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인들은 그와 같이 본능에 따르는 원주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이뉴잇의 본성을 알 수 없었다. 그들을 야만이란 단어로 정리했을 뿐, 상아와 뼈, 사슴뿔, 동석(凍石), 점판암, 가죽, 그리고 황금만큼이나 귀한 나뭇가지들만으로 북극에서 살아갈 수 있는 능력보다 더 훌륭한 지성의 척도는 없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뉴잇은 추위를 견디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용한다. 연어 세 마리를 가죽으로 싸서 얼린 후, 빙판 위에 얇은 얼음 막이 만들어지도록 밑면에 순록의 내장 기름을 칠하여 썰매의 날로 사용했으며, 썰매의 판은 순록의 뼈대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런 작업은 모두 인분으로 만든 칼로 했다. 정착지로의 이사를 거부했던 한 노인에 대한 잘 알려진 이야기가 있다. 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가 빙원에서 계속 지내려고 하자, 함께 가기를 원했던 가족들은 그의 도구를 모두 치웠다. 그랬더니 그는 이글루 밖으로 나가 겨울 강풍의 한 가운데서 용변을 본 후, 언 똥을 타액으로 날카롭게 다듬어 칼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그 칼로 개를 죽여 갈비뼈로는 썰매를, 가죽으로는 마구를 만들어 또 다른 개에게 채우고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이 책에는 ‘희망과 영혼의 야생적 사고들’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습니다. 인용한 북극의 이뉴잇을 비롯해 말레이시아 숲의 페낭족, 아프리카에서 이주한 아이티인들, 에베레스트의 티벳인들, 아마존 밀림의 원주민들 등 문명인들이 말하는 극한의 대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난 기록들로 가득합니다. ‘야생’이라는 말은 얼마나 상대적인 용어인가요? 우리가 문화의 다양성에 대해 많은 얘기들을 하지만 이뉴잇의 사례에서 보듯 그들의 삶과 지혜를 알기 전에는 그 말의 정체를 깨닫기 힘듭니다. 특히나 지혜로운 인간들과 그 문화는 자연과 사람, 대지와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런 인류학적 보고서들은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차이를 발견하는 지식보다는 공존하는 지혜를 알려줍니다. <전성태>
소설(아니, documentary)의 한 대목이지만 왠지, 시처럼 압축적인 사유를 던져준다.
야성(野性)하면 나는 ‘들깨우다’ 란 말이 연상된다. 살살 흔들면 깨지 않고 마구 흔들어야만 깨는 잠.
그러나 여기서 야성은 인위적인 자극이 배제된 자연의 야성을 말하는 것 같다. 태어날 때부터 지녔던 그들만의 성질.
당연 흉내낼 수 없는 그들만의 무엇이다. 어렸을 때 아니 어른이 되어선가, 야성을 가져 봐, 하는 소릴 자주 들었다.
야성 하면 또, 짐승(아이들이 툭하면 잘 내뱉는 변태랑 비슷한 말)이 연상된다. 아무튼, 미녀와 야수까지.
자꾸만 끄집어내자면 야성이란, 문명인들(온실 속 화초 같은, 너무 잘 길들여져서 뺀질한)에게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게 분명해진다.
… 이뉴잇의 이야기를 읽었다고 그들을 이해했다 말 할 순 없다. 고갤 끄덕 할 순 있다. 조용히. 끄덕.
인간들은 도대체 왜 말을 배웠을까. 왜 언어 안에서만 생각을 할까. 언어도 고뇌다.
그래서 붓다는 자신(붓다를 만나면 붓다를,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마저 버리고 가라 고 하였다.
제한된 도구나 연장으로 밖에 살아갈 줄 모르는 문명인들은 그러나 자연 대신에 자신 속으로 함몰되었다.
문화란 말이 나왔으니 한 예를 들자면; 한국의 아이들은 어른이 야단을 치면 고개를 숙이도록 배웠다.
외국 아이들은 어른이 야단을 치면 눈을 똑바로 맞추고 경청하도록 배웠다.
같은 상황 다른 결과는 불 보듯 뻔한 일. 우리 집에 놀러 온 외국 아이는 그런 상황에서 뺨을 맞을지도 모르고,
외국에 놀러 간 우리 아이는 버릇없단 소리를 곧바로 들을 것이다.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말처럼 쉽지 않다. 그러나 언어도단을 넘는 사유의 기본이 아닐까.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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