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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 속 희망

미송 2009. 4. 16. 23:56

전쟁과 죽음을 초월한 사랑 실천하는 김혜자
아프리카 남부 수단의 황폐한 사막 속 희망을 발견하다

지난해 김혜자는 드라마 ‘엄마가 뿔났다’로 KBS연기대상과 백상예술대상을 동시에  거머쥐는 등 배우로서 매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그런 그녀가 올해 들어 가장 먼저 계획한 건 아프리카의 아이들을 만나는 것이었다. 배우 김혜자의 또 다른 얼굴인 ‘난민들의 어머니’가 되기 위해서였다. 영화 ‘마더’의 촬영이 끝나자마자 곧장 아프리카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던 그녀. 지난 3월 9일부터 15일까지 아프리카 남부 수단, 그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지역인 톤즈와 티엣을 다녀왔다.


연이은 작품 활동으로 1년 반 동안 찾지 못해 그곳의 아이들이 눈에 아른거렸다는 김혜자. 구호활동은 그녀에게 있어 당연한 일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촬영을 끝내고 기력을 차리기도 전에 서둘러 아프리카에 다녀온 그녀는 아직 여독이 풀리지 않았는지 꽤나 피곤한 기색이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무척이나 고된 여정이었다는 걸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보냈던 여정을 돌아보는 그녀의 표정만큼은 참 행복해 보였다.
“이제야 피곤이 밀려오나 봐요. 3월 15일에 인천공항 도착하고, 이제 나흘째 되는데 졸음이 밀려오는 게 실감이 나네요. 이번처럼 다시 떠나기까지 기간이 길어진 건 처음인 것 같아요. 연극 ‘다우트’와 드라마 ‘엄마가 뿔났다’ 끝나고 영화 ‘마더’ 촬영이 바로 이어지는 바람에 꼼짝할 수가 없었거든요. 무엇보다 아이들이 마음에 걸렸어요. 수단이 오랜 내전으로 문제가 참 많은 곳이잖아요. 안타까운 소식이 들리면 더 빨리 가봐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든답니다. 이왕 가는 거 하루라도 빨리 가야겠다고 생각해서 촬영 끝나자마자 얼른 다녀왔습니다.”
그녀가 다녀온 아프리카 수단, 그중에서도 남부지방은 의료지표, 인간개발지수가 세계에서 가장 낮은 곳이다. 열악한 시설로 피폐해진 어린이들의 영양실조, 신생아와 산모의 사망률 등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곳으로 향하는 여정 역시 비행기로만 이틀, 또 경비행기로 갈아타고, 차로 몇 시간씩 비포장도로를 더 달려야만 했다. 허리까지 안 좋은 상황이었지만,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를 아이들의 얼굴을 내내 떠올리며 진통제를 먹고 견뎌냈다.

 

아름다운 상상하며 떠났던 첫 아프리카행

“정말 아프리카는 다 똑같은 것 같아요. 왜 그렇게 끝없이 내전이 일어나고 서로들 싸우는지…. 그렇게 해서 가장 피해를 입는 건, 어린아이들과 여자들이죠. 이번에 갔던 남부 수단도 워낙 지하자원이 많아서 열강들이 가만 놔두질 않나봐요. 가기 전에 수단이라는 나라에 대해 찬찬히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내가 이걸 다 알아서 뭐할까’라고. 누군가 화살에 맞았을 때 그 화살이 어디서 날아왔는지, 누가 쐈는지 아는 것보다 중요한 건 누군가 다치고 죽어가고 있는 현실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 거 따지지 말고 그저 배고파서 죽어가는 아이들에게 밥 먹여주고, 800원짜리 항생제 하나가 없어서 다리를 잘라내고 실명하기도 하는 아이들을 도와주는 게 시급하다는 것이죠. 다행히 이번에는 SBS ‘기아체험’에서 동행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아이들의 상황을 알려줄 수 있게 됐어요. 그렇게라도 알리고 성금이 걷히면, 거기까지가 제가 도와줄 수 있는 몫인 거죠.”
그녀가 18년째 친선대사로 활동하고 있는 월드비전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고아와 미망인들을 돕기 위해 설립된 단체다. 이 단체의 도움으로 우리나라는 전쟁의 참상 속에서 많은 희생자들을 살려냈고, 이제는 도움을 받던 나라에서 도움을 주는 나라로 전환하게 됐다. 그녀가 처음으로 아프리카와 인연을 맺은 것이 바로 그 즈음이다.
“‘사랑이 뭐길래’가 막 끝났을 때였어요. 대학을 졸업한 딸과 유럽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뜻밖의 제안을 받게 됐죠. 아프리카라고 하니까 영화 ‘녹색의 장원’에서 넝쿨이 휘감긴 수많은 나무들 사이를 요정처럼 뛰어다니던 오드리 헵번도 생각나고, 원주민의 안내를 받으며 그곳을 여행하는 제 모습이 막 상상되는 게 나쁘지 않겠다 싶었어요. 이토록 엄청난 게 기다리고 있을 것이란 생각은 전혀 못했죠.”
그녀가 처음 갔던 곳은 에티오피아. 한국전쟁 당시 아프리카 유일의 참전 국가였지만, 어느새 최빈국으로 떨어져버린 그 나라를 먼저 돕자는 마음으로 가게 됐다. 도착해보니,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야말로 참혹 그 자체였다. 사흘, 나흘씩 굶은 아이들은 말라리아에 걸려 소리조차 지르지 못할 정도로 기력이 없었다. ‘지옥이 있다면 이런 곳이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10일 동안 울고 다녔다.
“처음 다녀왔을 때, 합동 기자회견을 열어주실 정도로 많은 관심을 받았습니다. 영상으로 전해진 것이지만 저만큼이나 많이들 놀라셨죠. 반면에 우리나라도 못사는데 왜 그곳까지 갔냐는 분들도 많았어요. 하지만 세 끼를 못 먹고 두 끼를 먹는 것과, 사나흘씩 못 먹어서 굶어 죽는 것은 비교할 수가 없다고 생각해요. 굶어서 죽는다는 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에게도 굶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몸소 경험해보도록 ‘기아체험’을 시키는 거잖아요. 여력만 된다면 각 지역 통장, 반장들을 데리고 가고 싶어요. 그렇게 해서라도 더 많이 알려주고 싶어요. 제가 본 것들을 일일이 다 말해줄 수가 없으니까요.”

다시 만난 소녀, 에꾸아무

에티오피아를 시작으로 소말리아, 르완다, 방글라데시, 라오스, 베트남을 거쳐 인도, 케냐, 북한,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이번 남부 수단에 이르기까지 18년간 그녀는 끊임없이 아이들을 찾았다. 처음에는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마음이 아파 울고만 다녔던 그녀도, 어느 순간부터 우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뭘 해줄 수 있을까 생각하며 아이들에게 좀 더 현실적인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그녀지만, 이번 방문에서는 다시 한 번 울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고.
“가느다란 다리를 가진 두 살짜리 아기를 봤어요. 엄마는 아기를 낳다가 죽고, 아빠는 전쟁에서 죽어서 삼촌이 맡아 키우고 있었죠. 삼촌 품에 꼭 안겨서 고개도 못 가누고 있는 아기를 보니 눈이 죽어가는 것처럼 힘없이 흔들리고 있더라고요. 어떻게 해줄 수가 없는 현실이 너무 참혹하게 느껴졌어요. 살아서 무슨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겠느냐만, 꼭 건강하게 살아줬음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어른이 되어서 스스로 재미가 없는 세상임을 느끼는 것과 그냥 힘없이 죽는 건 다르잖아요. 그런 생각이 드니까 절로 눈물이 흐르더라고요.”
매번 방문 때마다 어느 하나 기억에 남지 않는 아이가 있을까 싶지만, 그녀는 몇 해 전 다시 만났던 에꾸아무라는 소녀를 떠올렸다. 가뭄으로 황폐해진 케냐의 어느 마을, 허름한 움막 안에서 어린 동생을 돌보던 소녀를 7년 만에 다시 만났던 것. 유목민이라 결코 찾기가 쉽지 않았지만, 그녀의 책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에 실린 사진을 찢어간 어느 봉사자의 도움으로 어렵게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동안 많은 구호단체들이 왔을 텐데 절 알아보는 에꾸아무를 보니 너무도 신기하고 반가웠어요. 절 보면서 몸을 비틀고 우는데, 꼭 ‘왜 이제야 왔냐’는 것 같더라고요. 다시 만나러 오겠다고 했던 걸 정확하게 기억하는 걸 보면서 그때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면 큰일 났겠구나 싶었어요. 어렵게 만났던 만큼 더 큰 도움을 주고 싶었어요. 예전에 학교에 다니고 싶어했던 게 기억나서 도와주겠다고 했더니 별로 좋아하지 않더라고요. 자기가 학교를 다니면 밑에 두 동생들 먹여 살리려고 엄마 혼자서 일해야 하기 때문이래요. 그래서 밑에 동생들까지 세 명 모두 학교에 보내준다고 했더니 그제야 웃더군요. 그때까지 결연을 맺은 아이들이 100명이었는데 덕분에 103명으로 늘었어요.”
그녀와 인연을 맺은 아이들은 그녀 덕분에 스스로를 가눌 수 있을 때까지 의료혜택과 교육을 받고 자라게 된다. 이렇게 멀리서나마 금전적인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직접 찾아가 보듬어주고 그곳의 실상을 알리는 데도 힘쓴다. 온 사방이 벌레로 가득하고, 들쑥날쑥한 온도에 수시로 모래바람이 불어대는 그곳에 있으면 그녀 역시 제대로 씻지도 먹지도 못하는 힘겨운 날들을 보낼 것이라는 걸 너무도 잘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볼 때가 됐는데 못 보면 불안하고 안절부절못하기에 자신이 먼저 아이들을 찾는다. 마치 일종의 중독현상 같다.
“이번에는 너무나 오랜만에 가는 것이라 가기 전부터 마음이 설레요. ‘얼마나 좋은 걸 보려고’가 아니라, ‘얼마나 기가 막힌 상황에 처해 있는 아이들일까. 가서 무엇을 도와줄 수 있을까’란 생각이 들어 일종의 강박처럼 빨리 가야겠다는 마음이 든 것이죠. 아이들 보러 다니는 것도 중독의 형태가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어요. 이런 저를 보고 주변 사람들은 나쁜 일에 중독된 게 아니니 괜찮다고 하더라고요.(웃음)”

 

이들을 위해 최고의 자리를 지켜야

그녀에게 봉사는 이제 피할 수 없는 운명과도 같지만, 처음부터 이 길을 걸으리라 마음먹은 것은 아니었다. 처음 에티오피아에 다녀온 그녀는 지옥과도 같은 그곳을 다시 갈 자신이 없었다. 긴 잎으로 덮여 있는 건 어른의 시체이고 자그마한 잎으로 덮인 건 아이의 시체였던 그곳은 떠올리기만 해도 무서웠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를 다시 그곳으로 이끈 건, 한 통의 전화였다.
“에티오피아에 다녀온 후, 구로공단에서 일한다는 어떤 아가씨로부터 전화를 한 통 받았어요. 소년소녀 가장을 도우려고 8만 원가량 저금해놓은 게 있는데 제가 다녀온 걸 보고 그 돈을 아프리카로 보내야겠다고 말하더라고요. 그때 ‘이 아가씨가 내 등을 떠미네’라는 생각부터 들더라고요. 근데 이후로 이상하게도 자꾸 애들 생각이 났어요. 영어도 모르면서 AFKN을 틀어놓고 에티오피아 소식을 들으려 애썼고, 그곳의 시체들이 자꾸 떠오르는 게 어쩌면 그 전화가 하늘에서 나에게 사인을 준 게 아닐까란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나이기 때문에 이런 참상을 알릴 수 있다고 생각하니 책임감도 생기고…. 참 사는 게 웃긴다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한국의 어머니상’ ‘진정한 배우’ 등 화려한 수식어와 함께 언제나 최고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녀. 앞으로도 그 자리를 유지해야 하는 건, 비단 본인을 위해서만이 아니다. 살아있는 동안 늘 사랑받는 배우로 남아야 하는 건, 그것이 난민들의 참상을 좀 더 잘 알릴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인기가 없고 사람들로부터 관심을 얻지 못하는 배우라면 이런 활동에 대해 눈길도 주지 않을 것이고, 도움의 손길도 쉬 닿지 않을 것이라는 걸 잘 알기에 그녀는 죽을 때까지 사랑받는 배우여야 한다고 다짐한다.
“그곳에 다녀와서 얼마 안 됐을 때였어요. 시차적응 때문에 낮잠을 자다가 꿈을 꿨는데, 장미꽃이 여러 송이 피어 있더라고요. 그중 하나가 이만큼 커지더니 갑자기 아이들 얼굴로 변하는 거예요. 뱅글뱅글 돌며 웃기 시작하는데, 저는 ‘예쁘다 예쁘다’ 하면서 어찌나 울었는지…. 잠에서 깨서도 한동안 생각나더라고요. 그 예쁜 아이들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있겠죠?”
긴 연기 인생 동안 그녀가 늘 최고의 자리에 머무를 수 있었던 것도 그 순간만큼은 모든 것을 버리고 그 역할로 살아가는 투철함 때문일 것이다. 많은 이들로부터 받은 사랑을 좋은 연기로 보답하는 그녀. 다음 활동이 무엇이 됐건 간에 그녀는 또 최고의 작품과 최고의 연기를 보여줄 것이다. 그것이 아이들을 돕는 또 하나의 방법이기에.

취재 박주선 기자 사진 신승희·월드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