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 양철지붕
1
어떤 사내였을까, 산자락 끝을 가로지른 신작로 아래에다가 흙벽돌을 빗어 쌓아올리고 그 위에 볏단을 얹어 납작 엎드린 초가집을 지을 줄 알았던 사람이, 길쭉한 방 한 칸과 노천에 드러난 부엌, 털털대는 충주행 버스가 정류장에 섰다 떠나면 동네아이들이 뽀얀 먼지를 마시며 뒤를 쫓아 뛰어가고, 초가의 아낙네는 부뚜막에 걸린 솥단지 위로 날아든 먼지를 행주로 훔쳐내고, 밤에도 제법 시끌벅적하여 뒤뜰로 난 쪽문을 열면 논두렁밭두렁을 뒤덮은 개구리 울음소리가 개골개골 온통 저 달빛을 타고 올라, 흙벽돌을 빗을 줄 알았던 사내는 자족하여 등잔불 아래 반짇고리를 찾아든 아내의 그림자를 곁눈으로 내려다보며 이만하면 살만하다고 다리를 쭉 펴 등을 황토바닥에 붙였으리라, 강원도 원주시 OO동 OOO번지의 납작집은 60년 전 한국전쟁의 포연이 채 가시지도 않은 어느 날 이렇게 자기의 시원(始原)을 땅에 꽂았다.
일 년이 지나자 아낙네는 툴툴 댔다. 사방을 허방으로 놔둔 채 겨우 차광막으로 머리 위 하늘만 가린 부엌이 불만이었다. 얼마 전 피난민 몇몇이 주변에 집을 지어 들어앉았다. 벽돌을 쌓아 방을 드리는 김에 부엌을 제법 반듯하게 꾸몄고 문짝과 창문까지 달았기에, 부쩍 늘어난 군부대 주둔으로 인하여 아침마다 떼를 지어 군가를 부르며 구보하는 군인들의 발치에서 솟는 먼지나, 지축을 흔들며 지나는 탱크와 군용차량들이 구름처럼 일으키는 먼지를 피할 수 있는 공간이 부러웠던 것이다. 품을 팔아 살던 사내는 아내의 볼멘소리 앞에서 눈을 꿈쩍대다가 다시 흙을 빗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흙벽돌이 모아지자 벽을 차곡차곡 쌓아 올리는데 이에 신이 난 아내가 불쑥 내민 말이란, 이왕 시작한 공사이니 저기 밖에 쌓여있는 장작더미까지 안으로 들여놓게 부엌 한쪽 귀퉁이를 널찍하게 넓히라나, 그래서 사내는 모자라는 벽돌을 보충하느냐 또 흙을 빚었고, 드디어 장마가 시작되기 전 남들처럼 창문과 문짝이 달린 부엌을 완성시켰으니, 그 해 장마철에는 천막으로 해 씌운 부엌지붕을 요란하게 두드리는 빗소리에 콧노래를 맞춰가며, 빗방울 하나 들이치지 않는 아늑함에 젓가락 가위질 품새를 넓혀가며 빈대떡을 부쳐 먹어 맛있었으리라.
세월은 흘러 초가지붕을 몇 번 갈았고 부엌지붕의 천막도 찢긴 곳을 꿰매고 덧대다가 반쯤은 판자로 얼기설기 엮어 빗물을 막았는데, 어느 날 밤 사내가 술이 얼큰해져 집에 들어서다가 벌컥 화를 내고 말았다. 등잔불을 켜놓고 좁은 방이 터져나가라 하고 식구들이 가득 둘러앉았는데 큰 녀석과 둘째 녀석이 소리를 질러가며 싸우는 중이었고, 셋째와 넷째는 딸년들이었는데 응원하는 오빠 편이 달라서 둘 역시 씩씩 서로 째려보고 있었으며, 막내 녀석은 누룽지 조각을 오독오독 깨물며 엄마 무릎에서 개기적대고 있었다. 애들을 한 대씩 쥐어박고 윽박질러 이불 속에 다들 처박았지만, 사내가 화가 난 이유는 정작 딴 데에 있었다. 점점 커가는 애들 다섯 명의 덩치 때문에 방이 바글바글 옹색해져 집안에만 들어서면 가슴이 답답해져왔고 오늘처럼 술이 얼큰한 날 마누라 가슴에 손이라도 얹을라치면 빤한 애들 눈치를 봐야 했기 때문이었다.
사내는 다음날부터 흙을 빚기 시작했다. 안방 옆에 붙여서 또 하나의 방을 드린 후 애들을 그곳에 몽땅 쓸어 넣을 참이었다. 밖에서 품을 팔면서 짬짬이 진행한 공사라 두 달이 넘게 걸렸지만, 꽃무늬 벽지로 둘러친 새 방에 서로 다투어 우르르 몰려간 애들에게 사내는 큰 이불 하나를 휙 집어던지면서, 이것 덮고 다들 푹 자거라, 하고 득의에 찬 표정을 보였다. 그리고 소위 안방으로 돌아온 사내는 그날 밤, 모처럼 어른스러운 애담(愛談)까지 아내와 나란히 누워 나누었으니, 소문에 의하면 아낙네가 다음 날 옆집 애기 엄마에게 이런 수다를 건넸다나, “어젯밤 단둘이서 자니깐 마치 신접살림 차린 것 같더라고요, 호호”
그러나 늘 안심할 수만 있는 집이 아니었다. 마당 앞 저 위로 나무들이 드문드문한 산이 뻗어 올라붙었는데, 자주 있는 일은 아니라도 비가 억수 같이 퍼부으면 토사가 마구 흘러내려 신작로를 덮치고 방문 앞까지 밀려오곤 했다. 그래서 사내는 푼푼이 모은 돈으로 콘크리트 담벼락을 빙 둘러쳐 근심을 덜었는데, 이 때문에 갈수록 담장 밖은 흘러내린 토사로 지대가 높아지고 집은 땅 속에 가라앉듯 점점 낮아지니, 몇 년 후에는 문밖출입을 하려면 돌멩이로 쌓아올린 몇 개의 계단에 올라서야만 했다.
사내는 면사무소에서 보여주는 슬레이트라는 판때기를 만지작대고 있었다. 초가지붕을 모두 걷어내고 슬레이트로 지붕을 얹는데 정부에서 얼마간의 보조금이 나온다는 면장의 말이었다. 발로 밟으면 뚝 부러질 듯한 얇은 판때기라서 마뜩치 않았지만 한번 얹으면 20년은 끄떡없이 빗물 한 방울 새지 않고 견딘다는 소문에 사내는 집공사를 다시 시작했는데, 이왕에 지붕을 몽땅 뜯어낸 김에 앞마당 쪽의 처마를 너덧 자 쭉 앞으로 빼내 그 밑에 구들장을 연결시켜 벽을 쌓고 문을 냈으니 마치 회랑과 같은 거실을 하나 꾸며놓은 형상이었다. 여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다 커서 수염이 더부룩해지는 아들과 과년한 딸들을 한 방에 계속 처넣기가 좀 그렇고 그러해서, 아들 셋을 거실로 끌어내 따로 재우려는 의도였다. 그리고 내친 김에 천막으로 씌운 부엌지붕도 슬레이트로 덮어 연결해 놓고 보니, 사내의 눈에는 납작한 집이 날개를 달고 훨훨 날아오를 듯이 비쳤을 것이다.
단칸방에서 시작하여 부엌을 붙이고, 애들 방을 또 하나 꾸미고, 지붕을 슬레이트로 바꿔 개량주택으로 만들고, 복도 모양이지만 거실까지 마련했으니, 더 이상 집에 손 댈 일이 없을 것 같았는데, 이번에는 산림보호를 위해 장작 대신 연탄을 때라는 정부의 정책이라서, 구들장 틈새로 스며드는 연탄가스가 꺼림칙했는데 그럴 염려가 없는 연탄보일러라는 것이 신제품으로 나오자 방과 거실을 돌아가며 보일러호수를 빙빙 깔고 시멘트로 바닥을 친 후, 이왕 벌어진 공사니 앞에 붙었던 부엌을 널찍한 뒤뜰로 옮겨버렸다. 또한 뒤뜰 처마를 담벼락까지 길게 이어 붙여 아예 연탄 창고와 목욕탕까지 꾸미고, 전에 쓰던 부엌은 잡동사니나 넣어두는 광으로 사용하기로 한 후, 사내가 손을 툭툭 털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집공사와 집수리 반평생이라서, 집 하나로 어느 사내의 인생 거의가 설명되는 셈이기도 하다.
2
흙을 빚어 벽돌을 만들 줄 알았던 사내가 언제 이 집을 떠났는지 모른다. 집 뒤뜰 담벼락에 붙여 오층 건물이 벼랑처럼 높이 솟고 논바닥이었던 뒤로 육차선 도로가 훤히 뚫린 후, 집 앞의 도로는 이면도로 또는 소방도로로 전락되었고, 충주행 버스도 집 뒤로 지나다녔으니, 이는 삼십 년 전의 일이라서 그때 주인이 누군지 알 수가 없지만 제2번 타자로 들어선 사내도 역시 집을 조물락대기는 만만치 않은 실력의 소유자였다. 집의 허리춤까지 차오른 높은 지대가 가하는 압력에 담벼락이 안으로 서서히 기울자, 제2의 사내는 배짱 좋게도 앞쪽의 담장을 아예 허물어버리고 둔덕을 쌓아 견고히 한 후, 한 발 밖으로 내민 지점 높은 지대에 새로 담을 쌓아 철문을 해달았고, 옆쪽 마당으로 밀려들어오는 담벼락에는 안에서 두터운 패널을 받친 후, 굵은 쇠파이프를 단단하고 깊이 박아 지주대로 삼았으니, 옆쪽 마당의 넓이가 제법 되어 제2의 사내는 기발하게도 부엌을 붙인 기다란 방 하나를 쭈물딱 하나 만들어 세워 월세를 놔먹었던 것이다.
제2의 사내는 법을 잘 아는 사람 같았다. 제1의 사내는 처음으로 집을 짓고 개량하고 확장시켰지만 건물등기라는 것을 모르고 남의 땅 위에서 그저 살다 이사를 갔다. 제2의 사내는 아무리 공들인 집이라도 법원에 ‘내 집’ 명함을 걸지 않으면 권리주장을 못한다는 사실을 알았던 모양이었다. 더구나 집이 깔고 있는 땅이 복잡하게 조각조각 삼등분되어 개인소유지 한 필지, 국유지 한 필지, 시유지 한 필지, 합이 60평정도 남의 땅을 깔고 앉은 터라 제2의 사내는 적이 긴장했던지 특별법에 의해 등기된 집소유권이 그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역시 제2의 사내의 장점이라면 과감성이었다. 삼십 년이 넘어가자 흙벽돌이 서서히 무너져 내리고 땅에서 습기가 차오르기 시작하자, 제2의 사내는 특유의 스케일을 발휘하여 아예 집 한 쪽 벽 전체에 패널을 땅 속까지 파 둘러 쇠파이프를 박아 고정시키고, 삭아서 흘러내리는 흙벽은 발견되는 즉시 시멘트로 단단히 발라 막아 그 벽면을 유지시켰다. 또한 직사각형 보도부록을 어디서 구해왔는지 마당에 깔고 콘크리트로 높은 대문턱까지 다섯 계단을 곱게 쌓아 올리고, 안쪽 담장을 따라 길게 꽃밭을 만들고 그 아래턱에도 역시 또 꽃밭을 붙여 일구어놓았던 것이다. 이렇게 내 집입네, 하고 거의 이십 년 동안 대문을 들락대던 제2의 사내 앞에 어느 날, 30초반으로 뵈는 또 한 명의 만만치 않은 사내가 홀연히 자태를 드러냈다.
“전국을 돌아다니다가 이 집을 발견했습니다. 터가 무척 좋습니다. 제게 파십시오. 집값은 후하게 지불하겠습니다.” 훤칠한 키의 미남형 젊은이 말에 제2의 사내는 뜨악한 표정을 지었지만 농담이 아님이 분명했다. 마침 돈이 궁했던 제2의 사내는 한 몫 잡듯이 후한 가격을 받아 집을 넘겼고, 드디어 제3의 사내가 주인으로 들어선 것이었다. 약초를 채집하고 연구하며 전국 명산을 떠돌아다니던 이 사내에게는 남다른 신기(神氣)가 있었다. 무속인이라면 박수무당이랄 수도 있겠고 역마살이라면 김삿갓을 능가하고도 남아돌아, 그와 조금 대화를 나누다보면 누구나 기인(奇人)의 인상을 충분히 받는데,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집을 구입한 연유는 그만이 아는 일이라서 옆 사람이 논하기가 힘들다.
터가 명당이건 어쩌건 집수리는 여전히 골칫거리였다. 하기야 제2의 사내가 오래 묵은 흙벽에 갖은 고생을 다했는데 다음 타자라고 성할 리가 있겠는가, 이번에는 거의 삼십년 묵은 낡은 슬레이트 지붕이 말썽을 부리기 시작했다. 비만 오면 이쪽에서 줄줄 저쪽에서 똑똑 빗물이 스며들어, 장마철에는 양동이 몇 개씩이나 동원하여 빗물을 여기저기 받아낼 판이었다. 그래서 제3의 사내는 날만 개면 지붕에 살금살금 올라앉기 일쑤였고, 언젠가 옆집에서 전기누전으로 불이나자 가슴이 철렁하여 돈을 처발라 전기공사를 새로 벌였고, 겨울에 집을 오랫동안 비워놓는 바람에 상수도관이 얼어 터져 한 달 상수도 요금만 120만원이 나왔다나, 상수도관도 새로 시설했는데, 무엇보다도 역시 지붕이 말썽이라서 칠팔 년 동안 장마철만 되면 금이 가고 조각난 슬레이트 위를 수십 번 오르락내리락 연구와 수리를 거듭했던 것이다. 빗물을 잡는 게 얼마나 성가신 작업이었는지, 제3의 사내가 목돈을 한꺼번에 들이밀어 아예 지붕 전체를 빨간색 양철 강판으로 싹 갈아 치운 일이 바로 재작년이었다. 내친 김에 단열이 잘 되는 석고보드를 천정마다에 갖다 붙여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은 따뜻하고, 그것만이 아니었다. 비록 손바닥만 한 크기의 앞마당이지만 빗물에 얼마나 혼쭐이 났는지 제3의 사내는 철제 빔을 마당 위로 두른 후, 위에다가 라이트를 좍 깔았는데 이는 약간 신경질적인 공사로 보였지만 빗물이 마당에 들이치지 않아서 쓸 만했다.
집에는 사람이 늘 들락거려야 한다. 제3의 사내는 역마살이 발동되면 집을 떠나 한 달에 한 번, 두 달에 한 번, 혹은 석 달에 한 번 돌아와, 겨우 이삼 일이나 일주일 정도 머물다가 훌쩍 또 떠나버리니, 두 달 가까이 주구장창 빗줄기를 퍼부었던 작년 장마철에 장판과 벽지가 겹친 벽 아랫부분으로 습기가 차올라 거뭇거뭇 썩고 곰팡이가 슬어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러댔다. 그리하여 거의 십 년간을 동네 사람들이 잊을 만하면 문득 지붕 위로 모습을 드러내 조각난 슬레이트나 루핑이나 비닐을 만지작대곤 하던 제3의 사내는 집수리에 그만 질렸는지 집을 샀을 때의 이유처럼 그만의 사연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위치가 좋아서 언젠가는 깔고 있는 땅을 사들여 몇 층짜리 건물을 세우겠다는, 그런 논리로 큰소리를 쳐 일억을 넘겨줘도 안 판다던 집을 별안간 지방의 20평 자리 아파트 전세금도 안 되는 금액에 급히 내놨던 것이다. 역시 사내에게는 좀 기괴한 데가 있었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이해가 갈만도 했다. 터만 명당이면 뭐하는가? 눌어붙어 간수를 잘 해야 사람 사는 집이지. 자고로 여자와 집은 가꾸기 나름이라고 하지 않는가.
3
삼년 전 내가 전세를 얻어 원주로 이사 왔을 때, 그 전세금이면 다른 집을 얻기도 무난하다고 생각했지만, 지방임에도 불구하고 근래에 집값이 턱없이 뛰어올라, 올 가을 전세기간만료시에는 지금의 전세금으로 방 두 칸은커녕 비좁은 원룸으로 밀려날 형국이 뻔했다. 이런 처지에 택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방법이 뭘까, 고민에 몰려 찍은 게 바로 남의 땅에 집만 덩그러니 서있는, 구옥이어서 허술하겠지만 건물등기를 갖추고 있어 내가 바로 주인이 되는, 그런 집을 구하는 일이었다. 물론 서울에서는 턱도 없는 일이지만 아직 땅과 건물관계가 허술한 지방도시에서는 가능한 일이겠고, 생활정보지에 매일 코 박다보니 내 판단이 제대로 맞아 떨어져 가끔 ‘주택만 매매’라는 광고가 떴다. 이렇게 나는 제4번 타자로 그 집에 들어서게 되었다.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고 두드려 벽을 짚어가니 안방은 흙벽돌이고 건넛방 외벽은 일반 블록이고, 마당을 마주한 앞쪽 벽은 패널 위에 시멘트를 덧씌워 마무리를 했고, 집 뒤로 돌아 붙은 주방과 세면장 내부는 울퉁불퉁했지만 바닥과 벽에 습기가 차오르지는 않았다. 기름보일러도 잘 돌아갔다. 평지에 집을 세운 제1의 사내, 밀려드는 흙의 압력을 단단히 막아 사방을 확보한 제2의 사내, 강판을 뒤덮어 빗물을 원천적으로 봉쇄해버린 제3의 사내, 그들의 집요한 손길과 거친 숨결이 빈 화단에 버려진 벽돌 하나에도, 하찮게 박혀 녹슬어 버린 못 하나에도 파랗게 서려있어 60년 이 납작집의 역사(歷史)란 말 그대로 자신과 가족의 생존울타리에 몰아친 비바람을 이겨냈던 사내들의 역사(役事)라서 자못 경건해지는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제4의 사내인 내 눈에 거슬려 당장 손봐야 할 장소는 주방과 세면장이었다. 기존의 낡아버린 싱크대를 교체하고 세면장에 타일을 붙이고 수세식 화장실을 설치해야 했다. 타일공사와 좌변기 설치에 80만원, 싱크대도 80만 원 정도면 될까? 도배하는데 60만 원 정도고...... 밤잠을 설쳐가며 요모조모 머릿속 계산기를 두드려 더하고 빼고 곱하고 나누고, 그렇게 가벼운 주머니를 저울질하며 계획을 세우다가 막상 업자를 불러 견적을 내니, 타일공사에 150만원입니다. 도배는 거실장판만 모노륨으로 갈고 벽지를 보통으로 해도 126만원은 들겠네요. 싱크대는 계산이 크게 어긋나지 않아 90만 원에 낙착되었는데, 내 마음에 들면 뭐하는가, 주방은 역시 여자들의 공간이라서 아내를 공장에 직접 데려가니 하얀색이 예쁘다나, 그래서 90만 원에다가 20만 원 추가, 곧이어 요즈음에는 다들 싱크대에 대리석을 까는데, 가게 사장님의 한 말씀에 아내의 손가락질이 하얀색 대리석을 향해 퍽- 그래서 50만 원을 또 추가, 부하가 걸린 내 머릿속 계산기는 그만 제멋대로 돌고 말았다.
일꾼을 부린다는 일이 보통이 아니라서, 나는 그들 곁에 붙어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잔소리를 참아가며 시시콜콜 무슨 담배를 피우시죠, 음료수는 뭘로 사드릴까요, 점심은 시원한 냉면이 어때요, 시중 들어주기 일주일, 그 동안 일곱 난장이가 사는 작은 집에 달린 문짝 같은 낮은 문턱마다에 신고식을 치루는 양, 커다란 키를 주체하지 못해 얼마나 머리를 들이박았는지 내 정수리에 피떡이 달라붙고 말았다.
공사가 거의 마무리되어 이삿짐을 옮기기 하루 전날 우연히 들춰본 장판에 나는 얼어붙었다. 30년은 충분히 묵었으리라, 보일러호수가 오랜 세월에 쪼그라들고 군데군데 터져 물이 새나오니, 자고로 이 집의 역사가 지닌 쓴맛, 선배들이 다녀간 쓰디쓴 길목에 내가 확연히 들어선 게 틀림없었다. 비가 억수같이 퍼붓는 다음 날 남에게 세를 놔먹었던 셋방에, 뒤란에, 마당에 가득 이삿짐을 엉망진창 부려놓고, 또 업자를 불러 견적을 뽑고, 즉시 모래를 실어오고 시멘트를 들여놓고 호수를 깔고 등등 난리법석을 떨었으니, 그 날 밤 아내는 마당 귀퉁이 수돗가에 휴대용 버너를 걸어놓고 피난민 모양 쭈그려 한 끼니를 해결했음이라, 나는 억셌던 선배들의 손아귀를 상상하며 그래도 내 집이라는, 문만 닫아걸면 발가벗고 돌아다녀도 아무렇지도 않은, 나의 토굴이며 보금자리에 자위하며 한 술을 뜨고, 일주일 후에야 비로소 살림살이가 축축한 습기를 문 채 제자리에 들어서게 되었다.
태풍 카눈이 서해로 뻗어 올라 중부지방에 상륙하던 날, 마당 위의 철제빔에 깔린 라이트가 세찬 바람에 들먹대 날아갈 것만 같았다. 나는 공구함을 열었다. 망치, 톱, 펜치, 드릴, 줄자, 드라이버 등, 가지런히 들어있는 새로 구입한 공구들을 들여다봤다. 제1의 사내, 제2의 사내, 제3의 사내들도 이랬으리라, 광에서 얇은 판때기 하나를 가져와 톱으로 잘게 썰었다. 길고 가는 못을 그 가운데에 박아들고 비를 맞으며 철제빔 위에 올라섰다. 툭딱 툭딱, 망치소리가 서툴다. 단단히 박아 덜렁대는 부위를 꼭 붙여 고정시켰다. 이제 이 집의 여정이 시작되었으니 앞으로는 집수리를 취미로 삼아야 할 듯도 하다.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여러분께 알려드립니다. 차량번호 OOOO 소유자께서는 차를 빼주시기 바랍니다.”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여러분께 알려드립니다. 각동의 대표자 선거를 오늘 밤 7시에 실시하오니 많은 참석을 바랍니다.”
시도 때도 없이 매일 나오는 아파트의 안내방송에 나는 짜증을 내며 전화기를 들었었다. 무슨 안내방송이 그렇게 많습니까? 하다못해 애들을 찾는다는 방송도 마구 하시고, 도대체 내 집안이 시끄러워 살겠어요? 여기가 무슨 경부선열차 객실입니까? 아니면 포로수용소입니까?
땅기운이 흙냄새와 함께 고요하게 고여 있다. 대문을 나서서 담배를 사러 가게에 다녀오며 보니 빨강 양철지붕은 태풍을 머리에 이고 납작 엎드려 있다. 아파트 베란다보다 훨씬 넓은 마당이 있고 꽃밭이 있고, 물건을 마음대로 던져 넣을 광이나 구석도 많고, 무엇보다도 커다란 책장 두 개와 큰 책상이 들어가고도 남는 조용한 공간인 내 서재가 마련되어 흡족하다. 비록 잔손이 많이 가고 가끔은 제법 큰 공사를 방불케 하는 집수리에 곤혹을 치루기도 하지만 이 납작집을 스쳐간 선배들은 그렁저렁 이와 같은 마음으로 자족했으리라.
그나저나 날이 활짝 개면 페인트칠을 해야 할 텐데,
2012년 7월 중순, 이 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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