 다르게 나온다. 예를 들어 아버지는 자식과 같이 있으면 대개 즐거워한다. 아이들도 초등학교 5학년까지는 대체로 그렇다. 그런데 학년이 올라가면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아이들이 많아진다(적어도 중학교 2학년까지는 그렇다. 그 이상 학년에 대해서는 조사된 바가 없다).
여럿이 함께 있는 것이 경험의 질에 강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대인 관계에 정력을 쏟는 것이 삶의 질은 끌어올리는 지혜로운 방법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동네 술집에서 하나마나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시간을 때우는 것도 우울증에서 벗어나는 데는 확실히 효과가 있지만, 정말로 성숙해지려면 대화를 통해 자극을 얻을 수 있는 참신한 사고를 가진 상대를 만나야 한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가장 긴요한 것은 결국 고독을 견디는 능력, 아니, 고독을 즐기는 능력일지도 모른다.
하루의 삶은 집, 자동차, 직장, 길거리, 식당 같은 다양한 공간에서 펼쳐진다. 어떤 활동을 하느냐, 누구와 함께 있느냐 못지 않게,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도 우리가 갖는 경험의 질에 영향을 미친다. 10대 청소년은 어른의 간섭이 미치지 않는 공원 같은 장소에 있을 때 가장 편안해한다. 반면 학교나 교회처럼 남들의 기대에 맞추어 행동해야 하는 곳에서는 답답해한다. 어른들도 친구와 스스럼없이 어울리면서 마음놓고 지낼 수 있는 공간을 좋아하는 편이다. 여자들은 특히 더 그렇다. 오랜만에 가사에서 벗어났다는 해방감을 느낄 수 있다. 남자들은 사람을 만나도 직무와 관련된 일이 많아서인지 여자만큼 홀가분함을 못 느끼는 듯하다.
자동차를 몰면 자유로움을 느끼고 자신감이 생긴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그들은 자동차를 '사색의 기계'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운전을 하는 동안 자기의 문제에만 몰두할 수 있고 아늑한 고치처럼 그 안에서 감정의 갈등을 치유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시카고의 한 제철소 직원은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퇴근길에 차를 몰고 곧바로 미시시피 강으로 달려가 강둑의 야영장에서 두어 시간 머물면서 흐르는 강물을 말없이 지켜본다. 그리고는 차를 몰고 돌아오는데, 도착할 무렵이면 미시간 호에 동녘 햇살이 비치고, 그는 마음의 평화를 얻는다. 자동차가 화합의 장소로 쓰이는 가정도 적지 않다. 집에서는 부모와 아이들이 이방 저 방 뿔뿔이 흩어져서 갖자 다른 일을 하지만 일단 자동차에 오르면 함께 대화하고 노래 부르고 즐거운 놀이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방이라도 조금씩 다른 뉘앙스를 풍긴다. 그 안에서 이루러지는 활동의 성격이 다르기 때문이다. 여자가 집에서 가장 편안함을 느끼는 공간은 욕실과 주방이다. 욕실은 집안 식구들에게 시달리지 않는 자유로운 공간이며, 주방은 가장 자신 있고 또 그런 대로 즐거움도 주는 요리의 공간이기 때문이다(사실은 남자가 여자보다 요리하기를 훨씬 더 좋아하는 듯한데, 이것은 아마 남자가 요리를 하는 시간이 여자의 십 분의 일도 안 되고 또 기분 내킬 때만 요리를 해도 무방하기 때문이 아닐까).
살아가는 환경이 한 사람의 마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글로 쓴 사람은 많지만 그런 주제가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나온 경우는 의외로 드물다. 오래 전부터 예술가, 학자, 신비주의자는 평정과 영감을 낳을 수 있는 공간을 세심하게 골랐다. 불교 승려들은 갠지스 강 상류를 터전으로 삼았고, 중국의 학자들은 그림 같은 섬에 지은 정자에서 들을 썼으며, 기독교의 수도원은 전망 좋은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다. 지금도 웬만한 기업의 연구소는 물오리가 노니는 호수를 끼고 있거나 수평선이 바라보이는 탁 트인 언덕 위에 서 있다.
뛰어난 창조적 재능을 보여준 사상가와 예술가의 말을 믿어보자면, 마음에 드는 경관이야말로 영감과 창조력의 샘이다. 코모 호수를 낭만적으로 묘사한 프란츠 리스트의 글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나를 둘러싼 자연의 다채로운 모습이 영혼 깊숙한 곳에 정감을 불러일으킨 듯했고... 나는 그걸 음악에 담으려고 노력하였다." 1967년에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만프레드 아이겐은 전세계 과학자들을 초대하여 함께 스키를 타고 과학적 토론을 나누던 스위스 알프스의 겨울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통찰을 얻은 적이 많았노라고 술회한다. 보어, 하이젠베르크, 찬드라셰카르, 베테 같은 물리학자의 전기를 읽으면 만약 등산이란 거의 없고 밤하늘을 볼 수 없었다면 그들의 과학도 무르익지 못했으리라는 인상을 받게 된다.
경험의 질에 창조적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무슨 일을 누구와 하느냐 못지않게 어떤 여건에서 하느냐에도 신경을 써야한다. 산책과 휴가는 마음을 깨끗이 하고 관점을 바꾸며 자기의 상황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거추장스러운 물건을 버리고 자기의 취향을 살려 집이나 사무실의 분위기를 안락하고 편안하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타성에 젖은 삶에서 벗어나려는 사람이 가장 먼저 시도해야 할 일인지도 모른다.
바이오리듬이 중요하다, 월요일은 특히 스트레스가 많이 쌓이는 날이다, 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하루의 질감은 아침부터 밤까지 시시각각으로 달라진다. 이른 아침과 밤늦은 시간은 바람직한 감정이 깃들기 어렵다. 반면 점심 시간과 오후에는 바람직한 감정이 가장 활발해진다. 가장 큰 변화는 아이가 학교 교문을 나서거나 어른이 퇴근할 때 나타난다. 의식을 구성하는 모든 내용이 동일한 방향으로 변하는 건 아니다. 저녁 시간을 밖에서 보내는 청소년은 시간이 흐를수록 신이 나는 반면 스스로에 대한 통제감은 점점 사라진다고 실토한다. 여기서 말한 것은 어디까지나 전반적 추세가 그렇다는 것이고, 개개인의 차이를 무시할 수는 없다. 가령 아침잠이 없는 사람과 밤잠이 없는 사람은 시간을 활용하는 방식이 극명하게 다르다.
같은 일주일 안에서도 사람들이 싫어하는 요일이 있다고 하지만 대체로 사람들이 요일별로 느끼는 감정의 차이는 그리 크다고 볼 수 없다. 누구나 예상할 수 있겠지만 금요일 오후와 토요일은 일요일 저녁과 월요일 아침보다 조금 낫다. 하지만 그 차이는 예상 외로 크지 않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시간을 어떻게 설계하느냐다. 무위도식하는 사람에게는 일요일 오전이 괴롭게 다가오겠지만, 미리 약속한 일이 있거나 교회에 예배를 보러 가는 낯익은 행사가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일주일에서 가장 즐거운 날이 그날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눈에 띄는데, 그것은 사람들이 주말에 그리고 때로는 공부나 일을 하지 않고 있을 때 두통이나 요통 같은 몸의 이상을 호소하는 빈도가 확연히 늘어난다는 점이다. 암에 걸린 여성도 친구들과 같이 있거나 무슨 일인가에 빠져 있으면 고통을 견디지만 아무 일 없이 혼자 있는 시간에는 살인적인 통증을 느낀다. 정신이 구체적 과업에 쏠려 있지 않을 때 몸은 자기 안에서 벌어지는 현상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이것은 앞서 말한 몰입 경험과 같은 맥락이다. 박빙의 승부를 펼치는 체스의 고수들은 배가 고프거나 머리가 아파도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 시합에 나선 선수들은 시합이 끝나기 전까지 통증과 피로를 까맣게 잊어버린다. 정신이 다른 곳에 집중되어 있을 때는 사소한 아픔 따위는 의식에 기록될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한다.
이 경우에도 역시 어떤 리듬이 나 자신한테 가장 맞는지를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 누구에게나 좋은 요일이나 시간은 정해져 있지 않다. 반성 시간을 가지면 자신의 취향을 알아내는 데 도움이 된다. 더 일찍 일어난다든가 오후에 낮잠을 잔다든가 식사시간을 바꾼다든가 하는 식의 다양한 실험을 시도하는 것도 최선의 리듬을 파악하는 데 유익하다.
이제까지 든 예에서 우리는 마치 사람은 무엇을 하고 누구와 같이 있고 어디에 있는가에 따라 그 내면이 영향을 받는 수동적 대상인 것처럼 말했다. 일면 타당한 구석도 없지 않지만,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외부 조건이 아니라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이용하는가다. 집에서 혼자 살림을 하면서도 행복을 느끼고, 직장에서 의욕적으로 일하고, 아기와 대화에 몰입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바꾸어 말하면 눈부신 일상 생활은 결국 무엇을 하는가가 아니라 일을 어떻게 하는가에 달려 있다.
머리에 담긴 정보를 바꿈으로써 경험의 질을 곧바로 조절할 수 있는 가능성을 고찰하기 전에 장소, 사람, 활동, 시간대 같은 일상의 환경이 가지는 영향력을 먼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탈속을 하여 아무리 내공을 깊이 쌓은 수도자에게도 유독 마음이 끌리는 나무가 있고, 유달리 맛있는 음식이 있으며, 왠지 가까이 가고픈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하물며 보통 사람인데, 자신이 몸담고 살아가는 상황에 얼마나 많이 좌우되겠는가.
그러므로 삶의 질은 끌어올리려면 먼저 우리가 매일 하는 것을 세심하게 관찰하여 어떤 활동, 어떤 장소, 어떤 시간, 어떤 사람 옆에서 우리가 어떤 감정을 느끼는가를 포착해야 한다. 식사시간에 행복을 느낀다든가 여가를 적극적으로 즐기는 동안 곧잘 몰입 경험에 이르는 것은 누구에게나 확인되는 성향이지만, 우리는 여기서 의외의 사실을 발견할 수도 있다. 우리는 실은 혼자 있는 것을 더 좋아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뜻밖에도 일하기를 더 좋아했는지도 모른다. 텔레비전을 보는 것보다 책을 읽는 데서 더 큰 즐거움을 맛보았는지도 모르며 혹은 그 반대인지도 모른다. 이처럼 인생은 이런 식으로 살라고 누가 정해 놓은 규칙이 있는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나에게 맞는 삶의 방식을 찾아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