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란 문학실

[수필] 끝나지 않은 이야기

미송 2012. 8. 17. 09:27

 

 

끝나지 않은 이야기 / 오정자

 

찰칵 불을 켠다.

못다 한 이야기들로 숨죽이며 기다려온 새벽이 무채색 형광판 위에 손을 내밀었을까?

눕혔다 일으켜 세울 때마다 눈을 열던 어릴 적 아버지가 사준 바비인형처럼 원하는 때에 눈뜨는 일이 점점 익숙해져 간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스텝을 밟듯 옮겨지는 낱말들이 비틀거리다 주르륵 펼쳐지며 눈썹에 매달린다.

일주일 전부터 자판연습을 시작했다. 스크린만 쳐다보며 치는 연습을 했다. 별로 노력하는 형이 아니라서 관습에 젖어 살 때가 태반이지만

정신집중이 필요한 글쓰기 작업을 하는 사람이 제 열 손가락도 자유자재로 놀리지 못해서야 되겠나 하는 각성이 들었다.

어느 한 순간이었다. 시선을 떨어뜨리지 않고 자판을 치면서 습관에 젖어 살아온 시간을 되돌아본다.

 

작은 변화에도 신기하다고 펄쩍 뛰는 내가 수다스런 입도 모자라서 이젠 자판까지 두드리며 얼마나 많은 실수와 모스(Morse)부호 같은 암호들을 남발할지 걱정도 된다. 말하기는 조금 어눌해야 사랑스럽다고 하는데, 글쓰기는 순발력과 속도감이 있어야 원활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튼실한 바탕이 있어야 목적을 이루는데 정도가 되고 지름길이 된다는 생각에 때로는 느리게 걷기도 하고 멈추어 멍하니 서 있기도 하면서.

 

피아노 건반을 쾅쾅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던 때가 있었다. 남들 귀에는 "저 여자가 피아노 소리에 심취되어 열정적인 노래를 부르는구나." 했겠지만 아마 속울음을 건반에 화풀이했던 게 아니었을까. 조율사에게 피아노의 수명이 10년에서 20년까지 간다는 소리를 듣고서야

가슴이 뭉클했다. 못살게 두드려대도 언제나 위로를 주던 피아노가 얼마나 고마운지.

그래서 10년 전 자판을 처음 대했을 때도 피아노 건반을 연상하며 안도의 숨을 쉬었다.

‘너 이리 좀 와 봐, 내가 두들겨 줄 테니 얌전히 누워 내가 하는 말들을 받아 줄래.’

가학적이고도 자학적인 양면성은 공존을 위한 장난스런 조화인가?

 

허리를 직각으로 세우고 타자를 친다. 피아노를 칠 때와 하프를 뜯을 때의 감흥 속으로 돌아간다.

어쩌면 젊은 날보다 할 이야기가 많아진 것일까. 이야기로 풀어야 할 사연들이 쌓여 있는 것일까.

나의 독백들은 얼마를 더 털어야 순결한 옷을 입을 수 있을지. 작은 울타리에 머물지 않을 푸른 메아리로 되돌아 올 수 있을지.

남은 숙제들로 끙끙 앓는 손끝이 어디를 향해 스텝을 밟으며 달려갈지를 바라본다.

정해년 꼭두새벽에 비친 스크린 불빛이 애처롭다. 손끝이 뜨겁다.

 

[내 인생 첫 번째 편지] 2007. 01.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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