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란 문학실

[수필] 한계와 복제

미송 2012. 10. 4. 23:20

 

 

 

한계와 복제 / 오정자

 

 

저녁 10분 전 일곱 시. 여자는 30여 평 공부방 공간에 세 개의 창문을 도로 닫는다. 집으로 갈 시간은 배꼽시계가 알려준다. 먹는 일이 시급해지는 시각, 배고프면 아무 것도 뵈지 않는 여자, 메뉴판이 필요없는 저녁 일 곱시 정각이면, 또 정확히 자동차 헤드라이터가 비치고, 여자가 먼저 하이! 굿이브닝! 좋은 저녁…할꼬야? 말꼬야? 인사를 한다. 저는 오늘 회덮밥이 먹고 싶습니다. 마부가 앞서 메뉴를 말한다.

 

오늘은 일하는 도중 짬내서 평론 한편 읽었어! 차에 오르며 여자가 말한다. 그래? 누가 쓴 건데. 몰라. 대학생쯤 아니면 쓰기 위해 쓴 무슨 논문처럼 긴 평론. 김훈 소설 ‘칼의 노래’ 읽어 봤나. 대충. 인간 이순신을 썼나 봐, 평론에 나오네 이순신 얘기. 근데 왜 우리나라 평론엔 데리다부터 소쉬르 라캉 푸코 롤랑바르뜨, 이런 서양 철학자만 나오니. 그들 빠지면 평론이 안 되니. 그러게…

 

오늘 평론도 뭐더라, '전유(專有)'로서의 글쓰기 '향유(享有)'로서의 글쓰기라나. 그걸 설명하기 위해 김훈의 ‘칼의 노래’와 김영하의 ‘랑은 왜 나비가 되었는가’ 를 갖고 한참을 떠들더라. 뭔가를 전유한다 할 때의 전유, 난 사실 전쟁이 끝나고 나면 내 품에 달랑 들어오는 전유물 할 때의 '전유' 정도로 알고 있었는데, 전유적 글쓰기는 하여간 길게도 설명하더라...니. 어쨌든 읽어서 오육십 프로 이해 안 되면 그런 글은 몽땅 사기로 보면 돼. 마부가 말하자 여자는 꾸물대며, 그래도 3년 전 읽었을 때 뭔가 눈에 들어와서 스크랩을 했으니 사기는 아닐거야. 오우 그러셨어요!

 

밑줄 쫙 빨간 글씨 강조 생소한 말 사전찾기 하면서 차분한 공부가 되었으니, 이제 회덮밥 먹을 자격은 충분한가. 수협에 딸린 길 건너편 횟집엔 유난히 회덮밥에 회를 많이 넣어준다. 가끔 비오는 날 먹었을 땐 비릿한 냄새도 맡았던 거 같은데. 그러면 한 동안 끊다가 뽀송한 날 다시 가기 시작한다. 포스트모던 시대에 복제판 글쓰기. 복제양 둘리가 연상되지만. 사실 평론에서 말한 다시 쓰는 텍스트란 단순한 베끼기 작업을 의미하는 건 아니라는 것쯤 알지. 그래도 역시 평론가의 자기만의 개성이 부족해, 마부의 말끝에 여자의 똘팍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밥 먹다 갑자기 졸음이 쏟아진다. 우선, 엔코딩encoding이니 데코딩decoding이니 하며 무슨 코디네이션 얘길 하는지, 기본 단어부터가 막히기 시작해, 이순신에 가서는 장계狀啓니 면사첩免死帖이니 하는 듣도 보도 못한 말이 나오니, 외국어 사전 읽는 느낌을 넘어서 숨이 턱!

 

그러게…그러니 내가 뭐래, 장난으로 한 줄 읽어도 명작을 읽으랬지. 작가 못잖게 독자도 자존심이 있어야 해. 획 던져버릴 줄 아는 자존심! 동문서답 마부와 그래도 좋은 평론이었다고 우기는 여자. 여자는 결국 회 석 점을 남긴다. 맛 없어? 아니 배 불러. 오늘은 여기까지만 말 하자. 기억력의 한계를 고려해서. 좋은 거 아무리 먹어도 한꺼번에 다 소화를 못 시키니까. 아랑은 왜… 그것은 나중에 하자! 근데, 정말 멋진 문장이더라. 뭐가? 소설에 이순신의 고뇌를 적은 구절 중에 ‘칼로 적을 겨눌 때, 칼은 칼날을 비켜선 모든 공간을 동시에 겨눈다. 칼은 겨누지 않은 곳을 겨누고, 겨누는 곳을 겨누지 않는다. ‘ 이 말 되게 멋지지 않나? 마부는 대꾸 안하며 갸우뚱하고. 여자는 ’칼‘ 대신 괄호에 ’손가락‘을 넣어 봐, 멋지지? 그지? 한다. 그래도 마부의 반응은 별로다. 횡설수설, 뻔 한 얘기에 방방 뛰었나, 여자는 시무룩…! 저녁 회덮밥 계산은 여자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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