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최승자<한 세월이 있었다>외 1편

미송 2012. 9. 17. 21:52

한 세월이 있었다

 

한 세월이 있었다

한 사막이 있었다

 

그 사막 한가운데서 나 혼자였었다

하늘 위로 바람이 불어가고

나는 배고팠고 슬펐다

 

어디선가 한 강물이 흘러갔고

(그러나 바다는 넘치지 않았고)

 

어디선가 한 하늘이 흘러갔고

(그러나 시간은 멈추지 않았고)

 

한 세월이 있었다

한 사막이 있었다

 

현대 물리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시간도 공간도 처음과 끝이 있다. 즉 유한하다. 그러나 일반인의 생각으로는, 시간도 공간도 끝이 없다. 우리 머리의 감각으로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무량한 시간과 공간. 차라리 시공간이 정말 무한하다면, 어차피 한 점 먼지같이 작고 작은 우리 존재가 ‘영원’ 한끝에나마 속할 수 있으련만.

「한 세월이 있었다」는 영원이니 뭐니 하는 내 말을 낭비로, 사치스럽고 치사스런 객설로 만든다. 목소리는커녕 작은 기척이라도 내는 게 큰 무례일 듯한 이 ‘절대고독’의 현장을 나는 막막히, 또 먹먹히 들여다본다.

‘그 사막 한가운데서 나 혼자였었다/하늘 위로 바람이 불어가고/ 나는 배고팠고 슬펐다’

무한한 공간, 무한한 시간 속에서 화자는 자신이 머물렀던 세월(극히 작은 순간)과 공간(극히 작은 지점)을 대비시키며 제 존재의 하잘 것 없음과 왜소함을 극대화시킨다. ‘배고팠고 슬펐다’니, 몸 가진 존재가 느낄 수 있는 한껏의 외로움을 이보다 더 천진하게, 이보다 더 잘 표현할 말이 있을까?

‘어디선가 한 강물이 흘러갔고’는 공간의 흐름을, ‘어디선가 한 하늘이 흘러갔고’는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는 것일 테다. 이 시가 실린 시집의 제목처럼 ‘쓸쓸해서 머나먼’ 풍경이다. <황인숙>

 

 

어디선가 문득 문득 툭 툭

 

도대체 통합이 되지 않고

시작이 되지 않는

이 어지러운 文明의 잠자리

일어나지도 못한 채

꿈자리만 깊어진다

 

그 와중에서도 어디선가

문득 문득 툭 툭

전쟁이 터진다는 소식

 

참 유구한 역사

참 유구한 문명

어디선가 문득 문득 툭 툭,

 

참 유구한

 

―『쓸쓸해서 머나먼』(문학과지성사,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