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집에는 아무도 살지 않아요
"이 집에는 아무도 살지 않아요"라고 너는 내게 말한다. "다 가버렸어요. 응접실, 침실, 정원에는 인적이 없습니다. 모두가 떠나버려서 아무도 없지요."
나는 네게 이렇게 말한다. 누가 떠나버리면, 누군가가 남게 마련이라고. 한 사람이 지나간 자리는 이제 아무도 없는 곳이 아니라고. 그저 없는 것처럼 있을 뿐이며,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곳에는 인간의 고독이 있는 것이라고. 새로 지은 집들은 옛날에 지은 집보다 더 죽어 있는 법. 담은 돌이나 강철로 된 것이지 인간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 집을 짓는다고 그 집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 집에 사람이 살 때에야 비로소 세상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집이란, 무덤처럼, 사람들이 머무르는 곳이기 때문이지. 이것이 바로 집과 무덤이 너무너무 똑같은 점이지. 단, 집은 인간의 삶으로 영양을 취하는 데 반해서, 무덤은 인간의 죽음으로 영양을 취한다는 게 다른 거다. 그래서, 집이 서 있고, 무덤은 누워 있는 법.
모두들 집에서 떠났다는 것은 실은 모두들 그 집에 있다는 것. 그렇다고 그들의 추억이 그 집에 남은 게 아니라, 그들 자신이 그 집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실제로 그 집에서 산다는 말은 아니지. 집으로 인해 사람들이 영속할 수 있다는 것일 뿐. 집에서 각자 맡았던 일, 일어났던 일 같은 것은 기차나 비행기, 말 같은 것을 타고 떠나거나, 걸어가 버리거나, 기어서라도 떠나버리면 없어지지만, 매일매일 반복해서 일어나던 행동의 주인이었던 몸의 기관은 그 집에 계속 남는 법. 발자취도 가버렸고, 입맞춤도, 용서도, 잘못도 없어졌다. 집에 남아 있는 건, 발 입술 눈 심장 같은 것. 부정과 긍정, 선과 악은 흩어져버렸다. 단, 그 행동의 주인만이 집에 남았을 뿐.
어째서 문득, César Vallejo의 시가 떠올랐을까요. 집안이 무덤처럼 너무 조용해져서 아니면 새벽녘에 갑자기 나타났다 사라진 낯선 숨결이 하 수상하여서. 신기하게도 아니 참, 별스럽게도 인간이란 스스로가 원하든 원치 않던 꿈과 현실이란 이름의 그네놀이를 합니다. 늘. 무의식 저 아래에 발뿌리를 내리고 사네요. 오늘은 왠지 예전에 읽었던 대로가 아닌 다른 각도에서 읽혀집니다. 곱씹을 것 까진 없지 하면서도, 두어 번 고개를 이리 갸우뚱 저리 갸우뚱, 앞에서 뒤로 뒤에서 앞으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바꾸어 가며 덩달아 시각도 변하며 시가 읽히는데요. 지금 당신 양파 까는 중이세요 하며 읽는데요. 정말 양파같다는 느낌이 오네요. 바예호의 시가 말예요.
맞아맞아 하는 공감은 시를 읽는 독자마다 색깔이 다 다를 것이지만, 저는 오늘 마지막 부분에 포커스를 맞추어 봅니다. '행동의 주인'이라는 말에 눈길이 끌리네요. 관념에 약한 제 자신이 오늘은 부쩍 '행동의 주인'이라는 말에 힘을 얻습니다. 바예호의 말인지 누구 말인지 잘 기억되지 않지만, 인간은 '슬퍼하고 기침하는 존재' 란 말이 맞아요. 기침하는 소리 안에는 감출 수 없는 진한 실제의 고통들-슬픔은 물론, 사랑이나 가난까지- 담겨 있지요. 바예호의 '집'이야기를 들으며 새삼 자기 감옥의 수인(囚人)으로 살려는 심성구조를 직면하게 됩니다. 진정 자유를 옭죄는 것은 타인의 억압이 아니라 자기 손을 묶어둔 오랏줄일 텐데.... 아무튼, 관념의 구름떼들을 물리치고 행동의 주인으로 사는 하루면 어떨까요. <오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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