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흥정 / 타고르
“자! 누구나 나를 사다 쓰라.” 이른 아침 포도를 걸으며 나는 이렇게 외쳤
습니다. 손에 칼을 뽑아 들고 임금이 마차를 몰아왔습니다.
그는 내 손을 잡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가 그대를 권력으로 쓰리라.”
그러나 그의 권력이란 나에겐 아랑곳없는 것이지요.
그는 마차를 몰아 돌아갔습니다.
한낮 불볕에 집들은 모두 문을 닫고 헐떡일 때 나는 꼬부라진 골목길을 배
회하였습니다.
한 늙은이가 돈주머니를 들고 나왔습니다.
그는 한참 생각하다가 말하였습니다. “내가 그대를 돈으로 쓰리라.”
그는 금화 한 푼 또 한 푼 저울질하였으나 나는 고만 돌아섰습니다.
저녁때였습니다. 정원을 둘러싼 울타리는 모두가 꽃이었습니다.
아름다운 처녀가 나오더니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가 그대를 웃음으로
사리다.”
그러나 그녀의 미소는 눈물방울로 변하여 어둠 속을 호올로 사라졌습니다.
해가 모래 위에 빛나고 파도는 제멋대로 바셔졌습니다.
한 아이가 조개껍질로 장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머리를 쳐들고 나를 아는 듯이 말하였습니다. “나는 거저 당신을 사
리다.”
그때부터 아이와 맺어진 약속이 나를 자유로운 사람으로 한 것입니다.
라빈드라나드 타고르의 시집 [초생달]에 수록된 40편 중 제일 마지막에 실려 있는 <마지막 흥정>의 전문이다. 동양인으로서는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이기도 한 인도의 타고르는 처음 모국어인 벵골 말로 시를 쓴 후 스스로 영어로 번역했는데, 예이츠와 같은 시인의 격찬을 받았고 이내 세계적인 시인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1920년대에 안서 김억의 번역이 두 권이나 나왔고 그 중 '원정 (園丁)'은 만해 한용운의 '님의 침묵'에 그 독후감 시편이 실려 있다. 김안서는 에스페란토어로 된 시집에서 번역을 했는데, 그후 다른 번역본이 여러 차례 우리나라에서 출판되었다. 앞의 번역은 시인 임학수가 1948년에 상재한 '초생달'에 실린 것을 옮긴 것인데, 쉬우면서도 격조 있고 50년 전의 것으로는 아주 세련된 좋은 번역이다.
어린 소년이 포도(鋪道)를 걸으며 자기를 고용하라고 외친다. 칼을 든 왕이 다가와서 권력으로 쓰겠다고 하지만 소년은 고용을 거절한다. 다음에는 돈 많은 노인이 돈으로 고용하겠다고 하지만 소년은 거절한다. 번역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이 대목에 나오는 "꼬부라진 골목길"에서 '꼬부라진'은 동시에 '정직하지 못한', '삐뚤어진'이란 뜻이 있어서, 그것이 노인의 돈주머니에 대하여 어떤 시사를 하고 있음에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다음에는 아름다운 소녀가 나타나서 미소로 유혹하지만 소년은 그것마저도 물리친다. 마지막으로 바닷가에서 조개껍질을 가지고 장난하던 어린이가 '거저' 쓰겠다고 말한다. 권력이나 돈으로가 아니라 그냥 쓰겠다는 것이다. 어린이의 놀이 속에서 맺은 계약이 그 이후 소년을 '자유인'으로 만들었다고 회자는 말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권력도 재산도 이성의 매혹도 아니고, 어린이의 놀이속에서와 같은 순결하고 조건 없고 자유로운 인간관계라고 이 작품은 말하고 있다.
굳이 이 작품의 의미를 요약하자면 그렇게 되지만 이러한 전언으로 환원시키고 보면 시의 맛은 크게 사라지고 만다. 우선 우리는 복잡하지 않은 구도 속에서 펼쳐지는 동화적인 전개에 마음을 맡겨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 대목의 의미 깊은 암시성을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어린이는 소년 화자를 보고 "나를 아는 듯이" 말하였다. 두 사람 사이에는 이심전심으로 전해지는 어떤 교감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무구한 사람들 사이에서 쉽게 발견되는 상호 인지의 교감이다.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자유로운 인간관계와 참다운 자유의 향유가 가능해진다.
예이츠는 타고르의 '기탄잘리'에 부친 서문에서 벵골 말로 된 원문 서정시가 정교한 리듬과 운율상의 창의성, 섬세한 색조로 가득 차 있다는 인도인 친구들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번역된 시를 읽을 때 원시의 아름다움이 많이 사라졌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읽으면서 그것을 상상 속에서 보완할 필요가 있겠다.
그렇지만 타고르 시의 놀라운 점은 원시의 아름다움이 많이 소멸된 영어 산문시를 통해서도 깊고 때로는 경건하기까지 한 삶의 태도와 정감이 격조 있게 전달된다는 점이다. 그의 영어산문시는 고등학교 2학년 정도의 구문 이해 능력만 있으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복잡하고 난해한 대목이 없다. 이 세상의 지혜란 결코 난해하거나 복잡하거나 한 것이 아니다. 공연히 어려운 것을 숭상하고 단순함 속에 숨어 있는 심오한 뜻이나 지혜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은 성숙하지 못한 정신의 소모적인 버릇이다. 타고르의 단순함 속에 깃들인 그윽한 지혜를 헤아려보는 것도 뜻깊은 경험이 될 것이다.
타고르에게는 '길 잃은 새'라는 아포리즘 시를 모은 시집이 있다. 불과 두서너 줄로 되어 있는 짤막한 것이지만 감칠맛 나는 것이 많다. 억지로 지혜의 왕자 같은 허세를 피우는 것이 아니라 대개 소박한 동양의 지혜를 적어놓은 것이다. 그 중에서 한두 개만 예를 들어보기로 한다.
대지여, 나는 나그네로 그대 땅에 들렀고
손님으로 그대 집안에서 살았고
친구로 그대의 문간을 떠나노라.
-<길 잃은 새> 중에서
이 땅에 나그네로 와서 손님으로 살았고 이제 친구로 떠난다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중요한 시사를 던져준다. 손님처럼 고맙게 또 주인에 대한 세심한 배려를 하면서 살아야 할 것이며, 또 떠날 때는 좋은 친구로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삶에 임하여 경건하고 성실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이렇게 간결하고 평범하고 정감 있게 토로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또 교훈적인 글이 항용 풍기는 거부감 비슷한 것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도 눈에 뜨인다. <중략>
모든 아기는 신이 인간에게 실망하지 않았다는
전언을 가지고 세상에 나온다.
-<길 잃은 새> 중에서
유종호<시 읽기의 방법>(2005, 도서출판 삶과 꿈> pp 198~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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