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자는 친절하지 않았다
가슴 열고 한 조각 남은 체온이라도 나눠보자고 약속했던 사람이 어느 날 가슴이 아니라 아예 뚜껑을 열어젖히고 난동을 부리다 돌아갔을 때,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마음을 주워 담기란…….
문득 깨진 거울조각에 비추이는 얼굴을 본다. 정체불명이다.
분노에 녹아버린 마스카라와 벌겋게 그린 삐에로의 입술은 웃는지 우는지 분간하기 어렵다. 잃어버린 퍼즐을 찾을 때처럼 난감하다. 죽은 세포들이 혈관을 타고 돌아다니다 결국은 암이라는 사망선고가 내려질 때 의사의 본분은 찢고 도려서라도 죽음을 제거하려 할 것이지만, 반대로 열었던 부분을 슬며시 닫아버리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가슴을 열고 싶었지만 도로 가슴을 닫아주고 싶은 때가 있다. 간격과 은폐가 오히려 우리를 구원하는데 유익하다.
박 찬욱감독의 친절한 금자씨를 보았다.
올드보이를 만났다면 당연 금자씨도 만나러 가야하는거 아냐, 팝콘과 사이다를 들고 일행들과 앞자리쯤에 앉았다. 순간, 범상치 않게 열리던 타이틀백에선 백색이 난무하는 가운데 케이크를 만드는 손이 춤추듯 화면을 가득히 메우고, 여인의 눈에서 떨어지는 한 방울의 눈물이 완성된 케이크위로 떨어진다. 그 때 눈물은 핏빛 체리시럽으로 바뀌며 막이 열렸다. 인간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폭력성과 악마적 죄성을 다양한 형태로 탐구해가는 영화의 줄거리가 첫 타이틀백에 압축되어 있었다. 이영애는 십대에 미혼모가 되었으며, 교생실습을 나왔다가 자신에게 성적인 멘토를 날려준 최민식을 찾아가 아기와 함께 삶을 의탁한다. 산소미인으로 통하는 이영애의 이미지와 대비되게 이 영화에서는 또래 아이와 관계를 갖고 임신을 하고 출산하는 여자로 나온다. 자신의 그러한 처지를 성적 뉘앙스가 듬뿍 담긴 멘토를 날렸던 교생 최민식에게 의탁하는 심리적 의도는 무얼까. 이영애 같은 이미지의 여성 안에도 악마적 일탈의 욕망과 죄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평범한 대사 몇 마디와 짧은 시퀀스로 이야기하고 있다.
이 영화는 절대로 친절하지 않다.
우리의 주변에 일상으로 존재하는 평범들이 결코 안심 할 수 없는 대상이라는 표면적인 경고를 넘어서 누구라도 여건이 허락하고 명분만 주어진다면 주저 없이 살인까지도 감수 할 수 있다는 섬뜩한 사실을 눈 돌리지 말고 똑바로 보라고 말한다. 선혈이 낭자한 살인의 카니발을 마치고 돌아온 사람들이 그 핏물이 다 베어든 것 같은 핏빛 케이크를 나누어 먹다가, 눈 내리는 풍경에 부랴부랴 귀가길 차량정체를 걱정하는 장면에서는 인간의 과장된 평범이 얼마나 섬뜩한 두려움인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 영화는 해피엔딩이다. 사실 이영애가 그렇게도 갈망했던 영혼의 구원은 끝내 얻지를 못했지만 최민식에 의해 호주로 입양되었던 딸 제니를 통해 희망을 찾는다.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딸 제니는 적어도 세 번은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말해줘야 엄마를 용서할 수 있다고 했는데, 이영애는 네 번씩이나 미안하다고 말한다. 아니 40번 400번 4000번도 더 미안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영화에는 눈이 자주 등장한다.
눈이 표현하는 화이트는 인간 내면의 또 다른 본성 이노센트,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무엇을 의미한다. 어둠과 대비되는 백색은 서럽도록 눈부시다. 마지막에 일체의 군더더기 없는 하얀 케이크를 만들어서 딸 제니와 화해하는 장면에서도 눈이 내린다. 마치 온갖 추함을 덮어 없애려는 듯. 딸을 부둥켜안고 하늘을 우러르며 씻김의 과정을 거치던 중, 끝내 이영애는 케익에 얼굴을 묻고 오열한다. 복수의 칼을 갈면서도 인간의 내면에선 진정한 영혼의 구원을 기대하고 있음을 영화에서는 복선으로 깔고 있다.
한 순간의 실수와 어리석은 선택으로 인하여 13년이나 감옥에 갇혀 살아야 했던 인생.
갇힌 이유가 전적으로 어떤 대상에게 있다고 생각해서 자포자기 하는 생이야말로 얼마나 비통한가. 미움이 원수를 만들고 원수가 살인을 낳는다면 나 역시 살인자의 마음을 갖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카인의 후예인 나는 용서의 대상자로서 살아갈 뿐 용서의 주체자가 될 수 없기에 한 줄기 빛을 향해 걸어갈 뿐이다.
겨울이 오면 밤늦게 찾아와 난동을 피우고 돌아갔던 그녀에게 전화를 걸 수 있을까. 눈으로 덮인 세상에서 하얗게 웃으며 만나자고, 다시 말 걸을 수 있을까.
2007 가을, 오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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