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명의 수행자를 기다리며
이 정문
달력을 봤다. 열흘 정도 남았나보다. “달라져서 돌아오겠습니다.”라고 떠난 수행자는 잘 계신지. 그가 하안거에 들어간 지 석 달이 다가온다. 마당에 내려서니 가을장마다. 얼마 전 신도들이 수행처 봉암사에 다녀왔다. 홈페이지에 올려 진 M스님의 사진을 보니 많이 야위었다. 유난했던 올여름 더위가 힘들었나 보다. 어젯밤엔 귀뚜라미 울음소리 요란했다. 왜 나는 수행자를 기다릴까, 날마다 안녕하신지, 주구장창 면벽하여 좌선한다는데 소화는 잘 되시는지, 허리는 괜찮으신지,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는 일을 좋아하시는데 지루하지는 않은지. 싯다르타도 참 얄궂다. 중생을 중생답게 살도록 그냥 내버려둘 일이지, 어찌 진공묘유(眞空妙有)의 경지를 설(說)하여 사람을 괴롭히는지 모르겠다.
내게 있어 부처란 그저 마음뿐이다. 평생 수행은커녕 불전에 엎드려 절 한 번 변변히 해 본 일이 없다. 그저 불교 서적을 주문해서 편한 자세로 끄적대거나 인터넷 불교 강의를 듣다가 꾸벅꾸벅 조는 일이 전부다. 우두두 기왓장에 부딪혀 사라지는 빗방울. 나보다는 낫다. 번뇌가 없어 보인다.
언젠가 TV에서 방영한 다큐멘터리에 넋을 잃은 일이 있다. <순례자의 길>. 티베트의 평범한 촌부 몇 명이 라싸로 순례를 떠났다. 장장 2100키로의 험한 길을 삼보 오체투지로 떠났다. TV 화면에 비친 그들은 마치 자벌레 같았다. 몇 걸음 떼자마자 오체를 대지에 짝 붙였다. 돌밭을 지나고 설산을 넘고 빙판을 가로질렀다. 무릎 관절이 퉁구러졌다. 이마에 굳은살이 검게 덮였다. 6개월이 넘는 고행이었다. 라싸 조캉사원에 도착한 그들은 감격했다. 떠나면서 그들은 10만 배라는 삼보 오체투지를 또 남겼다. 백팔 배나 삼천 배는 들어봤다. 그러나 2100키로의 오체투지로도 부족하여 10만 배라니, 고행을 마친 후 그들 중 한 명이 돈을 벌려고 동충하초를 잡으러 갔다는 자막이 나왔다. 여기서 아내는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그토록 고행을 한 대가가 기껏 동충하초나 잡는 일이라니’ 감동적인 줄거리의 끝이 허무하다는 그런 의미 같았다. 나는 눈을 흘겼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나는 서울 종암동에 살았다. 부근 안암동에 ‘개운사’라는 절이 있었다. 넓은 개울, 그 옆을 따라나선 하얀 길, 절 입구의 커다란 느티나무, 그 뒤 파란 이끼의 낡은 기왓장을 뒤집어쓴 가람(伽藍), 가끔 마당을 가로지르던 스님, 가물가물한 기억이지만 개운사의 모습은 대충 이렇게 그려진다. 여름방학이면 스님들 입장에서야 악동이지만, 나와 또래 친구들의 놀이터가 바로 이곳이었다. 상치에 찬밥덩이를 얻어 일찍 점심을 해치운 어른들이 서늘한 구들장에 등을 붙여 낮잠을 찾는 오후, 동네의 몇몇 우리들은 불볕을 쬐며 개운사로 향했다. 고무신으로 툭툭 바닥을 차 먼지를 날리고, 나뭇가지를 꺾어 휘둘러 길가의 꽃모가지를 뎅겅뎅겅 자르고, 니자랑내자랑 재잘재잘 걷다보면 어느덧 절 입구에 선 커다란 느티나무에 닿았다.
그곳에서부터 우리는 조용했다. 몸을 낮춰 주변을 살폈다. 바로 ‘개고래 스님’ 때문이었다. 우리들 중에 누가 붙였는지 모르지만 지금 생각해도 목청과 입이 큰 그 스님에게는 딱 맞는 별명이었다. 다른 스님들은 우리를 봐도 못 본 척 묵묵했지만 이 스님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계단을 뛰어다니며 장난을 치다가 뒷덜미에서 “네 이놈!”하는 호령이 떨어지면 우리는 혼비백산했다. 그때 힐끗 뒤돌아보면, 쩍 벌어진 스님의 입이 마치 우리를 다 집어삼킬 듯 했다.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내튀어 달아났다. 그러면 사나운 개처럼 쫓아오던 스님이 저 만치 서서 “경내를 자꾸 어지럽히고 소란을 떨면 네 놈들 혼날 줄 알아라.” 쩌렁쩌렁 고함을 질러대곤 했다.
그러나 개운사는 우리를 잡아끄는 묘한 구석이 있었다. 바로 대웅전 뒤편 그늘이었다. 아무리 더위가 쨍쨍 기승을 부려도 그곳은 늘 서늘했다. 올망졸망 그늘에 붙어 앉아 홀짝홀짝 딱지나 구슬먹기를 하다가, 해가 서쪽으로 슬며시 기울면 대웅전 옆 벽면으로 자리를 옮겼다. 처음에는 ‘개고래 스님’을 의식해서 속닥속닥 댔다. 그러나 자리가 무르익고 딱지구슬 삼매에 몰입하면 “스님, 우리들이 여기에 있어요.” 알리듯이 목청을 높여 다투고, 그러다보면 바로 등 뒤 우리의 머리 위에 스님이 딱 버티고 서있던 것이었다.
재수가 없던 날, 그러니깐 딱지를 많이 잃고 사나운 개고래 스님의 우악스런 손아귀에 내 뒷덜미가 딱 잡혔던 날, 나와 친구 하나는 어부의 손에 들려진 물고기마냥 선방으로 추측되는 큰 방으로 대롱대롱 끌려갔다. 댓돌 위에 올라서는 순간 멀리 무사히 도망친 친구들의 얼굴이 보였다. 개고래 스님의 머리만큼이나 반들반들했던 방바닥으로 기억된다. “네 이놈!” 큰 목청에 기둥이 흔들대는 듯 했다. 방 가운데 딱 무릎 꿇은 우리는 두 손을 들고 있어야 했다. “팔을 번쩍 들어올려. 대들보에 매달아 놓기 전에, 녀석들 혼 좀 나 봐라!” 이렇게 야단을 치며 돌아서던 스님의 커다란 입술이 문득 옆으로 쭉 찢어졌다. 사실 그것은 미소가 분명했다. 그런데 평소의 험궂던 스님의 얼굴과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았다. 지금 말하자면 일종의 개그 같다고나 할까, 미소가 속마음이었으리라.
스님이 사라지자 나와 친구는 두 팔을 번쩍 쳐든 채 다투었다. 오늘 여기에 놀러오자고 누가 먼저 말했는가, 나는 안 오려고 하지 않았는가, 조금만 놀다 가자고 말하지 않았는가, 벌을 서게 된 연유를 우리는 마치 석가의 제자들이 인연법을 꼬치꼬치 따져 올라 논박을 벌이듯이 “니가!” “내가 언제? 바로 니가” 부지불식간 목청이 높아지고 그래서 방안에 목을 쑥 들이민 개고래 스님께서 “이 놈들, 얌전하게 잘못을 뉘우치면 금방 용서하고 보내주려 했는데, 둘이서 싸워?” 눈을 부라려 호통을 치고, 그날 느티나무에 비낀 석양을 밟으며 터덜터덜 집에 돌아왔던 기억이다. 물론 그 후 눈치꾸러기로 여전히 개운사에 들락댔는데 대웅전 뒤편의 서늘하고 시원한 그늘은 무서웠던 “개고래 스님”과 함께 아직도 나의 추억거리로 남는다.
이번 초파일에 암자를 찾았다. 부처는 흠모하되 불자가 아닌 나로서는 낯선 일이었다. 사실 나는 초파일 행사보다는 M스님에게 관심이 더 많았다. 끊임없이 이 시대를 질타한 그가 고마워서였다. 그래서 신도들 뒷자리에 앉아서나마 고마움을 표하고 싶었다. 감성이 풍부하고 소탈하며 다혈질적인 스님의 인상, 그 위로 K교수의 얼굴이 오버랩 되었다. K교수를 나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TV로 그의 강의를 들었을 뿐이다. 그러면서도 K교수가 남모르게 간직한 나의 스승인 것은, 동서고금을 종횡무진 하는 그의 해박한 지식과 배움에 대한 열정 때문이다. 그런데 서민적이고 극히 인간적인 소탈함에서는 K교수와 M스님이 서로 많이 닮아 보였던 것이다. K교수는 해박한 지식으로 자신을 위장하지 않는다. M스님도 역시 신비로움으로 자신의 수행을 포장하지 않았다.
얼마 전부터 손바닥만 한 마당에 귀뚜라미들이 출현했다. 아침에 나가보니 수돗가에 떠놓은 물에 귀뚜라미가 빠져 있었다. 꼼짝 않는 모양새로 봐서는 익사했다는 판단이었다. 손바닥에 떠올리는 순간, 귀뚜라미는 뒷발로 탁 튕기며 몸을 밖으로 내던졌다. 달아나는 뒷모습이 자못 반가웠다. 나는 발 여섯 개 달린 생물 중에 귀뚜라미를 제일 좋아한다. 밤에 마당에 나가 살피면 화단 아래를 기는 귀뚜라미가 어둠 속의 군자(君子)처럼 느껴지곤 한다. 넉넉하고 긴 더듬이, 균형이 잘 잡힌 몸매, 항시 도약할 수 있게끔 브이자로 꺾인 통통한 뒷다리, 거짓 없는 몸짓, 그리고 날개를 비벼 가을의 장막을 찌르르찌르르 밤마다 둘러쳐 주고, 불성(佛性)으로 치자면 나보다 한 수 위인 것도 같다.
열흘 정도만 지나면 석 달을 채운 하안거가 끝난다. 내가 수행하는 것도 아닌데 그 동안 몇 번이나 달력을 봤는지 모른다. 9월 초, 돌아온 수행자가 암자에서 법회를 연다는 소식이다. 수행에 방해가 되어 쥐를 잡으려니 고양이를 키워야 하고, 그러려면 고양이먹이 우유를 얻어야 하고, 우유 때문에 소를 키워야 하고, 다음에는 소먹이를 또 마련해야 하고, 이런 쳇바퀴의 삶 때문에 아쉽게도 법회에 참석치 못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수행자가 기다려지는 이유가 뭘까, 세상이 어두워 하나의 등불이라도 갈급해서일까, 아니면 스님의 말처럼 뭔가 달라진 모습이 궁금해서일까, 사실 이런 기대나 궁금증은 M스님에게 너무 큰 짐을 지워주는 일과 같다. 그래서 나 스스로가 ‘개고래 스님’처럼 세상을 질타하고 등불이 되고 달라져야 하겠지만, 그래도 그가 기다려진다. 염치도 없이 말이다.
밤새 내리던 비가 그쳤다. 봉암사 댓돌 아래도 그런가. 수행자여, 건안하시라. 성불하시라.
2012. 8월 하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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