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의 당신은, 어제 그곳의 그녀입니까?
배수아의 최근 소설이 지속적으로 문제 삼고 있는 것 중에 하나는 '너'와 '나'라고 하는 동일성과 분별, 또는 남성, 여성, 한국인, 외국인, 동성애, 이성애 등을 분별 짓는 모든 경계들의 허구성이다. <훌>(문학동네 펴냄)을 비롯한 몇 편의 작품들에서 보이는 그녀의 난해하고 불분명한 서사는 '스토리텔링'을 거부하는 그녀의 태도에서도 비롯되지만, 고유성을 담보하는 분명한 명칭들을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데서 발생한다.
너/나, 남성/여성, 내국인/외국인, 사실/의식, 과거/현재 등으로 구분된 우리들의 단단한 세계에 강력하게 항의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그녀의 소설은 대체로 '탈영토화'의 이름으로 논의되곤 했는데, 최근 출간된 <서울의 낮은 언덕들>(자음과모음 펴냄)은 이러한 문제의식이 가장 적극적으로 표명된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배수아는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닌, 혹은 한국인도 아니고 독일인도 아닌, 혹은 이성애자도 아니고 동성애자도 아닌, 뚜렷한 정체성을 갖지 못한 분절된 목소리, 분열된 자아, 익명의 목소리로 무엇을 얘기하고자 하는 걸까. 그것은 의식적으로 실험된 작품들에서 저마다의 독특한 의미의 자장을 이루고 있지만 이 작품에서는 좀 더 실존적인 고통과 철학적 사유를 보여준다.
이 소설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존재의 중첩'이다. 존재의 중첩은 두 가지의 방향에서 사유된다. 하나는 공간적 측면에서, 또 하나는 시간의 부정을 통해. 주인공 경희는 오래 동안 거주했던 도시를 떠나 베를린으로 향한다. 그녀의 동선은 비엔나로 이어지는데, 그녀가 다른 도시들을 체험하면서 느끼는 것은 모든 도시들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 서로 관통하면서 중첩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도시를 하나하나 지나쳐서 걸어가다 보면, 이 모든 다른 얼굴과 자태의 도시들 사이를 관통하는 보이지 않는 시공의 혈관이 있어서, 그것은 일종의 정신의 공항 같은 것인데, 그것을 통해서 도시들이 동시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별개인 도시들이 실제로는 아주 완전히 별개의 것이 아니라 서로 마주치고 관통하며 때로는 무의식 중에 겹쳐질 수도 있음을. 이 생과 저 생도 마찬가지겠지. 내가 아직 이 생에 완전히 도착하기 전에, 전차가 내 최후의 육신 위를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는 생각과 함께, 그리고 우리는,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 나 자신을 온전히 바치기 위해서, 반드시 온 정신을 한곳으로 집중할 필요가 없을지도 몰라 내가 나에게 집중하면 집중할수록 나는 점점 파생하고, 또 그런 생각을 하면 할수록 나는 동시에 수많은 자아로 분열되면서 아득해지지. (…) 살아갈수록 나는 점점 희박하고 점점 퍼져나가며 다중적인 우주의 일부로 넓게 스며든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뿐이야. 그래서 마침내는 나 스스로가 온 세계의 지평선이 되고 말거야. 그런 순간이 올 거야. (116~117쪽)
▲ <서울의 낮은 언덕들>(배수아 지음, 자음과모음
펴냄). ⓒ자음과모음
위 인용문에서 경희는 '모두'이면서 동시에 '하나'인 도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경희는 애초 고향 같은 도시를 떠나면서 줄곧 하나의 도시에서 살았던 자신이 "수 겹의 성벽과 군대와 가시창살 같은 도시 성벽을 이루는 하나의 단단한 벽돌"이 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을 어떤 특정한 장소로부터 분리시키고 단 하나의 좌표라는 물리적 고유성을 분열시키고자 하는 열망"으로 도시를 떠난다. 그 고유성을 지나 다른 고유성을 지닌 도시들을 거치면서 경희는 애초에 그녀가 열망했던 바, 모든 고유성에서 이탈한 '방랑'하는 영혼을 갖게 된다. 이 방랑 의식은 도시들의 경계를 없애버림과 동시에, 카라코룸이라고 하는 하나의 독특한 공동체 의식으로 연결된다.
비엔나의 친구 마리아가 가입했다고 하는 '카라코룸'이란 집을 공유하는 회원들로 방랑자들에게 서로의 집을 제공하는 단체를 의미한다. 카라코룸에 가입했다는 것은 전 세계에 잠자리를 갖게 되었다는 것이고 동시에 자신의 고유한 집 또한 타인의 집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배타성을 제거한 이 우주와 같이 무한히 열린 '집'이란, 단순히 방랑 의식이라는 공간적 상징성을 갖는 것만이 아니라, 위의 인용문에서 '우주의 지평'으로 암시되는 '무아(無我)'를 뜻한다.
즉, 집의 개방과 더불어 열리는 전 세계에 걸친 집의 소유란, '수많은 자아로 분열'되면서 점점 퍼져나가고 스며들면서 '우주의 지평선'이 되어버린 '나의 없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방랑과 '자아의 해체, 혹은 와해'가 갖는 긴밀한 관계는 "수많은 산과 강을 넘어 어느 정도 이상의 시간과 지리적 한계에 다다르게 되면, 내가 바로 지금의 나 자신이며 나 자신의 의식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배타적이고 유일한 사실이 되지 못하리라"와 같은 문구를 통해 거듭 강조되고 있다.
한편, 배수아는 시간의 연속성과 순차성에 부정에 대해 보르헤스의 '틀뢴'의 개념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 개념에 따르면 "미래란 오직 우리ㅡ이 현존하는 공포심과 희망을 입고 있는 형태로서만 실제이며, 과거는 기억이라는 상상의 형체로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실재하는 것은 단지 수분 전에 창조된 현재이며 모든 미래와 과거가 환상에 불과하다는 이러한 사고는 또 한편, 정체성에 대한 부정에 다름 아니다. 나의 기억이 환상에 불과하다면, 그리고 (좀 더 보르헤스적 시간 개념을 확장시켜) 나의 미래 또한 이미 만들어진 과거의 출연에 불과하다면, 우리는 '나'의 기원과 후손, 선조라는 연쇄적 고리에서 어떤 '필연'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배수아의 이러한 시간의 연속성과 순차성에 대한 부정은 곧 부모와 나의 직선적인 관계는 물론 '나'라는 개별성을 부정하게 된다. 하여, 이 소설의 마지막에 경희의 딸로 등장하는 '나'라는 인물과, 경희는 단, 한 명의 아이를 낳지 않았다는 이 기묘한 모순이 가능하게 된다. 즉, 배수아의 전언에 따르면, 우리는 무의지적인 부모의 모든 아이들이고, 그 아이들인 우리들은 이미 모든 과거와 미래를 살아버린 부모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간과 공간에 인식은 모든 존재들에서 '나'를 보고, '나'에게서 모든 존재를 읽는 '존재의 중첩'이라는 이 소설의 독특한 사유를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경희는 베를린의 안경 쓴 승려에게서 느닷없이 달라이 라마를 보거나, 옐리네크를 목격하거나, 혹은 자매에게서 '나'를 감각하거나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순환적 시간, 동시적 공간'이라는 이 소설의 화두는 인간이라는 '유전자'가 몸담고 있는 시간과 공간의 거대한 원환에 대한 전 지구적 맥락에 대한 신화적 탐색일까.
이 소설은 지극히 불친절한 서사로 이루어졌지만, 전혀 이야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 작품에서 애초에 경희의 베를린 행은, 한때 그녀의 독일어 선생이었던 남자가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 여행을 '걸어서' 하겠노라는 경희의 결심은 비록 하루 만에 그친 것으로 묘사되지만, 경희는 그 '걸어간다는 것'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고 있다.
"육신의 맹목적인 진지함이었을 거예요. 순수하고도 직접적인 진지함, 나는 그것을 바랐던 것입니다.(…) 그래 나는 걸어서 그곳으로 가겠어. 왜냐하면 걸어간다는 것은 일종의 비언어적 정당성을 획득하는 유일한 방법이고, 지금 이 시대에 행할 수 있는 가장 나 자체인 것이며, 마음과 육체를 모두 포괄하는 전체적인 묘사라고 생각되었으니까요." (22~23쪽)
경희의 이러한 핍진한 결심은, 그녀에게 '독일어 선생'이 갖고 있는 의미를 짐작하게 한다. 독일어 선생은 그녀에게 '온 몸과 마음으로, 순수하고 경건함으로 다가가야 할' 생의 중요한 의미였던 것이다. 그녀는 그 여정에서 독일어 선생과 동일인으로 짐작되는 '미스터 노바디'라는 작가와의 사랑을, 또 그의 아들인 반치와 비엔나의 마리아를 만나게 된다.
그러나 이 모든 여정의 귀결은, 결국 앞서 언급한 '존재의 중첩'에 대한 제시로 귀결된다. '나'는 모두이면서 동시에 아무도 아닐 수 있다는 이 존재의 중첩은, '수취 불명의 편지의 운명'으로 암시된다. 이 이야기의 에필로그에 해당하는 뒷부분은 '우리'라는 화자가 서울에서 경희를 찾아다니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작품의 서두에서 등장한 '우리'라는 화자와 동일한 그 '우리'인데, 그 우리들이 경희를 찾아 나선 데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다.
경희는 베를린의 치유사의 집에 머물면서 미스터 노바디에게 자신의 '베를린 주소'를 전한다. 경희가 베를린을 떠난 뒤, 우리들은 편지의 복사본을 받게 되는데, 그 편지의 송신자는 심장마비로 죽은 미스터 노바디, 수취인은 경희이고, 주소지는 경희의 '베를린 주소'이다. 그러나 그 편지는 우여곡절을 거쳐 베를린에서 한국으로, 다시 베를린으로, 상하이를 거쳐 중앙아ㅣ아의 수도 등을 거쳐 '수취인 불명'이라는 스탬프와 함께 다시 베를린의 주소로 되돌아온다.
2년이 지난 뒤 망자의 편지를 받게 된 '우리'는 경희에게 직접 전해주어야겠다고 결심하고 한국으로 날아온다. 경희가 독일에서 알았던 교포로 짐작되는 '우리들'은 한국에서 '낭송극 배우'라는 사실을 근거로 경희를 찾아다니지만 끝내 그녀를 찾지 못하고 만다.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경희에 대한 구체적인 사실들을 점차 희미하게 느끼게 되고, 어떤 속삭임에 의해 '경희의 없음을, 경희가 중단되고, 경희가 그치고, 경희가 잦아들고, 성분 융해되고, 낮은 언덕의 형태로 흘러내렸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즉, 수취인 불명이란 이 편지의 운명처럼 베를린의 어느 곳에 분명히 존재했던 경희란 이미 존재하지 않는 '흔적'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 없음은 사라짐이 아니라, 모든 존재에 희미하게 스며들었다는 것, 즉 보이지는 않지만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은 '경희가 낮은 언덕의 형태로 흘러내렸다'는 시적인 문구로 비유되고 있는 것이다.
경희의 없음과 경희의 편재, 이 모순적인 사실에 대한 인식은 사실, 경희가 사랑한 미스터 노바디의 없음에 대한 비통한 애도를 뜻한다. 경희가 결심한 애초 '걸어서'의 의미가 앞서 "수많은 산과 강을 넘어 어느 정도 이상의 시간과 지리적 한계에 다다르게 되면, 내가 바로 지금의 나 자신이며 나 자신의 의식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배타적이고 유일한 사실이 되지 못하리라"라는 것이었다는 데서 짐작할 수 있듯, 그리고 이어진 "그렇다면 부질없음을 알면서도 결코 사라지지 않은 이 욕망의 정체는 무엇인가. 자기 자신이고자 하는 욕망, 자기 자신이 원하는 것을 원하고자 하는 이 애처로운 욕망. 그건 형태를 바꾸며 되풀이 되는 영원한 성질과 같은 거야."라는 고백에서 알 수 있듯, 배수아의 이 힘겨운 고투는 결국 고유한 어떤 욕망에 사로잡힌, 동시에 지독한 어떤 고통에 짓눌린 '나 자신'이 되지 않고자 하는 노력으로 볼 수 있다.
욕망과 고통이, 그리고 존재의 현존이 단지 고유한 '나'라는 육체에게 귀속된 것이 아니라 모든 육체에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하나의 '영원한 성질'에 불과하다면 '나'의 욕망과 고통은 부질없음이라는 것. 그것이 바로 배수아의 이 애끓는 비가가 전하는 생의 위안인 것이다. 그것은 배수아가 앞서 <올빼미의 없음>(창비 펴냄)에서 보여준 죽음에 대한 단말마적인 비명과 같은 맥락에 있는 것으로, 주체의 고유성을 부정하고, 육체를 부정하고, 경계를 부정하는 이 없음의 전략은 결국 '있음'을 역설하는 논리일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경희의 직업이 목소리 배우, 즉 낭송극 무대 배우라는 사실과도 연관되는 것으로, 육체 없이 목소리로 존재를 드러낸다는 이 희귀한 존재론은 숱한 죽음과 부재 뒤에 남은 흔적으로서의 존재론을 암시하는 것이다.
경희를 찾아 나선 '우리'는 실체로서 경희를 만나지 못했지만, 그들이 만난 경희의 목소리처럼 경희는 세상에 미만해있다. 육체와 의식이라는 고유한 주체성을 뛰쳐나와 부스러진 형태로, 즉 '낮은 언덕들'로 말이다. <서울의 낮은 언덕들>은 이렇듯 사랑하는 연인의 '실체 없음'에 대한 고통을 '존재의 편재'라는 역설로 뒤바꿔놓은 사랑하는 '주체'의 절규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 작품 곳곳에서 언급하고 있듯, 가난하고 무력한 도시인들에 대한 애가이기도 하다. 미스터 노바디와 반치와의 대화에서 자주 강조되고 있듯 고대어와 신화의 세계를 이어받지 못한 도시인들은 '도시인'이란 옷을 벗는 순간, 그야말로 시민증을 빼앗긴 난민이나 마찬가지이다. 도시인의 익명성과 획일성은 도시라는 거대한 기계에 잘 들어맞는 기능성을 지니고 있지만, 돌아가 의탁할 곳 없는 영혼의 동굴을 갖지 못한 종족은 "기계 사회의 프롤레타리아"이다. 벤야민 식으로 말하자면, 존재의 전체에 해당하는 긴 경험을 갖지 못한 도시인들은 순간의 파편적 '체험'에 의해 동강난 가난한 영혼들이고 새로운 프롤레타리아인 것이다. 따라서 <서울의 낮은 언덕들>은 그 은거할 곳 없는, 헐벗은 도시인들에 대한 애가이기도 하다. 그것은 반치의 비판에서처럼 마오이스트, 신비주의자, 반정부단체, 환경주의자와 추상적인 이름을 띠었다 붙였다 하면서 살아가는 집 없는, 즉 토착성을 잃어버린 도시인들에 관한 이야기인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이 소설에는 하나의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등장하는데, 이는 대량의 죽음 공장인 병원에서 나와 죽음만은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자 뛰쳐나온 어떤 남녀의 이야기이다. 죽음의 공장을 벗어난 대신 이들은 사막에서 육체의 고통을 온전히 자신이 짊어지는데, 결국 이들은 육체를 벗어나 기억과 의식으로 존재하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존재'란 반드시 육체를 집으로 해서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에 대한 암시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제껏 독창성, 개별성을 향해 질주해왔던 배수아 소설의 새로운 징후이기도 하다. 대중성, 획일성, 공동체 등을 거부한 채 오로지 특이성(singularity)을 향해 달려온 배수아가 이른 곳이 존재의 중첩과 보편성이라니.
시공간은 물론 육체를 벗어나 존재하는 존재론을 탐색하고 있는 <서울의 낮은 언덕들>은 역설적으로 '오줌과 피'로 이루어진 이 핍진한 삶에 대한 고통스런 고백이자 초월적 기도로 읽힌다. 무엇보다 이 작품에서 사랑을 잃고 우는 여인의 슬픈 얼굴을 보게 되는 것은 어이된 까닭일까.
/정은경 문학평론가
'평론과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권혁웅- 시와 다성성(多聲性) (0) | 2012.03.02 |
---|---|
신형철<이렇게 헤어짐을 짓는다> (0) | 2012.02.25 |
단 한권의 소설책 - 백년 동안의 고독 (0) | 2012.02.02 |
부러진 화살 <최종병기 법정을 찾아서> (0) | 2012.01.30 |
시를 읽지 않는 자, 모두 야만인! (0) | 2012.01.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