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체 게바라 만세
강정
시집 제목을 체 게바라 만세로 하자고 했더니 사람들이 웃었다. 그래서 나도 웃었다.
- '언제나 무엇인가 남아 있다' 부분
박정대의 시집을 통독하고 나서 어떤 인물 하나를 떠올려보자. 그는 시인일 수도, 시인이 아닐 수도 있다. 손가락 사이엔 늘 담배가 걸려 있고 표정을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눈빛은 모호하다. 색약이거나 색맹일 수도 있고, 그만이 바라보거나 꿈꾸는 세계를 이 세계의 판에 박힌 질서 안쪽에서 유린당하지 않기 위해 선글라스를 끼고 있을 수도 있다. 그는 어떤 공간에서든 그 자신만으로 혼자 충만하다. 세계의 흐름과는 또 다른 시간 패턴 위에서 그는 세계의 통상적 명명법으로는 규정되지 않는 그 자신만의 '다른 이름'들을 적시한다. 그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을 때, 그것은 때로 음악이 되기도 하고, 빳빳하게 격절돼 있는 시간과 공간 사이의 틈을 벌려 누군가의 삶과 죽음과 사랑을 상연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다시 뽀얀 먼지들이 허공에 들어찬다. 한 올 한 올의 먼지들이 점착력 강한 문자로 몸에 각인된다. 그것은 시일 수도, 시가 아닐 수도 있다. 문학이라는 유구한 통념 자체를 희롱하며 문자들은 저 자신만의 유장한 호흡으로 심장을 쪼고 동맥경화로 마비된 근육의 탄력을 되살린다. 문득, 정신을 차리니 이 뻔한 세상이 한번도 겪어보지 않은 신천지다. "나는 이제 신발을 벗고 또 다른 나의 고독 속에 들어가 눕는다" 전 세계가 내 고독의 무늬로 휘황찬란하게 떠오르다가 사멸한다. 이것이 시의 독성(毒性)이기도, 존재의 오연한 독성(獨性)이기도 하다.
무릇 좋은 시집이란 읽는 사람(시인이든 아니든)으로 하여금 시를 쓰게 만든다. 시인 고유의 발성법이 읽는 이의 숨결 속에 삼투돼 몸 안에 오래 봉쇄돼 있던 영혼의 유로(流路)를 밝히기 때문이다. 혈관이 문득 투명해지면 갑갑하게 더께로 앉아 있던 세계의 풍광이 그 자신이 아니면 결코 우려낼 수 없는 고유의 빛깔로 투사, 변형된다. 황막하게 흩뿌려지는 담배 연기의 장막 너머에서 시는 지금 만나고 있는 연인처럼 모호하고 다시 만나고 싶은 연인처럼 또렷하다. 이 모두를 동시에 사랑하고 동시에 떠나가는 것. 그리하여 그 누구의 연인도 아닌 고독 속에서 모든 이의 연인이 되는 것. 혼자 당도한 마음의 오지에서 스스로를 배신하는 "혁명적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 눈빛을 가둔 선글라스 안쪽에서 시는 폐를 상하게 하고 영혼의 화기(火氣)를 헹굼질한다. 그리고 나는 이 이상한 모순 앞에서 단 한 마디도 온전하게 내뱉을 수 없다. 숨이 턱턱 막힌다. 배수구가 없는 탁류의 뒤끝을 한참 서성이다가 기어이 청명하게 닦인 빛에 취한다. 시인은 중후하고 엉큼한 난봉꾼. 화장기로 감춘 눈빛 속에서 스리슬쩍 진심만을 취하고는 벌거벗은 이 몸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는다. 그 앞에서 나는 수줍게 고개 돌려 술잔을 꺽는다. 마음의 속곳까지 이미 다 들켰으면서도 끝끝내 모든 걸 숨기고 있는 척해야 하는 구력 10년차 베테랑 기생 년처럼.
참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이상하다. 뭐가 이상한지도 모르는 채 모든 게 낯설고 친근하다.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도 가물가물한 가운데 정처 없이 혼자 머나먼 곳에 내팽개쳐진 기분이다. 이 서늘한 격절과 소외는 그런데, 참 따뜻하고 비릿하다. 고독이 이토록 풍성한 것인 줄 예전엔 미처 몰랐다. 그랬더니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유령 같다. 그 어떤 감정의 격동이나 생각의 모서리를 가다듬는 사유의 분투 따위 모두 허깨비들의 아우성인 듯싶다. 고독은 인간의 감각을 초능력화하는 물질의 연금술이다. "삶은 실제적인 것" (미셸 우엘르베끄)이라는 자성엔 영혼의 지포 라이터에서 자기 자신만의 불꽃을 끌어 올려본 자의 매캐한 기름 냄새가 배어 있다. 그건 심장과 간, 그리고 폐의 적절한 부식과, 그로 인한 혈당 및 호르몬의 급격한 수치 변화와 그에 따른 심리적 내상과 육체적 마모의 오실로그래프가 몇 번의 고비를 거쳐 적당한 자정 수준에서 큰 동요 없이 자리매김했을 때 흘러나오는 영혼의 유액이다. 화력도 좋고 불꽃의 빛깔도 명징하며 휘발성도 뛰어나다. 거기에 오래 삭힌 생각의 건초 더미를 갖다 대보라. 영혼은 금세 파란 연기로 산화하여 음악으로 흐르고 오래전에 죽은 여인의 얼굴을 허공에 점묘하다가 이 팍팍한 천민자본주의의 어느 술집에 지구 만방의 아름다운 고유명사들이 한데 모이게 한다. 가만히 앉아 자신만의 호흡으로 부풀리는 '인터내셔널 포에트리 급진 오랑캐들'. 그 도당들은 참혹한 신의 문책 문서 안에 실명으로 기입돼 있다. 박정대는 그들을 천사라 칭한다.
가스통 바슐라르, 갓산 카나파니, 닉 케이브, 라시드 누그마노프, 마르셀 뒤샹, 미셸 우엘르베끄, 밥 딜런, 밥 말리, 백석,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 빅토르 쪼이, 피에르 르베르디, 아네스 자우이, 악탄 압디칼리코프, 앤디 워홀, 에밀 쿠스트리차, 장 뤼크 고다르, 조르주 페렉, 자아 장 커, 짐 자무시, 체 게바라, 칼 마르크스, 톰 웨이츠, 트리스탕차라, 파스칼 키냐르, 페르난두 페소아, 프랑수아즈 아르디, 프랑수와 트뤼포
-'천사가 지나간다' 전문
그런데 참 난감하다. 다시 긴 시간이 흐른다. 마음의 실타래를 아무렇게나 풀어놓듯 허공에 또르르 굴려놓은 박정대의 시집 초안을 나는 최소 열 번 이상 통독했다. '이 책 사용법'에 대한 어떤 메뉴얼이나 풀이를 감행할 수 없다. 지난겨울 어느 날, 그는 내게 손수 제본한 시집 원고를 툭 건네며 "너 쓰고 싶은 대로 가볍게 써줘"라고 말했다. 그와 내가 음습한 마음의 그늘을 지중해산(産) 차양인 양 눈빛 아래 두르고 '급진 오랑캐들'과 접선하는 술집 '코케인'에서였다. 원고를 건넨 다음 그는 표표히 자리를 떴고, 나는 바에 앉아 혼자 보드카를 홀짝이며 원고를 처음 읽었다. 240페이지에 육박하는 연기 같은 영혼의 축도(縮圖)를 완독하는 데 걸린 체감 시간은 대략 1시간 30분. 많은 말이 부풀고 많은 말이 사라졌으며 온갖 음악들의 소용돌이 끝에 뇌리에 남은 건 테이블 위의 작은 촛불처럼 시간의 풍파를 견뎌낸 침묵뿐이었다. 입을 열려 할수록 입천장 뒤쪽의 진동판이 빳빳하게 굳고 뭔가 느끼려, 생각하려 할수록 말단의 감각과 뇌수의 파장이 따로 노는 이상한 패닉이 느껴졌다. 그리고 또 많은 시간이 흘렀다.
봄이 오고, 바다 열도의 지축이 요동치고, 동아시아의 성층권이 천연과 인공의 재해를 뒤섞어 뉴스거리를 만들어내는 동안, 그의 시는 내 곁에 너무 가까이 있음에도 감히 말 걸기 저어되는 영혼의 순사처럼 저 혼자만의 담배연기에 취해 뿌연 그림자로 오래 배회했다. 몸 둘 데도, 알량한 심정적 보상도 없이 자기 자신을 좀먹으면서 스스로 아름다워지고 스스로 파탄 나는 영혼의 절경. 그 위에서 악마의 능변, 또는 천사의 재치로 현세를 희롱하는 떠돌이의 말놀이. 밀반입한 고급 양주를 마시고 홀로 대지와 격돌하는 듯한 착각 속에서 나는 혼자만의 '정부'를 생각했다. 그리고 그게 이 시집에 대한 유일한 독후감이다.
유랑 악극단에서 공중 곡예사는 꼭 필요한 극단적 존재,
마치 코끼리가 동물을 대표하듯 극단적 차원에서 허공을 대
표하는 공중 곡예사는 꼭 필요한 존재
공중 곡예사의 상징은 날개, 날개는 천사의 상징이기도
하지
천사가 날개를 떼어버리고 지상으로 하강할 때 천사였던
그녀 혹은 그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사랑, 빌어먹을 사랑 이야기가 판을 치는 이 지상에서 전
직 천사들은 어떤 사랑을 하는가?
극단적인 통증이 음악을 선택한다
-'형태는 감정을 따른다' 부분
"우리에게는 또 다른 정부가 있다"
이 말은 예전, 그러니까 1980년대 말 시인이자 연극 연출가인 이윤택이 어딘가에서 쓴 말이다. 같은 제목의 산문집을 읽었던 적이 있지만,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이윤택 또한 어느 글에서 인용해왔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와 그것과 관련한 세세한 영향 관계에 대해서 따지는 건 불가능하고 무의미하다. 20년 동안 제목만 뇌리에 박혀 있다. 정부(政府)와 정부(情婦 또는 情夫)는 동음이의어지만 의미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실없는 소리 좀 하자면 나는 늘 누군가의 '정부'였다. 오해도 이해도 사절한다. 스스로를 향한 시시껍적한 농담이라 생각해도 된다. 나는 나의 감정이 내뱉는 진술을 믿지 않는다. 말은 휘발성 강한 소음에 불과하다. 나는 텍스트의 행간에 어지간해서 반응하지 않으려 한다. 줄타기 곡예사를 아는가. 줄 위에 선 그가 아래를 내려다볼 때 그는 실패한다. 그럼에도 그는 줄곧 아래를 내려다보려는 충동에 휩싸인다. 그는 더 잘 실패하기 위해 끝끝내 앞만 보고 줄을 탄다. 더 잘 죽기 위해 죽음을 경원하고 두려움과 싸우는 일. 그리하여 문득 삶이 황홀하고 첨예해진다. 삶의 행간은 도굴꾼의 시선으로 들여다볼 게 아니라 그저 한때 줄을 흔들고 지나가는 바람처럼 무심하고 무결하게 지나쳐 가야 할 함정과도 같다. 그럼에도 함정은 자꾸 시선을 긴장시키고 몸놀림을 조심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긴장이 삶을 역겹고 버거운 것으로 변질시킨다. 그냥 확 뛰어내려버릴까? 그러면 미추(美醜)의 극단에서 아이의 웃음을 되찾을 수 있을까? 선택의 순간은 요원하면서 그 찰나를 지나면 한없이 공허하고 유치해진다. 그 어떤 것도 완전하거나 분명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모순을 견뎌내야 하는 게 진짜 삶이다. 고통으로 찢어진 입꼬리 탓에 평생을 희극으로 연출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일생 따위가 평생 맛도 본 적 없는 사람 고기처럼 삷의 입맛을 돋운다. "사랑을 한 후에 피우는 당신의 담배가 사랑과 맞부딪혀 다 타버렸"('남쪽 항구') 다. "극단적인 통증" 이후에 선택된 음악들이 다시, 미증유의 통증을 개발한다. "아무도 보지 않는 필름" ('착색 판화') 속엔 그러나 "끝내 너에게 보낼/ 단 한 마디의 말도" ('통영')떠오르지 않는다. 나의 붓이 나를 버리고 술에 취한 영혼의 독기가 녹슨 칼을 움켜쥔다. 비 오는 밤에 마구 휘둘러대는 이 자발적 문맹의 언어는 그래, 빗맞아도 파상풍이다. 결국 나의 함정에 스스로 빠져 오랫동안 꿈꾸던 나만의 '정부'가 궤멸한다. 그래도 여전히 '꼭 필요한 극단적 존재'에 대한 로망은 멈추지 않는다. 파문만이 영원한 이상향이다.
나는 그 어떤 텍스트 앞에서도 그저 변화무쌍하게 오관을 자극하는 표면들의 물리학에만 철봉처럼 매달릴 거라, 마음먹는다. 턱걸이를 하든 텀블링을 연습하든 철봉은 거기에 매달린 인간의 의지와 믿음 따위엔 별 관심도 없다. 텍스트의 속살에 특정 개인이 체득한 삶의 오의(奧義)와 신실한 감정이 숨어 있다고 믿다가 코 깨진 인간들이 내 주위엔 수두룩하다(나 역시 그중 한 명일 수 있다). 삶의 실질적 가치와 본질적 가치는 언제나 불일치를 지향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실질'과 '본질'의 간극은 1밀리미터도 안 된다. 삶의 모든 모순과 부조리는 거기서 발생한다. 나는 죽고 싶다, 라고 A가 말한다. 그 생각 때문에 너는 결코 죽지 못할 거다, 라고 B가 말한다. 단순한 영혼들에게 늘 있을 법한 이렇듯 공허한 대화의 패턴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암담해진다. 그럴 땐, 모든 부조리한 문답을 폐기하고 총이나 칼을 들고 싶어진다. 그러나 총을 쏘고 칼을 찔러야 할 대상은 늘 부재한다. 어쩌면 그 커다란 부재 자체가 진정한 적인지도 모른다. 보이지 않는 적을 향해 혼신을 다해 총질 칼질에 몰두하는 것. 나는 그게 삶의 궁극이라 떠벌린다. 붓은 칼보다 강하다고 믿는 문학의 맹아들을 나는 경멸한다. 언어는 삶의 에너지를 절반도 채 담아내지 못한다. 그것은 단지 특정 언어의 체계에 의해 반자동적으로 구축된 기호의 조합에 불과하다. 그 이면에 담긴 심층구조를 연구하면서 일생을 보낸 사람들의 이야기는 참으로 암울한 영광의 파노라마 그 자체다. 나는 보다 잘 미치고 싶을 따름이다. 그래서 허구한 날 술을 마시고 말을 벼리다가 결국 존재를 버린다. 그러나 그 어떤 수작과 행패에도 불구하고 "내 영혼과 육체의 모든 세포가 그대를 향해 나부끼는 밤" ('짐 자무시 67 행성')은 좀체 끝나지 않는다. 그 밤의 속곳 깊은 곳에선 인간의 모든 정념과 욕망과 불운과 그리움을 모두 겪은 영혼의 맹인이 출몰한다. 그는 오로지 어둠만을 바라보기에 모든 영혼의 기저를 명쾌하게 꿰뚫을 줄 안다. 나는 매번 그에게 당하고, 그에게 매달린다. 참 지랄맞은 순정이다.
술에 취하면 어느 순간 세계의 전부가 자신의 몸속에 꽉찬 듯한 충일감과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이 세계 바깥으로 떠밀려가는 듯한 소외와 고독이 동시에 몰아치곤 한다. 박정대의 시는 딱 그 두개의 분리점 내지는 접합 지대에서 은근하면서도 묵직하게 몸을 식히는 바람처럼 다가오곤 한다. 그래서 '느릿느릿 빨리' (이 모순 형용의 진짜 속도는 몽골 초원과 서울의 시차視差 정도만큼 확연하고도 불가해하다) 읽히고 기나긴 줄담배의 여운처럼 매캐하게 잔향을 남긴다. 그래서일까. 박정대의 시를 읽다 보면 술이나 한잔 사달라며 엉기고 싶은 충동에 줄곧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게 된다. 한동안 박정대의 원고를 머리맡 책장에 고이 모셔놓고만 있었다. 더 진하게 숙성되기를 기다리며 서랍장에 처박아둔 칠레산 적포도주처럼. 그러고 보니 시인이 직접 제본한 원고의 표지가 와인 빛이다. 슬픔이나 고뇌 따위도 술상 앞의 말장난으로 휘발시켜 고통을 중화시키려는 시인들은 화날 때도 슬플 때도 매양 실없이 웃는다. 좋은 시는 그냥 눈으로 읽고 가슴으로 문지르다가 언제 그런 걸 봤었냐 싶은 표정으로 한순간 잊어버리는 게 가장 좋은 독법이다. 부러 떠올리거나 작위로 암기하지 않더라도 명시된 문장 바깥은 처연한 바람 소리가 육체적인 감각으로 되살아날 때, 그리하여 돌연 이 세계가 오랜 각질을 벗고 기어이 제 속살을 선연하게 밝혀오는 듯 여겨질 때, 시는 비로소 시인과 독자를 하나로 묶는다. 시집은 독서 이후에도 살아남는 자정 또는 자구 능력에 의해 판단되어야 하는 게 옳다. 책장에 오래 숨겨져 있다가도 불현듯 저절로 냄새를 피우며 걸어 나와 말을 걸고 눈물 콧물 웃음까지 짜낸 다음 입 싹 닦고 조용히 잊히는 것. 그 무심하고 덧없는 반복의 무한 팽창과 무한 침잠 속에서 수시로 변화하는 자신을 거울에 비춰 보게 만드는 초연한 자성의 매질('媒質'도 맞지만 몽둥이질이 더 어울린다). 좋은 시집은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 실제 존재 여부와는 무관하게, 어느 한 독자의 영혼 속에서 영원히 재발간된다. 누대로, 은밀히 계승되어온 영혼의 헌책방에서 시는 스스로 먼지를 키우고 스스로 몸을 일신해 어느 미래의 시간대에 마치 세계에서 처음 씌어진 말인 양 천연덕스럽게 자신만의 보금자리를 펼친다. 처음 나왔을 때와 똑같은 언어로 처음 나왔을 때와는 또다른 세계를 스스로 펼쳐 보이면서. 그것을 느끼고 깨닫는데에 백 명의 동의 또는 백 명의 공증 따윈 불필요하다. 이른바 '전문가'의 고언을 참조할 필요도 없다. 시는 다만 각기 다른 백 개의 영혼을 상대하며 스스로 분열할 뿐, 어떤 확정된 의미와 논리 체계 안에서 강요된 전언을 복제하라 추궁당한다면, 그저 혀를 깨물고 각혈하는 게 훨씬 순연하다. "오직 시인의 부족 구성원들만이 그 언어의 음악을 음미할 수 있으니까" ('짐 자무시 67행성'). 시가 만인의 언어가 되고 낙이 되고 고통이 되는 세상은 생지옥이거나 낙원에 가깝다. 내 입장을 말하자면, 생지옥에서 살라면 아예 태어나는 걸 거부할 거고 낙원에서 살라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그곳을 생지옥으로 바꾸려 노력할 테다. 이 말도 안되는 모순과 분열이 아니라면 내겐 더 이상 시를 써야 할 이유도 명분도 없다. "시는 무력하지만 너무나 무력해서 무력 무력 혁명의 불꽃을 피워 올리기도" 하니까. "농담인데 하나도 우습지 않다" ('리스본 27 체 담배 사용법')면 내 마음이 여전히 바야흐로(또!) "겨울밤"인 탓일 거다.
겨울밤엔 아무튼, 박정대의 시가 딱이다. 그러나 지금은 현해탄 건너 원전 방사능이 빗물에 섞여 건너온다고 위협당하는 어처구니없는 봄밤. 그래도. 박정대의 시는 메마른 고독의 우듬지를 가다듬는 데에 폼나게 적절하다. 웃음도 씽, 눈물도 씽, 그저 담배 한 대 물고 만사가 씽씽.
여기까지가 침묵의 음악이고 그 이후는 침묵을 또 다른 형태로 표현하는 것이다
-'세상 모든 원소들의 백색소음' 부분
다시 한 남자를 떠올린다. 그는 시인일 수도 혁명가일 수도 건달일 수도 맹인일 수도 공중 곡예사일 수도 맹추일 수도 있다. 천사의 가면을 쓴 채 악마의 술수를 부릴 수도 있고 아름다운 음악에 취해 "삶이라는 직업"자체를 직무유기하기도 한다. 아무도 그를 만나보지 못했다 하더라도 누군가 이 세계를 자신의 밀실 안에 포섭한 채 우주의 전체 기압을 부풀리려 하는 자가 있다면 스스로 그 남자가 될 수 있다. "무장 혁명 봉기"를 꿈꾸며 총칼로 세계를 소유하려 하다가 자신을 파괴할 수도 있고 한 줄 시의 호흡으로 영혼의 뿌리를 연단하려다가 언어의 역류에 휘말려 심장을 송두리째 내어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그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는다. 그는 "하나의 성냥불이 켜지고 세계가 잠시 밝아질 때, 그 희미한 밝음의 힘으로 지구가 조금 자전했을 때, 몇 마리의 새가 안간힘으로 지구의 자전을 거슬러 오르고 있을 때" ('봉쇄수도원') 이 삶이 어떤 "실제적인" 에너지에 의해 각기 미세 원소들의 자생적 힘을 돋우면서 영원히 공전할 뿐이라는 사실을 깨우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삶은 결국, 개별 존재들의 자족적인 폐쇄 순환과 그 모두를 수렴하는 우주의 광대한 먹이사슬 체계 안에서 그 자신만의 변성(變性)과 일탈을 종용하는 자들에 의해 찰나적으로 갱신된다. 이를테면, "태양의 반대편으로 우리는 밤새 걸어가"면서 끝끝내 그 스스로 "태양이 되는 것이다" ('슬라브식 연애'). 그는또 담배를 피워 문다. 그러고는 "시선을 차단하고 세상의 저녁을 꺼"버린 채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아도 그 자신만의 숨결 속에 우주가 꽉 들어차 있는 "고독 속에 들어가 눕는다" 다시, 시간이 한참 흐른다.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그가 있던 자리만이 사위의 모든 사물들 사이에서 뚜렷한 양감으로 나뉜 채 저 홀로 연기를 피운다. 적포도주 빛이 감도는 색안경 하나가 연기 사이로 흐릿하게 떠오른다. 저 자극적인 어둠의 투망 너머로 그가 느릿느릿 걸어가는 게 보인다. "체 게바라 만세"라고 그가 낮게 읊조린다. 왜 그 말을 시집 제목으로 쓰는 게 우스운 일인지 나는 도통 모르겠다. 웃음거리가 되는 걸 두려워하는 자들로 득실대는 세상에서 '개그콘서트' 따위가 장수 프로그램이 되는 이유도 "통, 영" 알 수가 없다. 그런데 그 "게바라"가 남들 다 아는 그 "게바라"가 아닐 수도 있다. 나에겐 나만의 "게바라"가 따로 있다. 확언할 순 없지만 아마, 박정대에게도 그렇지 않았을까. 모든 이름은 '다른 이름'이다.' " 여기까지가" 박정대의 시집을 읽고 내가 풀어낼 수 있는 "침묵의 음악"이다. 어떤 오해나 손상 자체도 "침묵"의 의지에 불과하다. 나는 그저 머나먼 곳으로 실려 가려다가 눈앞에서 사라지고 마는 담배 연기의 "또 다른 형태"에 천착할 따름이다. 지금 나는 "멍청한 년처럼 외롭다" ('짐 자무시 67행성'). "풍경처럼 울리며/풍경처럼 살아/풍경" ('풍경 한계선') 자체가 되는 게 유일한 소원일 뿐, 짐 자무시 감독, 이제 조명을 꺼주시오.
박정대 시집 <삶이라는 직업>(2011, 문지) pp240-255 /해설/
▶▶ 시집을 고를 때, 특별한 영감이나 예감은 없이 잡히는 데로 걸리는 데로 하면서도, 멈칫 언제쯤 한번 삘feel 받았던 기억이 배경이 되곤 한다. 앞부분에 실린 '짐 자무쉬 67행성'에 이번엔 내가 걸릴 차례였는지. 신새벽부터, 화장대에 던져놓았던 시집을 집어 뒷부분을 열었다. 친구와의 대화 같은 해설. 그러면서도 해설하는 이, 특유의 소설체로 자기 색깔을 드러내었다. 강정이 시인인지 소설가인지 착각이 들었다. 한숨나게 멋드러진 싸나이들. 고맙고!... 타이핑하는 손이 춤추듯 하였다면, 싸나이들 우정과 특별한 사랑에 대한 겨자씨만한 보답이 될까. 문장부호를 포함하여 열 개 이상 기록을 세운 오타수정을 한다. 두 번째 읽으니 강정이 역시 시인이었네, 끄덕여진다. 독자의 무식 플러스 시적 상징으로 꾸민 문장 다섯 개가 뿌옇게 닿기도 하지만, 얼핏 때려잡는다. 종료할 시간이다. '인디언들에겐 '시간과 동사의 시제時制가 없다'고 들었는데, 그럼 이 찰라의 느낌은 영원일까.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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