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령, 만날 수 없다해도 / 오정자
저녁 다섯 시 반에서 여덟시 사이 예진이와 술래잡기를 합니다
퇴근하는 엄마를 기다릴 시간이거든요 날 찾아 봐 하는 소리에
완두콩들 쪼르륵 앉았다 가고 마야Maya도 폭신 잠들다 가고
초록 콩알들 한 껍질 속에 눕는 동화童話 펼쳐지는 저녁이면
떠났던 사람들 돌아옵니다 피라미드 속 이끼와 별 사이의 섬을 건너
태양을 실은 마차가 도착할 무렵까지
책을 읽고 하품도 하다 사랑 이야기도 나눴죠
나와 우주가 숙취宿醉의 얼굴로 서로를 콩알아 콩알아 불렀죠
그 순간 대답 없던 동자童子 하나 지나갔어요
그랬어요 찾을 것 없다 위로하던 한 통속 것들이란
2009 겨울.
시를 정리하자니 유난히 술래잡기를 좋아했던 예진이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언니와 함께 저녁시간대에 돌봐준 적이 있던 아이인데, 딸을 못 키워본 것에 대한 보상심리로 인해 많이 끌렸던 것 같아요. 맞벌이 시대에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저녁밥을 먹거나 늦은 귀가의 엄마 아빠를 기다려야 하죠. 책을 좋아했던 언니는 가끔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피그말리온 이야기를 했어요. 목각인형이 여자로 변신하려면 과정이 있는데, 마지막 단계는 목각인형을 껴안고 하룻밤 자야 한다는 거였죠. 역시 언니였어요. 남의 집안을 들여다보는 일은 두려움도 따르지만 사는 게 비슷하다 생각하면 진심으로 돕고 싶어지기도 하고, 情도 들고 그래요. 마치 아이들의 엄마가 된 듯 이모나 고모라도 된 듯, 한 가족이 된 느낌도 생기죠.
아무것도 아니지만 모든 것일 수 있는 사랑이란 현실의 경의敬意감으로부터 출발하던가요. 사랑의 종류를 불문하고 또한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궁극에는 푸른 완두콩으로 돌아가는 일, 우리 모두의 일이죠. 가족이란 개념이 성립되려면 한 인간의 의지표명이 필요합니다. 육안으로는 둘 셋 다수이지만 분명 홀로서기에 성공한 구성원의 자기희생과 연민의 정이 새겨져야 하죠. 그것은 어느 달콤한 말보다 강력하고 지속적이고 뜨겁기도 합니다. 설령, 그런 사람들끼리는 매일 만나지 못하더라도 언젠가는 영영 헤어지더라도, 신앙처럼 굳건한 경의敬意와 기쁨은 영원히 남겨질 거 같아요.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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