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과 산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평범>

미송 2012. 7. 25. 21:12

보르헤스는 스페인 실존철학자 미겔 데 우나무노처럼 '불멸에의 목마름'으로 아파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그의 개인적 욕망만큼 공포와 고뇌에 차 있다. 그러나 끝까지 보르헤스를 떠나지 않는 눈길은 차분함과 관조에 가득한 성찰의 자세다. 젊은 시절부터 그가 보는 사물, 거리, 풍경은 갈구와 고뇌와 야단스러운 슬픔이 아닌, 눈높이의 삶과 그 숙명을 받아들이는 달관을 향한 성실성으로 가득하다.

 

 

평범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정원 철문이 열린다

자주 열심히 찾아보고 들춰보는

책장이 열리듯 다소곳이,

그리고 그 안에서 눈길은

물건 하나하나를 눈여겨볼 필요가 없다

벌써 기억 속에 있는 그대로이니까.

나는 그 습성을 알고 마음을 안다

그리고 모든 인간집단들이 획책하는

그 암시의 방언을.

나는 말할 필요가 없다

훌륭한 거짓말을 획책할 필요 또한 없다.

여기 나를 에워싸고 있는 사람들은 나를 잘 안다

나의 고뇌와 나의 약점을 잘 안다.

이것이 가장 높게 이르는 길,

어쩌면 하늘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높은 은혜:

감탄사도 승리의 개가도 없이

부정할 수 없는 이 큰 현실의 하나로

소박하게 받아들여지는 일,

돌멩이처럼, 나무처럼.

 

 

보르헤스의 풍경은 모두가 상징이다. 상징이면서 일상이다. 상징은 은유처럼 문맥이 끊기거나 비논리, 비관습으로 튀지 않는다.

보르헤스의 내숭은 그냥 우리가 일상에서 체험하며 생각하는 것을 평범하게 제시한다는 것이다.

 

늘 궁금하면 들춰보곤 하던 책장을 넘기듯이 열리는 정원 철문, 우리는 그렇게 조용히, 다소곳이 열리는 문들을 기억한다. 그러나 '철문'이라는 용어가 영 마음에 걸린다. 그것은 숙명의 문, 죽음의 육중한 꿈 같은 불안감이다. 비록 그의 말은 부드럽지만 연상이 부드럽지 못하다. 거기에서는 늘 책을 읽다 말고, 아니면 책 속에서 찾고 물어보던 것들인 '인생은 무엇인가, 사람은, 나는 왜 죽는가' 가 있다. 그의 상징은 이렇게 조용하게 우리를 안으로 인도한다.

 

 

일러스트 작가, 세르쥬 블로크

 

아리스토텔레스도 <시학>에서 "역사는 일어난 일을 쓰고 시는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쓴다. 따라서 시는 역사보다 더욱 진지하고 더욱 철학적이다" (9장) 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시는 비극, 희극, 서사시, 문학 일반의 속성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지만, 역사성까지 포괄하는 사실적 소설에 비해 시는 좀더 철학적인 면이 있다는 이야기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보르헤스의 소설이나 시는 문학이 형이상학임을 실증으로 보여준다. 그의 말과 형이상학은 모든 테마의 유일한 목적이며 그 정당성이다.

 

철학이나 형이상학은 눈에 보이는 현실이 아닌 세계, 즉 훨씬 깊고 넓은 그래서 우리 시력의 관찰 한계를 벗어나는 세계 및 꿈의 세계까지를 우리 존재의 영역으로 치는 또다른 시다. 시가 가냘픈 감상주의나 감각적 아름다움의 세계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애초부터 형이상학적 관점에서 출발했다고 할 수 있다. '시인' (vate)이란 말 자체가 '예언자' '무당' 등과 같은 뜻이었다면 시는 현상세계의 깊이와 미래를 점지하는 원리와 이치, 무늬를 그리는 작업일 수 있다.

 

이것은 플라톤의 '이상공화국'으로부터 그의 좁은 이성주의에 의해 달라진다. 소위 '시인 추방론'이 그것이다. 시대가 이미 도시(polis)적 분위기였던 때의 조직과 체계와 이성적 지식에 몰두했던 플라톤에게 시인은 '헛소리하는 미치광이(mania)'로 보였다.

(중략)

 

서구 사변철학의 논리 중심적 전통 뒤에서, 보르헤스는 철학과 문학의 재결합을 추진한다. 보르헤스는 <또다른 심문>(1952년)의 후기에서 고백한다. "나는 이 책의 잡다한 글들을 재수정하면서 두가지 경향을 발견했다. 그 하나는 내가 종교적, 철학적 사고를 좋아한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철학의 심미적 가치 또는 그 이상하고 황홀한 사고의 무늬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보르헤스는 책 읽는 재미, 생각하는 재미를 글로 쓴다. 그는 베이컨의 말을 기억한다. 신은 두 책을 썼다. 그것이 세상과 성서다.” 보르헤스는 세상이라는 책과 다른 책들 혹은 성서를 읽으며 책을 쓴다. 그리고 그런 사고는 이미 13세기 성 부에나벤뚜라(San Buenaventura)에게도 있었음을 안다. 책과 세상을 함께 보는 사고는 동서가 비슷하다.

 

 

우리가 보는 세상이란 책이다. 태초에 하느님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태초에 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오늘 우리에게 허용된 세상읽기는 옛날옛날 알렉산드리아에서 사라져버린/그 어려운 원고들 같은어려운 독서다. 세상이 있고 책이 있었는지 책이 있고 세상이 있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세상읽기나 책읽기나 어려움에서는 일치한다. 세상은 운명의 장난같이 늘 알 수 없는 미궁이다. 그 미궁을 파헤치려 많은 책들이 씌어졌다. 그 미궁을 이해하려고 많은 책들을 읽는다. 세상이라는 미궁이나 도서관 속의 미궁은 서울대공원 미로놀이처럼 헤매는 재미, 어려움의 재미라고나 할까<민용태>

 

 

* 타이핑- 채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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