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문정희<시계와 시계 사이> 외 1편

미송 2012. 10. 11. 07:38

 

시계와 시계 사이

 

이 아침 고장난 시계 속에 눈을 뜬다
고장난 시계가 이를 닦고
고장난 시계가 밥을 먹고
고장난 시계가 나이를 먹는다
그래도 어딘가 맞는 시계가 있으리라
나는 그런 시계를 하나 갖고 싶다
나는 CNN을 본다 CNN은 당황하여
고장난 시계가 있는 곳에 특파원을 파견하고
꼬리를 잘 흔들고 손을 싹싹 비비고 눈치를 살핀다
고장난 시계에다 총구를 갖다 댄다
고장난 시계를 고치러 다니는 사람들을
대화라든가 외교라는 말로 보도한다
결국 모두가 제 힘으로 살다 가는 것
세상의 모든 시계를 똑같게 고칠 수는 없나 보다
너와 나 사이에는 어차피 시차가 있다
고장난 시계로 길을 걷다가
교차로에 서서 시계탑을 본다
나의 시계가 맞는지 교차로의 시계가 맞는지
알 수 없다
모든 시계는 나이가 없다
제각기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다.

 

 

弔燈이 있는 풍경

 

이내 조등이 걸리고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아무도 울지 않았다
어머니는 80세까지 장수를 했으니까
우는 척만 했다
오랜 병석에 있었으니까
하지만 어머니가 죽었다
내 엄마, 그 눈물이
그 사람이 죽었다
저녁이 되자 더 기막힌 일이 일어났다
내가 배가 고파지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죽었는데
내 위장이 밥을 부르고 있었다
누군가 갖다 준 슬픈 밥을 못 이긴 척 먹고 있을 때
고향에서 친척들이 들이닥쳤다
영정 앞에 그들은 잠시 고개를 숙인 뒤
몇 십 년 만에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위로의 말을 건넸다
아니, 이 사람이 막내 아닌가? 폭 늙었구려
주저 없이 나를 구덩이 속에 처박았다
이어 더 정확한 조준으로 마지막 확인 사살을 했다
못 알아보겠어
꼭 돌아가신 어머니인 줄 알았네.

 

 

 

‘우주만물에는 自省이 없다’란 말이 시를 읽으며 떠오른다. 어딘가에 꼭 맞는 시계가 있으리란 희망은 고장난 시계의 희망이다. 시계 아니 자신이 고장났다는 것이 사실이 아닌 관념일지라도, 그 역시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교차로의 시계탑이든 나를 깊숙이 투사해서 보는 시계든, 둘 중 하나는 분명 고장이 났을 거야! 하는 화자의 맹랑한 시선. 그러나 독자의 눈엔 그것이 싱싱하게 보인다. 그런 깜찍한 생각을 도전적이던 20대 시절에 나도 잠간 했던 거 같아, 기시감이 드는 시편이네! 맞장구를 치게 된다. 저항하고 싶은 그러나 저항할 수 없는 분기점에 선 한 사람(여자 또는 남자)으로서의 순응과 결단, 삿대질과 아.. 네네..하는 포즈가 떠오르면서, 사뭇 대립적이나 역시 싱싱한 에너지가 느껴지는 시. 그녀의 두 번째 시에도 역시 그런 싱싱한 에너지가 숨어 있다. 아, 참! 싱싱하다는 건 대체 어떤 모습 어떤 느낌이길래 아침부터 자꾸 쓰고 있는지 몰라(아침이니까 내 기분이 그렇다는 건가 혹시). 하여간 그녀 혹은 그녀의 시편에선 참 씩씩해! 저런 상황에서 어찌 이런 기분을 선사할까! 하는 감동이 몇 번 더 왔던 기억이다. 솔직 대담 발랄. 우울을 찡긋 웃음으로 둔갑시키는 힘 역시 시인의 가치관이자 삶의 태도일 거 같단 추측을 한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